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외조부 이야기 첫 장편으로 탄생 “나를 키운 건 ‘한국인’이라는 자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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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최초 ‘톨스토이문학상’ 수상 재미동포 김주혜
10년 전 겨울, 김주혜 작가는 다니던 출판사를 그만두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한 해에만 총 열세 편의 단편을 쓰고 나서야 작가로 인정받았지만 경제적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다음 달 월세 걱정에 발을 동동 굴렀고 배가 고파 잠 못 이루는 날들이 이어졌다. 굶주림과 가난은 20대 젊은 작가의 삶을 관통하는 키워드였다.
답답한 마음에 한겨울 공원을 달리던 중 불쑥 하나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눈으로 소복하게 덮인 나무들 사이로 나타난 호랑이 한 마리, 그리고 그를 따라온 사냥꾼의 모습…. 수십 년 세월의 흐름과 등장인물의 군상이 별자리처럼 머릿속에 펼쳐졌다. 그 길로 집으로 뛰어가 단번에 스무 페이지 분량의 이야기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2021년 미국에서 출간 직후 ‘올해 최고의 책’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지금까지 전 세계 14개국에 번역 출간된 ‘작은 땅의 야수들(원제 Beasts of a Little Land)’은 그렇게 기적처럼 탄생했다.
“거짓말 같은 이야기지만 정말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떠오른 호랑이의 형상이 이 소설에 바친 6년이란 시간의 출발점이었죠.”
‘하늘은 하얗고 땅은 검었다’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600페이지 분량의 이 장대한 소설은 김 작가의 첫 장편이다. 1917년부터 1965년까지 20세기 한국사를 종횡무진하며 독립운동과 해방 이후 대한민국을 기생 ‘옥희’와 사냥꾼의 아들 ‘정호’를 비롯한 인물들의 얽히고설킨 관계를 통해 풀어냈다. 1987년생으로 아홉 살에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줄곧 그곳에서 살아온 작가의 출세작이라고 믿기 어려운 작품이다. 불현듯 평양과 제주를 넘나드는 한반도를 배경으로 소설을 쓰겠다고 생각한 건 한국인으로서 자부심 강한 가족 덕분에 가능했다고 한다.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김구 선생을 도와 독립운동을 한 외조부의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인생의 가장 힘든 시기에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상징인 호랑이를 떠올린 것은 작가로서의 운명에 가까웠다. 그는 유창한 한국말로 “나는 한국계 미국인 작가가 아닌 한국인 작가”라고 거듭 강조했다.
국내에선 2023년 출간된 ‘작은 땅의 야수들’은 여전히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다. 지난해 러시아 최고권위 문학상인 톨스토이문학상(야스나야 폴랴나상) 해외문학상을 수상하면서다. 한국계 작가가 이 상을 수상한 것은 처음인 데다 때마침 시상식이 열린 10월 11일은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이 발표되던 날이었다. 심사위원단으로부터 러시아의 대문호 안톤 체호프에 비견되는 평을 받은 김 작가는 “오늘은 한국문학에 있어 정말 대단한 날”이라며 “우리 문화와 역사의 긍지를 높일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같다”고 수상소감을 전했다. 상금은 한국범보전기금에 모두 기부했다.
지난 6월 신간 ‘밤새들의 도시’ 국내 출간 이후 거주 중인 영국으로 돌아간 김 작가를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광복 80주년을 맞는 특별 인터뷰 요청에 그는 흔쾌히 응했다. 한국인과 한국을 배경으로 한 여러 편의 소설을 집필 중이라고 했다.
미국에서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를 주제로 첫 장편을 출간한 건 무척 용감한(혹은 무모한) 결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반드시 이 주제여야만 했던 강력한 동기가 있었나?
나 역시 이 소설을 출간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졌다. 더욱이 미국 출판계에서 일을 해봤기 때문에 독자의 눈높이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겨울 공원에서 호랑이의 이미지를 떠올린 강력하고 신비로운 경험을 작품 세계로 끌어오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나중에야 알게 된 건 한국계 미국인 소설가가 대한독립을 주제로 책을 낸 게 재미 문학가 강용흘 선생의 1931년작 ‘초당(The Grass Roof)’ 이후 90년 만이라는 거다.
생의 대부분을 타국에서 살아온 작가가 반세기를 넘나드는 방대한 한국사를 배경으로 한국문학의 정취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이야기를 쓸 수 있었던 동력은 뭔가?
지난 몇 년간 한국에 올 때마다 “한국에 사는 사람보다 더 한국인 같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특히 말투가 30년 전 구식이라 타임머신을 타고 온 한국인으로 보이는 것 같다(웃음). 미국에서도 어린 시절부터 한국 소설과 시를 좋아했다. 특히 ‘아리랑’, ‘메밀꽃 필 무렵’, ‘운수 좋은 날’, ‘벙어리 삼룡이’는 내 안에서 창작의 톱니바퀴가 돌아가게 해준 작품들이다. 특히 소설 ‘운수 좋은 날’은 ‘작은 땅의 야수들’에서 극 중 영화제목으로 쓸 만큼 좋아한다.
30년 전 한국을 떠나왔음에도 한국인이라는 강력한 정체성을 품어온 데에는 어떤 배경이 자리하나?
부모님은 애국심이 무척 강하다. 공부나 성공에 대해선 한 번도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태도와 인격에 대해선 엄격하셨다. 그중엔 한국인으로 갖춰야 할 올바른 정신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또한 부모님은 수십 년간 이민생활을 하면서도 1년에 네 번씩 조상의 제사를 지냈다. 나의 정체성은 모국과 조부모님, 부모님이라는 깊은 뿌리에서 탄탄하고 안정적으로 자라났다.
인종차별을 감수하면서도 한국 이름을 계속 유지해왔고 한국어도 능숙하다. 타국에서 모국어를 잊지 않기 위해선 남다른 노력이 필요했겠다.
이름을 바꿔야 하나 압박감을 느낀 건 딱 두 번이다. 처음 이민을 갔을 때, 대학 졸업 후 취업을 준비할 때다. 많은 미국 회사에선 외국어 이름을 가진 지원자의 이력서는 들여다보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한국 이름을 바꾸지 않은 건 자부심 덕분이다. 내 이름 주혜(宙慧)는 ‘우주의 지혜’라는 뜻인데 어렸을 때부터 나의 큰 자랑이었다. 게다가 경주 김씨 시조는 천년 왕조 신라의 마지막 왕이지 않나! 그러니 저 귀한 이름을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영어 이름으로 바꾸고 싶지 않았다. 한글은 어머니가 오리건 한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덕분에 큰 노력없이도 유지할 수 있었다. 미국 전역엔 한글학교가 자그마치 1000곳이 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재미한국학교협의회 산하 각 지역협의회에서도 한국어와 한국사를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재외 한인사회의 눈물겨운 노력이다.
‘작은 땅의 야수들’엔 윤봉길·안중근 의사 등 실제 역사 속 인물을 떠올리게 하는 캐릭터들이 있다. 한국사를 공부하며 특별히 감명받은 인물이나 사건이 있나?
가장 인상 깊은 인물은 홍범도 장군이다. 호랑이 잡는 포수 출신으로 ‘날아다니는 호랑이’라는 별명을 가진 그는 한반도 북부와 블라디보스토크를 기반으로 일본군을 공포에 떨게 했다. 1937년 스탈린에 의해 강제이주당한 뒤 카자흐스탄에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는데 그 당시 기록을 보면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이 이끈 의병과 식솔들을 지켜냈다. 소설 속 포수 ‘남경수’는 그에게서 영감을 받아 만든 인물이다. 하지만 이렇게 한 분 한 분 이름을 다 거론하기 힘들 정도로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무명의 학생, 민초들이 큰 울림을 줬다. 20세기 제국주의하에서 침략을 받은 나라는 한둘이 아닌데 이처럼 온 국민이 거세게 저항한 경우는 대한민국이 유일할 것이다.
작품 속에선 평생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이 비극적 결말을 맞기도 하고 일제에 순응하며 신의를 저버린 인물이 안락한 여생을 살기도 한다. 소설 속에서나마 인물들에게 현실과 다른 엔딩을 안겨줄 충동은 없었나?
‘작은 땅의 야수들’은 고전적 사실주의를 기반으로 한 소설이다. 독자의 안락함을 위해 행복한 결말을 쓰려는 생각은 없었다. 독자에게 진정한 위안을 주는 건 허구로 인생의 어둠을 덧칠하는 게 아니라 진실 그대로를 보여주되 그런 어둠도 극복할 수 있는 인간의 양심도 함께 그리는 것이다. 현실의 안락을 위해 모두가 피하는 비극을 눈 뜨고 봐달라고 애원하는 것이 예술가의 책임이다.
작품은 한인 입양인, 이민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3·1운동 부분을 읽으며 울음바다가 됐다는 그들과, 누구보다 한국 독자들의 반응이 절실했다던 스스로에게 고국은 어떤 의미인가?
지금 생각하면 재미있는 일화인데 처음 한국에 책 홍보를 하러 왔을 때 늦은 밤 호텔 TV에서 방송 종료를 알리는 애국가를 듣고 왈칵 눈물을 쏟았다. 한 사람이 부모로부터 모든 걸 물려받아 자라나듯, 그리고 그 부모를 가장 사랑하듯 나는 한국 땅에서 태어나 형성됐고 한국을 가장 사랑한다. 입양인과 이민 2~3세 한인들도 개개인이 느끼는 바는 조금씩 다르겠지만 몸속에 흐르는 한국인으로서의 연대감은 꼭 닮아 있다.
스스로 ‘작은 땅의 야수들’은 “지금 한국사회에 꼭 필요한 책”이라고 말했는데.
한국은 다방면에서 세계적으로 뛰어나지만 두 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첫째는 자연환경 파괴, 둘째는 인문교육의 부재다. 특히 인문교육이 붕괴하면서 학생들의 창의성과 독립적 사고력이 크게 떨어졌다. 그중에서도 역사 교육은 국제 상호관계를 이해하고 한국인으로서의 자아를 형성하는 데 무척 중요하다. 그러니 한 세대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다면 그건 국가적으로 큰 손해다. 이 같은 맥락에서 내 작품을 통해 누군가 자신의 뿌리를 알고 역사를 바르게 이해한다면, 나아가 이를 통해 기후위기와 전쟁에 맞설 희망을 얻을 수 있다면 나에겐 더없이 큰 보람일 것이다.
미래의 한국 또는 한국 디아스포라를 다룬 작품도 구상 중인 걸로 안다.
올해 11월엔 미국과 영국에서 ‘세상 끝의 사랑 이야기(A Love Story from the End of the World)’가 동시 출간된다. 단편모음집으로 그중 몇 편이 한국인 혹은 한국계 미국인의 이야기다. 또한 미래 서울을 배경으로 한 첫 단편소설 ‘바이오돔(Biodome)’은 현재 영화로 제작 중이다. 2028년엔 장편 소설 ‘신곡(The Divine Comedy)’이 출간되는데 가장 자전적인 이야기다.
올해는 광복 80주년을 맞는 해다. 대한독립 운동의 대하소설을 쓴 작가로서 그 의미가 남다를 것 같다.
광복 80주년을 맞아 세계 곳곳에서 개최되는 행사에 초청을 받아 다녀왔다. 5월엔 UC버클리대학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원이 함께한 심포지엄이 있었고 6월엔 우즈베키스탄을 다녀왔다. 광복절엔 블라디보스토크 코리아 축제에 참여한다. 그곳에 가면 100년 전 찌는 듯한 폭염 속 복숭아 농장에서 일을 하면서도 늠름한 자세로 사진을 찍던 일꾼들, 갖은 고생을 해 번 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모두 보낸 이들, 그리고 광복절이면 어김없이 그런 이들의 무덤에 가 태극기를 꽂고 절을 올리는 추모단체 회원들을 만난다. 대한독립의 정신과 역사가 아직도 세계 곳곳에서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다. 평화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투신한 선조들의 희생을 고국에 계신 이들과 함께 추모하고 싶다.
조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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