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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자락에 웬 구름 도넛? 건축이 시장을 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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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해방촌 신흥시장 클라우드(CLOUD)
“빈 도시락마저 들지 않은 손이 홀가분해 좋긴 하였지만, 해방촌 고개를 추어오르기에는 뱃속이 너무 허전했다. 산비탈을 도려내고 무질서하게 주워 붙인 판잣집들이었다… 레이션 곽을 뜯어 덮은 처마가 어깨를 스칠 만치 비좁은 골목이었다. 부엌에서는 아무데나 마구 버린 뜨물이, 미끄러운 길에는 구공탄 재가 군데군데 헌데 더뎅이 모양 깔렸다.”
6·25전쟁 직후 혼란상을 다룬 이범선의 소설 ‘오발탄’에 등장하는 해방촌 풍경이다.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현실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인간군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이 소설에서 해방촌은 동네 이름과는 달리 절망과 궁핍으로부터 전혀 해방되지 못한 역설적 공간으로 등장한다.
서울 남산 아래 위치한 해방촌은 광복 후 해외에서 돌아온 사람들과 북에서 월남한 이들, 6·25전쟁 피란민이 모여들어 형성된 달동네였다. 질곡의 한국 근현대사를 품은 이곳이 요즘 젊은 세대에겐 이국적이고 개성 있는 가게가 가득한 핫플레이스로 통한다. 이 변신의 중심 역할을 한 곳이 몇 해 전 ‘클라우드(CLOUD)’라는 건축 프로젝트로 재탄생한 해방촌 신흥시장이다.





신흥시장의 변신
남산서울타워가 보이는 해방촌의 좁은 비탈길을 따라가다 보면 ‘신흥시장’이라는 간판이 등장한다. 그냥 지나치기 십상일 정도로 겉은 허름하지만 입구로 들어서면 반전이 펼쳐진다. 나뭇가지처럼 뻗어 있는 12~15m 높이의 희고 가는 기둥 수십 개가 독특한 풍경을 자아내 탄성이 절로 인다. 이 기둥들이 투명한 비닐로 된 캐노피(덮개)를 받치고 있다. 투명한 천장을 통해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 풍경이 고스란히 보인다.
옛 시장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고리(loop) 형태 아케이드를 따라 감성 가득한 카페와 와인바, 레스토랑 수십 개가 옹기종기 어깨를 맞대고 있다. 아늑한 가게마다 젊은이들과 외국 관광객들이 넘쳐나고 인증샷 찍느라 바쁘다. 마치 유럽이나 홍콩의 뒷골목에 온 것 같다.
지금은 ‘뉴욕타임스’ 등 외신에서 앞다퉈 서울의 숨은 보석으로 소개할 정도로 관광명소가 됐지만 10여 년 전만 해도 신흥시장은 존폐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1970~80년대 소규모 니트 공장과 생필품 상점들이 성업하며 활기 넘치던 이곳은 1990년대 들어 대형마트가 생기면서 급속하게 쇠락했다. 2010년대 중반, 서울시가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리모델링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시장의 변신이 시작됐다.
죽어가던 시장을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건축 명소로 탈바꿈시킨 주인공은 건축가 위진복(유아이에이 건축사사무소 대표), 홍석규(큐엔파트너스 건축사사무소 대표)다. 영국 건축학교 AA스쿨에서 함께 공부한 두 사람은 2017년 서울시의 ‘신흥시장 아케이드 공모전’에 당선돼 프로젝트를 맡게 됐다.



투명한 비닐 지붕·휜 기둥의 비밀
“처음 와보니 통로는 좁고 석면 슬레이트가 아케이드를 덮고 있어 어둡고 환기가 제대로 안 됐어요. 좁은 길에서 기둥이 차지하는 면적을 최소화하면서 채광과 환기가 잘되는 아케이드 덮개를 만드는 것이 관건이었어요.” 최근 신흥시장에서 만난 위진복 소장이 프로젝트의 시작을 설명했다.
캐노피를 받치는 기둥이 차지하는 면적을 최소화하려면 덮개의 무게가 가벼워야 했다. 그래서 찾아낸 해법이 에어쿠션처럼 투명한 비닐 막 두 겹 사이에 공기를 주입하는 공기충전방식 ETFE(에틸렌-테트라플루오로에틸렌) 막 구조였다. 옥상 위로 막 구조를 들어올려 비도 막으면서 환기가 잘되게 했다. 기둥은 치밀한 구조 계산을 통해 지름 16.5㎝의 스틸 파이프 기둥을 썼다. 4개 기둥이 한 세트를 이뤄 총 12 세트(48개)로 구성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천장 덮개의 면적은 총 678.8㎡, 기둥 48개가 지면에 닿아 있는 총면적은 1㎡다. 명함을 샤프심이 받치고 있는 것과 비슷한 비율이라고 한다. 공기를 활용해 덮개 무게를 가볍게 한 만큼 기둥이 지면을 차지하는 점유 비율이 적어진 것이다.
나뭇가지처럼 휘어진 기둥 형태는 일부러 튀려고 만든 디자인이 아니다. 기둥이 가게 문 앞을 가로막지 않도록 해달라는 상인들의 민원을 반영해 건물 사이 맞벽 위치를 따라 기둥을 배치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휜 형태가 됐다고 한다. 이렇듯 ‘투명한 비닐 지붕’과 ‘나뭇가지형 기둥’이라는 신흥시장의 두드러진 디자인 특징은 구조, 공기, 바람 등을 철저히 계산해 엔지니어링한 결과물이다. 이 같은 혁신성과 지역 사회 기여도를 인정받아 ‘클라우드’는 2024년 서울시 건축상 대상을 수상했다.



건축가의 집념으로 완성된 프로젝트
신흥시장은 특이하게 고리 모양의 동선을 지니고 있다. 재생 프로젝트를 통해 탈바꿈한 전통시장들이 대부분 직선 통로 위에 캐노피를 덮은 형태인 것과 대비된다. 생의 터전을 잃은 피란민들이 먹고살기 위해 가게를 따닥따닥 붙여 짓다 보니 자연스럽게 원형의 골목이 생겼는데 이 형태를 그대로 뒀다. 위에서 신흥시장을 내려다보면 롤러코스터 철골 구조 위에 가운데가 뚫린 투명 구름이 얹혀져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동그란 UFO 같기도 하다. ‘클라우드’라는 이름에는 ‘구름처럼 떠 있는 형태’라는 의미와 함께 ‘단순한 지붕이 아니라 소통하는 플랫폼’이라는 뜻도 담겨 있다.
프로젝트가 완성되기까지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전쟁 직후 열악한 환경에 마구잡이 건물들이 들어선 터라 제대로 된 기초 도면이 없었다. 건축가들은 땅을 파내면서 기초 도면을 다시 그려야 했다. 설계에만 2년 가까이 걸렸고 공사엔 3~4년이 걸렸다. 주민 토론회도 20여 회 거치면서 의견을 수렴해 디자인 변경도 수차례 했다. 그사이 서울시 담당 공무원이 예닐곱 번 바뀌었다.
“건축 공부할 때 끝까지 하는 게 디자인이라고 배웠습니다. 중간에 프로젝트가 엎어질 고비가 수없이 있었지만 끝이 보일 때까지 하자고 다짐 또 다짐했습니다. 요즘 여기 카페, 레스토랑 사장님들이 장사가 잘돼 좋아하시는 걸 보면 뿌듯합니다. 공공 프로젝트는 빨리빨리 하는 것보다 시간이 들더라도 주민과 함께 한 단계 한 단계 밟아가는 게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지요.”
건축가의 집념이 있었기에 죽어가던 시장이 이름처럼 새롭게(新) 흥(興)이 넘치는 시장으로 재탄생할 수 있었다. 해방촌에서 쓰인 뜻깊은 해방일기다.

김미리 문화칼럼니스트
새 밀레니엄의 시작과 함께 신문사 문턱을 가까스로 넘은 26년 차 언론인. 문화부 기자로 미술·디자인·건축 분야 취재를 오래 했고 지금은 신문사에서 전시기획을 한다.



[자료제공 :icon_logo.gif(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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