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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조각보에 몬드리안의 추상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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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 문화의 가치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 문화가 탄생한 배경과 독창성, 그리고 그 안에 깃든 의미를 어느 정도나 이해하고 있을까? 문화는 현재 우리가 몸담고 사는 삶의 방식이라서 너무 당연하게 생각한다. 마치 평소에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는 것처럼. 가끔 현지인들보다 외국인들에 의해 그 나라의 문화가 가치평가를 받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K-컬처의 약진은 우리가 몰랐던 우리 문화의 가치를 재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조각보는 앞으로 그 가치를 조명해봐야 할 대표적인 문화유산 중 하나다.
필자의 어머니는 옷 만드는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50여 가구 남짓 되는 작은 산동네에서 그 마을의 옷을 전부 도맡아 만들었다. 패션 디자이너라는 명함도 없었고 패션 부티크 매장을 차린 적도 없지만 어머니의 바느질 솜씨는 동네에서 최고였다. 어머니의 방은 항상 색색의 옷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린 시절 필자는 재봉틀에 앉은 어머니 모습을 보고 자랐다. 윗목에 쌓인 옷감은 세상의 색이란 색은 다 가져다놓은 듯 찬란했다. 옷감이 예뻐서 행여 손으로 만지려고 들면 어머니는 기겁을 하며 손사래를 쳤다. 대신 쓰다 남은 천 쪼가리를 쥐어주었다.
어머니는 자투리 천을 버리지 않고 바구니에 모아뒀는데 그 천으로 밥상보도 만들고 옷덮개보도 만들었다. 어린아이인 내게는 장난감을 담을 수 있는 주머니를 만들어줬다. 모양과 재질이 서로 다른 천 쪼가리가 산만하거나 어지럽지 않고 일정한 틀을 갖춰 쓸모있는 용도로 변화돼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많은 것을 배웠던 것 같다.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가 만든 조각보를 보고 자란 덕분인지 나중에 커서 네덜란드의 화가 몬드리안(1872-1944)의 작품 ‘차가운 추상’을 봤을 때 그 유사성에 무척 놀랐다. 몬드리안이 어머니의 조각보를 모방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조각보는 비단 어머니뿐만 아니라 조선의 여인이라면 누구라도 즐겨 만든 창작품이었다. 유교를 국시로 삼아 내외법이 엄격했던 조선시대에는 여인들의 사회활동이 거의 금지돼 있었고 주로 규방이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지내야만 했다. 이때 조각보는 여인들의 창의성과 미적감각을 마음껏 발현할 수 있는 중요한 소재였다.
‘쪽보’라고도 부르는 조각보는 작은 천 쪼가리도 아끼고 재활용하고자 했던 생활습관을 보여준다. 쪽보는 궁중, 민간 할 것 없이 많이 제작됐는데 그 용도 또한 매우 다양했다. 궁중에서 쓰던 궁보는 이불이나 요 등 침구류를 싸던 홑보, 예물을 싸던 겹보, 음식물을 싸던 식지보, 누비로 만든 누비보, 함과 궤를 덮은 당채보 등을 들 수 있다. 민간에서 쓰던 민보는 이불보, 보부상보, 밥상보, 옷감보, 빨래보, 버선보, 덮개보, 책보 등 궁보보다 그 가짓수가 훨씬 많다. 조선은 갓보다 더 많은 조각보를 가진 나라였고 그 전통은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 조각보야말로 우리 민족의 색감과 조형성, 창의성과 절약성을 보여주는 최고의 증거물이다.
최근에 소니 픽처스가 한국 전통문화와 K-팝을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제작하고 넷플릭스에서 공개해 대박을 터트렸다. 둘 다 한국이 아닌 외국 회사들이다. 외국인들이 한국 문화에 열광하는 현상은 반길 만하지만 우리 스스로는 아직도 우리 문화의 가치를 모르는 것 같아 우리 손에 쥐고 있던 보물을 털린 것 같은 기분이다. ‘팔만대장경도 모르면 빨래판이다’라는 책 제목처럼 이제는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문화의 가치를 눈여겨봐야 할 때다. 조각보는 몬드리안의 추상화가 나오기 훨씬 이전에 이미 조선시대 여인들이 장난감처럼 갖고 놀던 공예품이다.





조정육 미술평론가



[자료제공 :icon_logo.gif(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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