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한 마을에 카페 같은 주민 시설 마을을 담고 주민을 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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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남산동 주민공동시설’
광주광역시 외곽, 평림천과 황룡강이 합류하는 작은 마을 남산동. 고령화의 그늘 속에 허름한 건물만 남은 이 마을에 몇 해 전 현대적인 디자인의 노출 콘크리트 건물 하나가 들어섰다. 서울 성수동에나 있을 법한 감각적인 건물의 정체는 놀랍게도 주민공동시설. 마을 어르신들이 와서 편히 쉬고 친목을 도모하는 공간이다. 그렇다고 단순한 지역 커뮤니티 센터는 아니다. 낙후된 마을에 활력을 불어넣는 새로운 얼굴이자 마을 주민들의 일상 속에서 하나의 배경 역할을 한다.
3년 전 완공된 이 건물은 건축가 조경빈(필동2가아키텍츠 건축사사무소 대표)의 작품으로 2022년 한국건축문화대상 수상작이다. 조 건축가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한 ‘2024 젊은 건축가상’을 받은 촉망받는 건축가다.
‘배경으로 존재하는 최소한의 건축’
건축 사각지대인 농촌, 그것도 공공건축물에 실력파 건축가가 참여한 사연은 이렇다. 몇 해 전 정체돼 있는 지역을 개발하고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취지의 ‘광주형 일자리’ 사업이 추진되며 이 지역에 대규모 공업단지가 조성됐다. 이 과정에서 고압선이 마을들을 관통하면서 한국전력공사에서 각 마을에 보상금을 지급했다. 마을마다 보상금을 쓰는 방식은 달랐다. 가구별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는 동네도 있고 창고를 짓는 마을도 있었다. 남산동의 접근 방식은 좀 달랐다. 단순히 눈앞의 이익을 실현하기보다 마을의 지속가능한 활력과 젊은 세대의 유입 가능성을 고민했다. 그 해답을 ‘건축’에서 찾았다.
공동체의 중심축 역할을 하는 공간이지만 방치됐던 노인정이 프로젝트의 중심이 됐다. 주민들은 기존 노인정 자리에 주민이 이용하면서도 공유 자산으로서 임대 수익 등을 통해 지역사회에 이익이 환원될 수 있는 건축물을 원했다. 그래야 지속가능한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왕이면 이 건물이 외부 사람들이 마을을 방문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건축가에겐 ‘단순한 휴게 공간이 아닌 임대 수익을 낼 수 있는 공간. 그러면서 매력적인 공간 설계’라는 쉽지 않은 과제가 주어졌다. 마침 인근에서 한 협동조합이 카페와 베이커리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장소가 협소해 넓은 공간이 필요하던 차였다. 이 조합에선 조합원인 주민들이 직접 재배한 밀, 보리, 매실 등으로 커피, 빵, 과실청, 가공제품 등을 만들어 수익 사업을 하고 있었다. 이 협동조합이 입주할 수 있도록 공간을 구성해야 했다.
조 건축가는 채우기보다 ‘배경으로 존재하는 최소한의 건축’을 지향했다. “집터 주변의 너른 평야가 사시사철 계절 변화에 따라 색을 달리했다. 이런 자연을 그대로 받아줄 수 있도록 건축은 단순할 필요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기존의 풍경 속에서 튀지 않고 어우러지며 배경이 되는 건축을 위한 재료는 콘크리트였다. 예산 제약을 해결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단조롭지 않다. 살수 치핑(chipping· 물을 부어 거칠게 만드는 것), 문양 거푸집 등으로 외벽 콘크리트 표면의 질감을 다양하게 했다. 그 결과 해의 고도와 계절에 따라 건물의 표정이 달라진다. 인접한 오래된 창고의 박공지붕과 콘크리트 담장이 이질감 없이 어우러지고 전통 목담장과 닮은 콘크리트 담장은 폐쇄의 느낌이 아닌 유연한 경계로 작동한다. 조 건축가는 “건축물의 다양한 재료가 오래된 마을을 혼탁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해 건축 구축을 위한 재료는 단순화하되 다양한 효과를 나타내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주민이 함께 만든 건축
건물은 본동과 부속동으로 구성된다. 도로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첫 진입부에 부속동을 배치하고 안쪽에 2층 본동을 뒀다. 그 사이를 흐르는 담장과 마당은 단순한 경계가 아니라 유기적인 외부공간으로 확장된다. 총 세 개의 마당이 형성돼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허문다. 주차공간으로도 활용되는 전면 마당은 준공식 때 열린 무대 겸 광장이 됐다. 내부는 협동조합이 운영하는 카페와 주민 휴게 공간으로 쓰인다. 과거 노인정에 기증된 비석도 그대로 남겨둬 이곳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다.
건축가에게는 단순한 신축 이상의 의미를 갖는 프로젝트였다. 설계 전 마을 주민 대표 여덟 명으로 구성된 발전위원회가 꾸려졌다. 이들을 중심으로 주민들이 설계자를 선정하고 디자인, 자재 등 거의 모든 요소를 함께 결정했다. 주민들과 함께 쌓아올린 결과물인 셈이다. 조 건축가는 “민간 자본과 공공성이 교차하고 고령화된 마을에서 주민들이 주체적으로 건축의 의사를 결정하는 과정은 흔치 않다”고 했다.
건축가는 단순히 공간을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입장을 설득하고 해석하는 일에 가까웠다고 한다. 총 7회 이상의 주민 미팅은 단순한 설명회가 아니라 공간에 대한 감각과 기대를 나누는 자리였다. 콘크리트라는 재료가 어르신들에게 낯설지 않게 다양한 마감 샘플을 보여줬다. 마감재 하나하나에 대한 설명과 합의가 필요했다. 그럼에도 완공 후 “이게 다 한 거냐”고 물은 주민도 있었다. 어색함도 시간이 지나면서 옅어졌다. 콘크리트 벽에 드리운 그림자와 햇살, 마당의 나무 그늘 아래서 주민들이 커피 마시며 담소 나누는 모습이 자연스러워졌다.
조 건축가는 말한다. “풍화된 집들과 그 세월을 기억하는 듯 높게 솟은 가로수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려 마을의 배경이 됐다. 주변의 개발과 다르게 마을은 느리게 변화하는 곳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그 모습을 지키고 싶었는지 모른다.”
2024년 젊은 건축가상 수상 당시 심사위원단은 조 건축가의 진정성 있는 건축 태도에 이런 찬사를 보냈다.
“주어진 건축적 상황을 인내하고 적정한 해결책을 찾아내는 치열한 꾸준함과 차분하고 침착한 태도가 건축으로 나타난다. 단정한 공간으로 표현되는 절제되고 이성적인 건축 언어들은 사회적 환경을 책임지는 건축가로서 공공성과 감수성을 보여준다.”
남산동 주민공동시설은 배경이 되기 위해 스스로를 비운 건축, 경계를 허물되 마을의 풍경 안에 자연스레 스며든 건축, 무엇보다 주민이 함께 만든 건축이다. 급속한 고령화로 소멸 위기에 처한 농촌 사회의 귀감이 되는 작지만 의미 있는 시도다.
김미리 문화칼럼니스트
새 밀레니엄의 시작과 함께 신문사 문턱을 가까스로 넘은 26년 차 언론인. 문화부 기자로 미술·디자인·건축 분야 취재를 오래 했고 지금은 신문사에서 전시기획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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