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로 잃은 다리 자전거로 극복 “의족보다 자전거 먼저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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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사이클 국가대표 박찬종 선수
전국은 물론 동아시아권 사이클 선수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8·15 경축 2025 양양 국제사이클대회 및 전국사이클선수권대회’가 8월 19일부터 22일까지 강원 양양에서 열렸다. 수많은 선수가 모인 이곳에서 단연 눈에 띄는 한 사람이 있었다. 한쪽 다리에 의족을 차고 도로로 나선 대한민국 장애인사이클 국가대표 박찬종(35) 선수다.
국내 장애인사이클 국가대표 11명 중 절단 장애인은 그가 유일하다. 그는 이 대회 장애인 경기에서 기록과 순위를 다투는 개인 독주와 도로 레이스 경기에 출전해 금메달 두 개를 거머쥐었다. 장애인사이클 경기는 장애 정도에 따라 카테고리를 나누는데 박 선수가 포함된 카테고리 C3는 선수가 아무도 출전하지 않았다. 운도 따라준 메달인 셈이다. 경쟁 선수는 없었지만 그는 개인 기록 경신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이날 기록은 2024년 전국장애인체육대회 때에 비해 1초 뒤졌지만 의미가 컸다. 날씨와 노면 상황을 그대로 이겨내야 하는 야외에서 경기가 치러졌기 때문이다. 박 선수도 “기존 기록보다 4~5초 정도 늦을 거라 예상했다”며 “돔 구장에서 했으면 기록을 경신하지 않았을까”라고 말했다. 사실 짧은 선수 경력을 감안하면 놀라운 기록이다.
불과 3년 전까지만 해도 그는 화학회사 연구원이었다. 건강한 직장인의 목표가 한순간에 ‘걷기’로 바뀐 건 퇴근길에 당한 교통사고 때문이었다. 업무를 마치고 여느 때처럼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가던 중 두 개 차선 안쪽에서 달리던 5톤 트럭이 그를 덮쳤다. 이 사고로 트럭에 깔린 그는 헬기로 이송돼 수술을 받았고 왼쪽 무릎 아래를 절단했다. 2022년 9월의 일이다. 이듬해 5월 결혼을 앞둔 상황이었다.
깊은 절망이 덮쳤지만 그는 가라앉는 대신 현실을 마주하며 이겨내는 방향을 선택했다. 사고 후 7일 만에 그가 처음 개인 누리소통망(SNS) 계정에 남긴 글에도 긍정의 기운이 가득했다. ‘트럭 바닥에서 생의 끈을 놓치기 직전에 목숨을 구해주셔서 보너스 인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루하루 힘들지만 몸 건강히 회복하고 재활해 내년 5월에 결혼식장에 당당히 걸어서 들어갈 것.’
안하던 농담도 늘었다. ‘무지외반증이 있었는데 없어졌다’, ‘내 왼쪽 슬리퍼는 오른쪽 다리가 없는 사람에게 주세요’ 등. 힘들어하는 가족과 어떻게 위로의 뜻을 전해야 할지 몰라 입을 떼지 못하는 친구들을 위한 배려였다. 냉장고 위칸에 있는 음료조차 꺼내지 못하는 현실을 마주하면서도 그는 부단히 자신을 다잡았다.
그리고 사고가 난 지 2년 7개월 만에 국가대표로 당당히 태극마크를 달았다. 전국 대회에 수차례 출전해 메달을 휩쓸었다. 1000마일(약 1609㎞) 코스 사이클링으로 기부금을 모으는 글로벌 캠페인 ‘원마일클로저(One Mile Closer·OMC)’에도 참여했다.
자전거와 함께 맞은 비극을 자전거로 이겨낸 그가 걸어온 길은 ‘불굴의 투지’ 이상의 메시지가 있다. 자전거 바퀴에 희망을 싣고 달리는 그를 광주광역시의 한 공원에서 만났다.
사고 후 처음 쓴 글을 보고 놀랐다. 원래 긍정적인 편인가?
단지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려고 한 결과다. 벌어진 일에 감정이 매몰되는 대신 내게 일어난 일을 파악하고 앞으로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에 대해서만 생각하다보니 여기까지 온 것 같다.
실없는 농담을 잘한다고?
아직도 내 개그에 적응한 사람은 없는 것 같다. 굳이 꼽자면 아내 정도? 농담을 하니 어머니가 어이가 없었는지 사고 이후 처음으로 웃으시더라. 내가 죽을상을 하고 있으면 가족이나 면회 온 친구들이나 어떤 말도 하기 어렵다. 농담을 섞어 가볍게 이야기하면 쉽게 말이 트이기에 이 방향을 고수했다(웃음).
의지와 현실 사이 갭이 컸을 것 같은데.
퇴원 첫날이 기억에 남는다. 아파트 단지에 장애인 주차장이 없는 데다 현관에 붙잡을 게 없어 신발을 벗기 힘들더라. 장애라는 게 익숙한 공간이 아니면 더 절실하게 느껴진다. 특히나 화장실 이용이 정말 어렵다. 씻을 땐 의족을 벗는데 다리 하나로 미끄러운 화장실에 서 있는 건 위험한 일이다. 얼마 전 아이가 태어나서 육아도 하는데 한 발로 서서 아이를 안는 것도 쉽지 않더라.
마음을 다잡은 비결이 있을 것 같다.
사고 초기에는 일기를 쓰고 블로그에 올리는 게 도움이 많이 됐다. 당일에 쓰면 감정이 많이 들어가는데 2~3일 지난 후 그날을 기억하며 쓰면 객관적으로 쓸 수 있다. 그 일기들을 나중에 다시 읽으면 ‘별일 아니었다’ 싶은 일들이 대부분이다. 이 과정을 반복하니 내 상황을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고 주어진 현실이 그렇게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의족을 신은 첫날부터 걸었다고 하던데 쉬운 일이 아니라더라.
의족을 신고 지팡이 없이 걷는 데 보통 4개월 정도가 걸린다. 난 의족을 맞추기 전부터 새 자전거를 사놓고 꼭 다시 타겠다는 마음으로 병실에 매트 깔고 한 발 스쿼트, 한 발 덤벨 등 운동을 했다. 스무 살 때부터 자전거를 타며 운동을 계속해온 것도 도움이 많이 됐다.
자전거를 다시 타겠다고 했을 때 가족들 반응은 어땠나?
가족들과 늘 함께 있으면서 감정이나 생각을 많이 공유했다. 아내 말로는 내가 자전거를 타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부터 내 눈빛이 달라졌다고 하더라. 목표를 가지고 움직이고 생각하는 게 그렇지 않은 것보다 회복에 훨씬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말릴 수가 없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자전거 용품을 다 버리라고 했다던데.
사고 직후 자전거 탈 용기가 안났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당시 자전거 유튜버 중 내 채널이 구독자가 6만 명 정도로 제일 많았다. 내 영상을 보고 자전거 타는 걸 시작했다는 구독자가 많은데 내가 자전거 사고로 사라지면 구독자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 같았다. 내가 사랑해서 해온 일들이 부정당할 것 같고. 내가 다시 자전거를 탄다는 것만 보여줘도 구독자들에게 힘이 되고 조금 더 나은 마무리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동호회를 하면서 사이클 선수 생활이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어서 선수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의족 회사에서 지원해 준다고 해서 결심했다. 다른 환자들에게 거둔 수익으로 날 지원하는데 취미로 즐기는 데만 사용하기에는 부채감이 컸다. 지원을 받은 만큼 나를 최대한 알려서 절단 환자도 이렇게 잘 걷고 운동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면 보답하는 길이 될 것 같았다.
입원 중 자전거 탄 사진이 삶을 바꿨다고.
2023년 목표를 듀애슬론(달리기와 사이클을 번갈아가며 진행하는 철인2종 경기) 완주로 잡고 자전거를 구입했다. 사고 88일째 되는 날, 병원으로 배송이 와서 자전거에 올라탄 사진을 찍어 올렸다가 엄청난 화제가 됐다. 국가대표 감독님께 선수 제의도 받고 옷·자전거·의족 회사에서도 연락을 받았다. 출판사와 계약해 2024년 초에는 책도 냈다.
자전거용 의족은 없다고 하던데 어떻게 해결했나?
2023년 3월에 전북장애인사이클연맹 소속 선수로 등록하기 전 신인평가가 있었다. 자전거용 의족이 없어서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의족으로 참가했는데 페달의 회전수가 높아질수록 의족이 흘러내려 난감했다. 이후 의족 회사와 발모형을 제거하고 자전거 타는 데 유리하게끔 개조한 의족을 만들었다.
국가대표 선발은 어렵지 않았나?
장애인 사이클은 총 17개 카테고리가 있는데 국가대표는 11명밖에 뽑지 않는다. 각 카테고리에서 1등을 해도 세계무대에 설 만한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면 뽑지 않는다. 내 종목에는 이미 국가대표가 있었고 그분이 패럴림픽 메달리스트라 경쟁이 쉽지 않았다.
메시지도 많이 받는다고 하던데.
다리 절단 수술을 앞두거나 절단 이후 상태에 있는 분들이 메시지를 많이 보낸다. 다리를 절단하게 된 중학생의 부모가 내 블로그 글을 보고 용기를 얻었다는 글도 있었다. 당시는 나도 병상에 있을 때였는데 정말 멋진 어른으로 용기를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절단 환자들이 워낙 적다보니 정보 자체가 없다. 내가 의족을 더 노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의족을 하고도 이렇게 잘 걷는다는 걸 보면 희망을 얻을 수 있지 않겠나.
사이클 선수로서 그의 목표는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 패러게임과 2028 로스앤젤레스 패럴림픽에 출전해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최종 목표는 메달이 아니라고. 그는 한 시각장애인 유튜버가 올린 영상을 예로 들었다. 음료수 캔에 점자로 ‘음료’라고만 쓰여 있어서 콜라인지 주스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상황을 보여주는 영상이었는데 그 후 음료 회사들이 음료 이름을 점자로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처럼 “도전하는 과정에서 파생되는 일들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고 싶다”는 게 그의 최종 목표다.
고유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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