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실 신발 짓던 ‘갖바치’ 가업 6대째 “우리가 아니면 맥이 끊기는데 어떡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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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무형유산 ‘화혜장’ 보유자 황해봉
“할아버지, 이건 어떻게 하는 거예요?”
1973년 군 복무를 막 마친 스물두 살 청년 황해봉은 잠든 할아버지를 깨워 가죽신 만드는 법을 물었다. 그의 할아버지 황한갑 옹은 10여 명의 화공(靴工)을 거느리고 고종 황제의 ‘적석(의례 때 신는 신발)’, ‘백혜(白鞋, 국상 때 신는 흰색 가죽신)’ 등을 짓던 조선왕실의 마지막 ‘화장(靴匠, 가죽신 장인)’이었다.
당시 구순을 바라보는 할아버지가 떠나면 이 기술은 역사 속으로 사라질 터, 마음이 바빴던 황해봉은 자는 할아버지를 깨우면서까지 전통 신 만드는 법을 배웠다. 그의 아버지 황등용도 늦은 나이에 일을 배웠으나 안타깝게 조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궁궐에 가죽신을 만들어 납품하던 황종수(1대) 장인에서 2대 황의섭, 3대 황한갑으로 대를 잇던 가업이 4대째인 아버지에서 끊길 위기에 처하자 그가 나선 것이었다. 당시에도 전통 신 제작은 돈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고무신과 구두에 밀려 가죽 전통 신을 찾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황해봉은 철종 때부터 이어온 가업이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없어 기꺼이 그 무게를 짊어지고 반세기 넘게 외길을 걸어왔다.
2004년에는 유일한 국가무형유산 ‘화혜장(靴鞋匠)’ 보유자가 됐다. 화혜장은 가죽을 재료로 삼아 장화를 만드는 화장과 목이 짧은 ‘혜’를 만드는 혜장을 통칭한다. 그가 할아버지에게 배운 건 돌쟁이 아이들이 신는 ‘아혜(兒鞋)’를 짓는 방법뿐이었지만 타고난 손재주와 노력으로 현재는 스무 가지가 넘는 조선시대 신발을 짓는 장인으로 거듭났다. 그 과정에서 그는 왕과 왕비가 신은 적석, 청석을 되살렸다. 문무백관이 관복에 신은 목화(木靴)도 그의 손끝에서 되살아났다.
그는 제작한 신을 들고 미국, 프랑스, 중국, 대만 등 해외로 나가 전통의 미를 알렸다. 지금은 6대째 가업을 잇겠다고 나선 아들 황덕성 씨에게 기술을 전수하고 있다. 전시도 자주 연다. 지난 5월에는 서울 성북구 삼청각에서 특별전 ‘발끝의 아름다움’을 개최했다. K-컬처가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으면서 ‘우리 것’이 재발견되는 시대, 우직하게 우리 신을 지켜온 그를 만나 ‘갖바치(가죽신을 만드는 이를 이르는 우리말)’의 삶에 대해 들어봤다.
전통 신을 찾는 이들이 많나?
1990년대 초반까지는 손님이 많았다. 대개 나보다 나이가 많은 분들이었는데 그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면서 찾는 이가 줄었다. 그때만 해도 아기 돌이나 결혼, 장례 때 신을 주문했지만 최근에는 이런 신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이들이 많지 않나. 요즘은 박물관에서 오래된 소장품을 복원해달라는 요청이나 돌잔치 때 아이에게 선물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주문이 많지 않다.
신발 한 켤레 짓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나?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하루 6시간 정도 일한다고 가정하면 한 켤레를 만드는 데 보통 3일 걸린다. 제일 손이 많이 가는 적석, 청석은 5일 정도 필요하다. 재료가 준비된 상황에서 순수하게 제작에만 70여 단계의 공정을 거치니 오랜 시간이 걸린다. 여기에 제작에 필요한 가죽이나 백비(여러 겹의 광목이나 모시, 종이 등을 덧붙여 두껍게 만든 것) 등을 준비하는 시간까지 더해지면 더 길어진다.
신을 지을 때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다.
생각은 무슨. 잡념이 들어가면 일을 그르칠 수 있다. 신을 지을 때 가장 중요한 연장이 칼, 가위, 송곳인데 딴생각을 하면 큰일 난다. 누군가는 “50년 넘게 했으니 눈감고도 할 수 있는 것 아니냐”라고 하는데 집중하지 않으면 위험하기도 하고 신이 제대로 나올 수 없다.
전통 신의 특징은 뭔가?
코가 올라간 버선을 신다보니 버선코가 닿는 부분이 곡선 모양이다. 곡선은 그 형태가 부드러우면서도 안정성이 있어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기에 맞춤이다. 다만 남자 신은 신발 코 부분이 다소 뭉뚝하다. 남자 버선이 여자 것보다 더 둥그스름한 모양으로 코가 다듬어져 있기 때문이다. 전통 신의 묘미는 코 모양에 있기에 이 부분에 가장 신중을 기한다. 서양 신과 달리 오른쪽, 왼쪽 구분도 없다. 신으면서 발 형태에 따라 모양이 잡힌다. 우리는 이를 ‘발집이 난다’고 표현한다.
만족스럽지 않은 작품은 버린다고?
도자기도 만들다 마음에 안 들면 깨버리지 않나. 이것도 마찬가지다. 더욱이 전통 신은 한 번 완성하면 특정 부분만 고칠 수가 없다. 복원 작업을 할 때도 여러 켤레를 만들어보면서 작품을 완성한다.
할아버지에게 아혜만 사사했다고?
지금도 비슷하지만 당시에도 아혜를 제외하면 찾는 이들이 많지 않았다. 다른 신을 제작하는 기술을 전수받진 못했지만 장인정신이나 기본기는 충분히 익혔다. 복원 작업을 해나가는 과정에선 복식사학자이자 민속학자인 고 석주선 박사님을 비롯한 많은 교수님께 자문을 얻었다.
구체적인 복원 방법이 궁금하다.
전통 신은 유물이라 실물을 찾기가 힘들다. 적석의 경우 1970년대 유명 구두브랜드 회사에 몸담은 신발 수집가가 가지고 있어 직접 보고 복원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쉽게도 찾을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청석은 이방자 여사, 순정효황후가 신은 것을 각각 국립고궁박물관, 세종대학교 박물관에서 보고 제작했다. 목화는 한 친구가 이북에서 구해온 책자 속에 고구려 벽화가 있어 그것을 보고 복원했다. 신 장식에 필요한 매듭이나 수는 전문 선생님들이 있어서 함께 연구했다. 신을 만드는 원리는 다 똑같기 때문에 외곽 형태를 보고 모양만 잡으면 복원이 가능하다.
힘든 가업을 선뜻 받은 이유가 궁금하다.
처음에는 본업으로 생각하고 배운 건 아니었다. 군 제대 후 직장생활도 했다. 근데 이 일을 배우려고 하는 사람이 없고 할아버지는 연로하고 가업을 이을 거라 믿은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니 내가 아니면 이 소중한 전통, 가업을 이을 사람이 없겠다 싶어 뛰어들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손님은 누구인가?
전 대통령 몇 분이 자녀가 결혼하거나 손주가 돌을 맞았을 때 신 제작을 요청했다. 재벌가 결혼식 때나 종교 지도자가 돌아가셨을 때도 신을 지었다. 영화나 드라마 쪽에서도 의뢰가 많았다.
1980년대가 호황이었다고?
그 당시 복고 바람이 불어 사람들이 옛것을 많이 찾았다. 아시안게임과 올림픽도 열렸고. 국제적인 큰 행사가 많다보니 주문도 많았다. 근데 한 달 꼬박 만들어도 10개 정도밖에 제작을 못해서 몇 년 동안 주문을 쌓아놓고 만들었다.
간단한 공정은 직원을 고용해서 만들 수도 있지 않나?
더 많이 벌자고 남의 손을 빌릴 순 없었다. 그래도 아내가 옆에서 많이 거들어줬다.
정부 요청으로 해외 전시도 했다.
프랑스 파리 국제박람회가 기억에 많이 남는다. 정부 요청으로 두 번 정도 참석했는데 외국인들의 반응이 정말 좋았다. “뷰티풀(아름답다)!” 찬사를 받으니 뿌듯했다. 한국의 미를 대표해 알린 기분이었다.
전통 신에 현대적인 느낌을 더하면 더 많은 이들이 찾지 않을까?
TV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그런 신발들이 나온다. 그런 것들은 이미 만드는 사람들이 있지 않나. 나 혼자서라도 전통을 고수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가업을 이어받아 화혜장 이수자로 활동 중인 아들은 나중에 어떻게 할지 모르겠지만(웃음).
아들이 전통 신 제작에 뛰어든다고 했을 때 반대하진 않았나?
아들도 직장생활을 하다가 그만두고 2013년부터 이 기술을 배우고 있다. 본인이 하겠다는데 반대할 수 있나. 아들은 서울 송파구에 작업장을 두고 신을 짓고 있다. 신을 다 만들고 나서 틀을 잡는 도구인 ‘신골’ 등 조부님께 물려받은 것들을 아들에게 물려줬다. 나무 신골 대신 3D프린터로도 신골을 제작해본 적이 있는데 원래 것만 못했다. 옛것만이 가질 수 있는 정취가 안나오더라.
시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는 가치가 있다면.
신념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는 국가무형유산 보유자로 인정받을 거라고 생각지 못했다. 그저 전통 신의 명맥이 끊기지 않게 가업을 이어가는 것만 생각했는데 지금은 손주들까지 관심을 보인다. 선택이 틀리진 않았던 모양이다.
황 선생의 아들 덕성 씨는 2016년 국가유산청으로부터 화혜장 이수자로 지정됐다. 덕성 씨는 아버지처럼 그 역시 자신이 아니면 전통 신발의 맥과 함께 가업이 끊어진다는 생각에 이 일에 뛰어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신을 짓는 일에 더해 전통 신 만들기 체험 프로그램을 만들어 더 많은 이에게 전통 신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알리는 일을 함께하고 있다.
오늘도 세상의 속도와는 다른, 한 땀 한 땀 시간을 꿰어가는 부자의 손끝에서 전통 신의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고유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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