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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産 넘어 한국式 음악으로 K-팝 진화는 어디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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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분이 ‘케이팝 데몬 헌터’인가요?” “아니오. ‘케이팝 데몬’입니다.”
7월 워터밤 서울 2025 페스티벌에 등장한 가수 겸 프로듀서 박진영을 두고 오간 말입니다. 핫핑크 시스루 홀터넥 상의와 비닐 바지를 입고 무대를 장악한 그의 퍼포먼스는 53세라는 나이를 무색하게 만들었습니다. 1994년 솔로 가수로 데뷔한 이래 최정상급 댄스가수이자 K-팝을 대표하는 엔터사 설립자·대표 프로듀서인 ‘자칭 딴따라’ 박진영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그런 그가 연예 기사가 아닌 정치 기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했습니다. 이재명 대통령이 9월 9일 신설한 대통령 직속 대중문화교류위원회의 공동위원장으로 내정된 겁니다. 이날 이 대통령은 대중문화교류위원회 신설 배경에 대해 한국문화에 대한 세계적 관심이 높은 상황에서 음악·드라마·영화·게임 등 대중문화 확산에 필요한 민·관 협업체계를 마련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핫핑크 비닐 바지를 뚫고 나오는 섹시 무브먼트로 워터밤을 들었다 놓은 K-팝 스타가 대통령 직속 기구를 이끄는 수장이 된 사실만 놓고 보면 파격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K-팝이 태동한 시점부터 어떤 궤적을 그리며 정립되고 지금의 위상을 갖추게 됐는지 면면히 살펴보면 생각이 달라질 겁니다. 참, 배경음악으로 박진영 내정자의 대표곡들을 틀어놓으면 더 적절하겠네요.

K-팝의 실체
K-팝이란 대체 뭘까요? 이에 대한 대답은 때에 따라 달라졌습니다.
원래는 정체성에 무게를 뒀습니다. 한국에서 만들어지고 주로 한국인들이 향유하는 대중음악 ‘가요’가 곧 K-팝이었습니다. 출발점부터 1990년대 말 한국 대중음악을 영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용어였습니다. 1990년대는 한국 가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황금기이자 대전환기였습니다. 가수 이수만이 1989년 SM기획(SM엔터테인먼트의 전신)을 설립하고 이듬해 SM 1호 가수 현진영이 데뷔한 것을 현대적인 K-팝, 댄스가요의 태동으로 보기도 하지만 사회·문화적 영향력을 고려하면 서태지와 아이들이 ‘난 알아요’로 데뷔한 1992년을 기점으로 말하는 전문가들이 많습니다. 서태지와 아이들 ‘Come Back Home’, 김건모 ‘잘못된 만남’, 노이즈 ‘상상속의 너’, 룰라 ‘날개 잃은 천사’ 등 명곡들이 쏟아져나온 1995년은 그야말로 황금기였죠.
서태지와 아이들이 은퇴한 1996년은 H.O.T.가 데뷔한 해이기도 했습니다. H.O.T.는 한국 엔터 기획사의 아이돌 연습생 시스템을 거쳐 데뷔한 첫 아이돌 그룹이죠. 캐스팅, 트레이닝, 프로듀싱, 마케팅에 이르는 단계를 전문화·체계화한 이수만 SM엔터테인먼트 창립자는 이를 문화기술론(Culture Technology)이란 이름으로 개념화했습니다. 10대 팬덤을 중심으로 아이돌 그룹은 빠르게 대중음악 시장을 장악했고 그 영향력은 국내 무대를 넘어 해외로 확장됐습니다. 한류의 한 지류로서 작동하기 시작한 겁니다. 일본 오리콘 차트 1위를 차지한 보아(2005년), 도쿄돔에서 최초 공연한 비(2007년)를 이어 동방신기, 소녀시대, 카라, 빅뱅 등이 아시아 전역에서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 시점부터 K-팝은 음악을 넘어 전후방 산업을 포괄하는 시스템 전반을 가리키는 용어가 됐습니다. 엔터 기획사의, 철저한 트레이닝을 거친 아이돌 가수가, 전문적이고 분업화된 프로듀싱을 거쳐 생산한 노래를 부르는, 엔터테인먼트 산업 자체가 된 겁니다. 칼군무와 영상미 넘치는 뮤직비디오, 온·오프라인 팬덤 활동 역시 K-팝의 아이덴티티로 자리 잡았죠.
2000년대 들어 작곡, 안무 같은 프로듀싱 단계부터 아티스트까지 외국인의 참여가 늘어나며 국적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 점차 무의미해졌습니다. 이 시점부터 K-팝은 한국 스타일의 대중음악으로 의미가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메리엄-웹스터 영어 사전은 ‘한국에서 유래한(originating in) 대중음악’으로 정의하고 있죠.

장르가 된 K-팝
2010년대 이후 K-팝은 아시아를 넘어 세계 대중음악으로 스며들었습니다. 2012년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유튜브 영상 최초로 10억 조회수를 돌파하며 세계화의 마중물을 부었습니다. 방탄소년단(BTS)과 블랙핑크 양대 축을 중심으로 빌보드(차트 성적)와 코첼라(무대 파워)에서도 통하는 K-팝의 저력을 증명했고요. 전 세계가 즐기는 콘텐츠로서의 K-팝은 한국의 문화 전략자산이 됐습니다. 2014년 빅뱅이 한국관광공사 명예홍보대사로 위촉된 이래 EXO, 소녀시대 윤아, ITZY, 브레이브걸스, BTS 등이 ‘한국의 얼굴’로 활동했습니다. EXO와 2NE1의 CL은 2018 평창동계올림픽 폐회식 무대를 장식하기도 했죠. 같은 해 북한 평양 동평양대극장에서 공연한 레드벨벳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앞에서 무려 ‘빨간 맛’을 열창했습니다.
그리고 6월 20일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서비스인 넷플릭스에 ‘케이팝 데몬 헌터스(이하 케데헌)’가 등장합니다. 미국 영화 제작사에 의해, 해외 자본으로 만들고 한국계 미국인의 목소리로 만든 이 작품의 메가 히트는 K-팝에 새로운 정의를 부여했습니다. 국적과 상관없이 전 세계에서 통용될 수 있는 ‘하나의 장르’가 됐다는 점입니다. 8월 영화의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 ‘골든’이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 핫100에서 1위를 차지했을 때 빌보드 측은 이 곡에 대해 “핫100 차트를 정복한 여덟 번째 K-팝 노래로 여성 가수가 부른 첫 번째 K-팝 노래이기도 하다”고 평했습니다. 작곡가 이재와 가수 오드리 누나, 레이 아미 모두 한국계 미국인이지만 K-팝으로 소개한 것이죠. 이렇듯 케데헌은 K-콘텐츠의 세계화 다음 단계, 세계 콘텐츠의 K화 가능성을 보여줬습니다.
이렇듯 K-팝의 정의는 ‘한국 대중가요→댄스가요→아이돌 음악→아이돌 문화산업→한국에서 유래한 대중음악→세계적인 대중음악→하나의 장르’로 변해왔습니다. 복수의 정의들은 서로 느슨하게 혹은 긴밀하게 연결돼 있기도 하고 복합적이고 다층적으로 섞여 있습니다. ‘K-팝이란 이런 것’이라고 단순히 정의하기 어려운 이유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 단언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이제 K-팝은 한국산(産)이 아닌 한국식(式) 대중음악으로서 무한한 확장성을 갖추게 됐다는 점입니다.

민·관의 날개로 난다
보고 듣고 느끼고 즐기는 문화 콘텐츠는 취향과 오락의 영역입니다. 대중을 열광하게 만드는 매력은 관(官)의 정책으로는 다다를 수 없습니다. 수익과 생존, 엔터테인먼트 업계에 투신한 이들의 인생이 걸린 절실함.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으로 대중과 소통하고 싶은 문화예술인의 긍지와 열정. 대중의 수요를 발 빠르게 내재화하고 때로는 한발짝 먼저 이끄는 기민함과 역동성. 이 모든 것들이 응축된 민간 영역의 저력과 대중의 호응이 시너지를 이룰 때 비로소 문화 콘텐츠는 시대의 아이콘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정부가 대중문화교류위원회의 초대 공동위원장으로 최휘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30년 넘게 K-팝 최전선에서 활약한 인물을 함께 지명한 것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 이유입니다.
시대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영역을 넓혀온 K-팝이 민·관의 유연하고도 뚝심 있는 협업을 통해 또 어떤 모습으로 진화하게 될지 벌써부터 궁금해집니다.

홍성윤
대중문화에 관심이 많은 일간지 기자. ‘걸어다니는 잡학사전’으로 불리며 책 ‘그거 사전’을 썼다.


[자료제공 :icon_logo.gif(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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