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들에게 사치를 許하라 가체에서 족두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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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에게 갓이 있다면 여자에게는 족두리가 있다. 갓과 족두리는 조선시대 남녀의 대표적인 머리장식품이다. 풍습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1930년대에 한국에 왔던 프랑스화가 폴 자쿨레의 작품을 보면 머리에 족두리를 쓴 신부의 모습이 등장한다. 198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족두리를 쓴 신부의 모습은 전통혼례식장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족두리는 화관(花冠)이라고도 부르는데 화관이 족두리에 비해 좀 더 화려하고 장식적이다. 둘 다 머리에 쓰는 장식품이지만 모자라고 부르기에는 왠지 어색하다. 그래서 예전에는 머리에 쓰는 물건을 통틀어 쓰개라고 불렀다. 쓰개의 역사는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할 정도로 오래됐다. 사람의 시선이 가장 먼저 닿는 곳이 얼굴이니 얼굴과 머리를 꾸미고 가꾸는 것은 동서양 공통이다. 쓰개는 머리카락을 정돈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기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장식성이 가미되고 신분을 드러내는 표식으로 진화했다.
화관은 일정한 형식이 정해져 있지 않다. 그러나 족두리는 겉감을 검은색 비단으로 감싸는 것이 특징이다. 서양과 달리 동양에서는 검은색이 길색(吉色)이고 흰색이 흉색(凶色)이다. 국상을 당했을 때 남자들은 흰갓(白笠)을 쓰고 여자들은 흰 족두리를 썼다. 지금 우리가 검은색 상복을 입는 것은 서양식 문화를 따른 것이다. 궁중에서는 족두리의 겉감을 검은색 대신 홍색이나 자주색을 쓰는 사례도 있었다. 홍색이나 자주색 역시 길색으로 악귀를 쫓아주거나 예방한다고 믿었다. 이런 믿음은 족두리나 화관에 장식한 학, 나비, 물고기, 박쥐 등의 동물과 국화, 모란, 복숭아, 석류 등의 식물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모두 다 장수를 기원하거나 부부금슬, 부귀영화, 자손번창의 의미가 담긴 상징물이다. 지금은 신부 머리를 장식하는 족두리의 자리를 티아라가 차지했지만 족두리 안에 담긴 축원의 의미까지는 대체하지 못한다.
족두리가 조선 여인들의 대표적인 혼례용품이 된 데는 웃지 못할 사연이 있다. 영조 때 경제력이 향상되면서 ‘말세의 사치풍조’가 만연했다. 사치풍조의 대표적인 사례가 여인들의 다리(가발)였다. 그까짓 가발 하나가 무슨 사회문제가 될까 싶지만 모르는 말씀이다. 영조는 백성들이 혼례 때 다리를 사기 위해 가산을 탕진하는 지경에 이르자 가체금지령을 내렸다. 대신 예전부터 사용하던 족두리와 화관을 쓰도록 했다. 무턱대고 가체를 금지하면 여인들의 반발이 심할 테니 한쪽으로 물꼬를 터준 셈이다.
그렇다면 영조의 가체금지령은 성공했을까? 100% 실패였다. 법령을 시행한 지 7~8년 만에 사람들은 다시 가체를 올리기 시작했다. 당시 비변사에서 왕에게 올린 ‘가체신금절목(加?申禁節目)’을 보면 ‘그 유폐는 점차 사치를 숭상하는 고질병을 낳아 무턱대고 서로 흉내를 내므로 마침내는 그 값이 높이 뛰어올라 심지어는 부자조차 가산을 탕진하고 가난한 자는 혹 혼사를 치르지 못하기도 한다’고 탄식을 했다. 시행 당시보다 오히려 더 심해진 것이다.
정조시대 때 활동했던 신윤복의 ‘미인도’를 보면 여전히 가체를 하고 있다. 아름다워지려는 여인들의 욕망은 법으로 누른다고 해서 사라질 수 없다. 부자들조차 가산을 탕진하게 만든 가체의 착용은 19세기가 돼 쪽머리가 대세를 이루면서 사라졌고 족두리 역시 혼례식 때 사용하는 용도로 바뀌었다. 문화의 흐름은 시장에 맡기면 저절로 길을 찾아서 흘러가는 법이다.
근검절약은 좋다. 그러나 사치도 다 먹고살 만하니까 부리는 법이다. 만약 영정조 때 무조건 근검절약을 강요하는 대신 마음껏 사치를 누리게 허용했더라면 우리 공예사는 얼마나 화려하게 발전했을까. 아마 지금쯤 세계를 주름잡는 명품들이 한국에서 세계로 팔려나가고 있을지 모른다.
조정육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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