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줌 독자 보며 15년 협업 결실 “수상 소식 스팸인 줄 만화도 문학으로 인정받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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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기메 아시아문학상 만화 부문 수상 이동은 작가
“당연히 스팸메일인 줄 알았다. 우리에게 이런 일이 생길 줄 누가 알았겠나.”
이동은 작가는 지난 4월 한 통의 이메일을 받고 마냥 어리둥절했다고 말했다. 발신처는 프랑스. 그가 정이용 작가와 함께 쓴 ‘하나의 경우’가 제8회 에밀 기메 아시아문학상(이하 기메 문학상) 만화 부문 수상작으로 선정됐음을 알리는 메일이었다. 6월에 있을 시상식까지 비밀을 유지해달라는 당부는 의심을 더욱 키웠다.
기메 문학상은 프랑스 기메박물관(국립기메동양박물관)이 수여하는 것으로 매년 프랑스어로 출간된 현대 아시아 문학 작품을 대상으로 한다.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가 2024년 소설 부문에 선정되면서 국내 독자들에게도 낯설지 않다. 만화 부문은 지난해 신설됐고 2023년작인 ‘하나의 경우’는 프랑스판이 이듬해 11월 출간되면서 이름을 올렸다. 이 작가는 “국내에서도 고작 한 줌밖에 되지 않는 독자를 가진 출판만화로 국제상을 수상한 게 믿기지 않았다”면서 “믿을 수가 없어 한동안 제대로 기뻐하지도 못했다”며 웃었다.
‘하나의 경우’는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며 위태로운 결혼생활을 하는 ‘하나’와 지방으로 발령받은 기간제 교사 ‘경우’가 이웃이 되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영화감독이기도 한 이 작가가 시나리오를 쓰고 그것을 정 작가가 그림으로 풀어냈다. 두 사람은 이 같은 작업 방식으로 2012년부터 지금까지 총 8편의 작품을 선보였다. 모두 웹툰 연재가 아닌 단행본 출간이었다. 그중 2013년작 ‘환절기’와 2020년작 ‘진, 진’은 이전에도 프랑스에서 번역·출간된 바 있다. 기메 문학상 주최 측은 두 작가의 작품을 두고 “사회적 시각, 심리적 사실성, 이미지의 시적 아름다움이 마음을 뒤흔든다”고 호평했다. 이 작가는 “한 줄의 리뷰조차 기대하기 어려운 국내 출판만화계와 달리 프랑스에선 만화를 문학과 동등하게 바라보고 평가해 주는 것이 무척 기쁘고 감사하다”고 말했다.
문학상 시상식에 만화 부문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프랑스, 미국 등 서구권에선 만화도 하나의 문학 장르로 본다. 만화 부문이 아닌 일반 문학상 부문에 만화가 후보로 오른 적도 있다.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도 비슷한 사례 아닐까. 특히 우리 작품은 인물의 내레이션이 거의 없고 감정표현이 극도로 절제된 탓에 국내에선 ‘만화같지 않다’는 말을 수없이 들었는데 현지에선 외려 전통적이라는 평을 받았다. 우리나라에선 만화라고 하면 현실과 달리 과장된 표현이나 상황, 캐릭터 등을 떠올리지 않나. 반면 프랑스에선 만화도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작품이 좋은 평가를 받는다. 현지 평론가들이 우리 작품을 두고 한국 사회와 여성, 계급 문제까지 분석하는 걸 보며 감사했다.
출판만화는 웹툰과는 어떻게 다른가? 특별히 단행본 출간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나?
처음엔 독자들이 우리의 이야기를 완결된 서사로 접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수개월, 수년에 걸쳐 연재하는 만화의 경우 흐름이 끊길 수밖에 없다. 한 회가 끝날 때마다 긴장감을 부여해 독자의 관심을 붙잡아둬야 하는 것도 우리 작품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출판만화의 장점은 독자가 작품에 더 오래 머물 수 있다는 점이다. 휴대폰으로 만화를 볼 땐 손가락으로 그림을 슥슥 넘기게 되는 것과 달리 책을 볼 땐 여러 그림이 한 페이지 안에 펼쳐지니 좀 더 시선을 오래 두게 된다. 그러다 보면 독자의 생각이나 상상력이 개입할 여지가 많아진다. 창작자 입장에선 레이아웃을 더 다양하게 할 수 있으니 과거·현재·미래를 동시에 보여주는 등 연출의 여지도 넓다. 다만 출판만화만 고집하는 건 아니다. 워낙 시장이 작기 때문에 추후엔 웹툰처럼 온라인에 연재할 필요도 있다고 본다.
‘하나의 경우’는 요즘엔 좀체 찾아보기 힘든 성인멜로를 표방한다. 이 작가는 “사랑을 믿지 않는 시대, 그럴수록 제대로 사랑을 이야기해보자 싶었다”고 털어놨다. 오랫동안 가족과 여성을 이야기의 중심축으로 삼아온 두 작가에게도 새로운 시도였다. 기메 문학상 수상은 모두가 “멜로의 시대는 끝났다”고 이야기하던 순간에 도착한 반전의 축전이었다.
문학계에서도 정통멜로는 오랜만의 등장이라고.
문학, 드라마, 영화 할 것 없이 정통멜로 장르가 사라지고 있다. 인구구조 변화와 저성장 등으로 인한 연애시장의 침체, 문화계 예산 부족 등의 이유일 것이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사람들이 낭만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게 한다. 그렇다고 ‘사랑이 모든 걸 해결해줄 거야’ 하는 철없는 생각으로 작품을 쓴 건 아니다. ‘우리는 왜 홀로 존재하지 못하고 늘 관계를 갈구할까’ 하는 의문이 출발점이었다. “멜로는 안 된다”는 주변의 우려가 큰 탓에 2012년에 쓴 작품을 10년이 넘어서야 출간했다.
유부녀와 이웃집 남자라는 관계 설정도 자칫 치정으로 읽힐 수 있는 요소인데.
작품 속에 “사는 게 너무 지긋지긋해서 다 포기하는 순간 삶이 예쁜 거 하나 내미는 거야”라는 대사가 있다. 각자가 힘겨운 삶을 사는 하나와 경우에게 서로는 그런 존재다. 세상에 완벽한 사랑이 어디 있겠나. 사랑은 내 안의 이기심, 동정심, 편견과 싸우는 과정이라는 걸 두 주인공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 인물의 배경보단 하나가 누군가를 죽도록 미워하고 다시 사랑하다 결국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에 집중해 썼다.
가정폭력을 소재로 삼은 것에도 특별한 이유가 있나?
작품에서도 언급했지만 가정폭력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문제다. 너무 일상화돼 오히려 보도가 안 되는 거다. 다만 시나리오를 쓰던 시기가 국내에서 페미니즘 이슈가 크게 부각되던 때라 매 맞는 여성의 이야기를 하는 게 시대를 역행하는 게 아닌가 싶어 걱정했다. 그때 한 여성 작가가 “여전히 소외받는 여성들이 있고 그들의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걸 보면서 용기를 얻어 계속 쓸 수 있었다.
한물간 장르, 무겁고 위험한 소재. 모두가 안 된다고 말할 때 “그래도 해보자”며 손을 내밀어준 건 파트너 정 작가였다. 그렇게 컴퓨터 속에 깊이 잠들어 있던 ‘하나의 경우’는 11년 만에 조심스레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영화인이던 이 작가가 펜을 들게 된 데도 정 작가의 역할이 컸다. 어느 날 이 작가의 영화 시나리오를 들춰보던 정 작가의 한마디가 결정타가 됐다. “이거 만화로 그리면 재밌겠는데?” 정보통신(IT) 회사의 그래픽 디자이너였던 정 작가가 그때까지 제대로 만화를 그려본 적이 없다는 건 또 다른 반전이다.
그렇게 스스로가 작가라는 자각도 없는 채로 함께 만화계에 뛰어들었다. 총 8편의 공동작 가운데 ‘환절기’, ‘당신의 부탁’, ‘니나내나’ 등 세 편은 영화로도 제작됐다. 영화 시나리오가 만화로, 만화가 다시 영화로 거듭나는 예술의 확장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던 두 사람이 13년간 빚어낸 세월의 합작이다. 다만 극도의 내향형인 정 작가를 대신해 대부분의 대외 활동은 이 작가가 나서고 있다.
내가 쓴 이야기가 만화라는 시각 이미지로 살아나는 것을 보는 기쁨이 있겠다.
정 작가는 낯이 간지러워 자기 작품도 못 본다(미소). 반면 난 내 책을 보다 잠드는 것이 일상의 큰 기쁨이다. 더욱이 출판만화는 언제든 책장에서 툭 꺼내 가볍게 볼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볼 때마다 새로운 재미를 발견한다. 창작자로선 영화도 만화도 누군가와 함께하는 작업이라 좋다. 내향인인 내게 협업은 사회적 배터리를 충전하는 시간이다.
두 사람이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갈등은 없나?
의견이 안 맞는 경우는 너무 많다. 그런데 나와 다른 의견은 정말 소중하다. 글을 쓰면 나만의 세계에 빠지기 쉬운데 그때마다 정 작가가 나를 번쩍 끌어올려준다. 내가 쓴 시나리오 가운데 어떤 것을 만화로 만들지도 온전히 정 작가의 선택에 맡긴다. 인물의 감정이나 스토리 전개에 관한 의견은 충분히 받아들이고 수정한다. 두 사람 모두 영화도 문학도 그림도 제대로 공부한 적 없는 비전공자인 탓에 10년이 넘게 만화를 만들면서도 잘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져본 적은 없다. 그럼에도 계속 해나갈 수 있는 건 함께하기 때문이 아닐까.
홀로 참석한 시상식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정이용 작가는 해가 들지 않는 작은 방에서 하루치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며 어려운 현실을 토로하기도 했다.
수상소감은 비유적 표현이 아닌 진짜 사실을 말한 거다. 출판만화는 시집보다도 초판 발행 수가 적다. 만화책을 낸다는 건 경제적으로 적자를 감수해야만 하는 일이다. 만화가 여전히 문학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은 현실을 더욱 어렵게 한다. 공공도서관에 우리 책을 넣어달라고 신청하면 ‘만화라서 안 된다’는 답이 돌아온다고 한다. 만화에 대한 인식 개선과 더불어 다양성만화 제작지원사업과 같은 현실적인 지원 확대가 필요하다.
큰 보상 없이도 10년 넘게 비주류계 창작을 해온 힘은 어디서 나오나?
앞서 말했듯 어릴 때부터 워낙 만화를 좋아했다. 이렇게 재밌는 출판만화의 매력을 많은 사람이 알면 좋겠다는 생각이 계속 쓰게 한다. 많은 자본과 인력이 투입되는 영화와 달리 만화는 어쨌든 우리 두 사람이 손에서 놓지만 않으면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
이 작가는 수상 이후에도 달라진 것은 없다고 했다. 한 줌밖에 되지 않는 독자를 가진 출판만화 시장에서 그래도 이 일을 조금 더 해봐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냐는 기자의 되물음에 살짝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그럼에도 작은 바람은 있다. 읽는 이들이 책장을 덮은 뒤에도 이야기를 되감기하며 자신만의 의미를 찾아나가는 것. ‘하나의 경우’는 화려한 서사나 복잡한 플롯으로 독자를 현혹하는 대신 절제된 대사와 그림을 통해 오랫동안 질문에 머무르게 한다. ‘당신의 경우’는 어떠하냐고. 이 작가는 오늘도 어두운 방 안에서 자신의 파트너와 사랑과 관계의 물음표를 품은 채 함께 쓰고 그린다.
조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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