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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이 만들어낸 보물 분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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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고 느낄 때가 있다. 누군가는 그 끝을 시작점으로 새롭게 나아가기도 한다. 사람뿐만 아니라 작품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분청사기상감연화수금문매병’이 대표적이다.
이 작품은 이름이 다소 긴데 풀어보면 ‘분청사기’에 ‘상감’으로 ‘연꽃과 학과 물고기를 새겨넣은 매병’이란 뜻이다. 매병(梅甁)은 술이나 물 등을 담는 도자기 그릇으로, 또 매화 등의 꽃을 꽂는 화병으로 자주 쓰여 붙여진 이름이다. 고려청자와 조선 초기의 분청사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도자기는 청자(고려)→분청사기(고려 말 조선 초)→백자(조선) 순으로 발달했다. 분청사기는 청자의 유산을 물려받아 탄생했고 백자는 분청사기에서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영향은 영향일 뿐 분청사기는 청자와 분명 다르고 백자 또한 분청사기와 다르다.



‘분청사기상감연화수금문매병(이하 분청)’과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이하 청자)’을 보면 그 유사성과 차이점을 알 수 있다. 둘 다 입이 좁고 어깨가 넓으며 몸이 길쭉한 형태의 그릇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릇의 표면을 상감(象嵌·겉면에 무늬를 새기고 거기에 다른 흙을 넣어 장식하는 기법)한 방법도 공통적이다. 그런데 두 작품에서 받는 느낌은 완전히 다르다.
분청의 색깔이 회흑색인 데 반해 청자의 색깔은 비취색(翡色)이다. 형태 또한 분청의 몸체가 청자보다 더 둥글둥글하다. 차이점은 문양에서도 드러난다. 청자에는 필요한 부분에만 학과 구름을 정교하게 새겨넣고 나머지는 빈 공간으로 남겨둔 데 반해 분청에는 연꽃과 물고기를 큼직하고 대담하게 새겨넣었다. 그 결과 청자에서는 서민들이 가까이할 수 없는 고급스러움이 느껴진다면 분청에서는 일상생활에서도 흔히 쓸 수 있을 것 같은 친근함이 느껴진다.
1350년경 청자가마가 있던 강진, 부안 등에는 왜구가 자주 출몰해 노략질을 일삼았다. 그 피해가 얼마나 심했던지 나라에서는 바닷가에서 50리 이내의 백성들을 내륙으로 이주시켰다. 도공들은 자신들의 일터를 떠나 전국 각지로 흩어졌다. 그들은 새로운 정착지에서 화전을 일구며 새롭게 도자기를 만들 결심을 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청자를 만들 수 있는 좋은 흙(胎土)이 없었다. 청자의 생명이었던 맑은 청색 대신 회흑색을 띤 거친 표면의 도자기가 만들어졌다. 여기가 도공들이 도착한 막다른 골목이었다.
그러나 도공들은 흙이 갖는 한계를 백토로 그릇 전체에 분장하는 방식으로 극복했다. 분청사기(粉靑沙器)는 분장회청사기(粉裝灰靑沙器)의 준말이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 ‘회흑색 흙(회청)에 백토로 마무리한(분장) 사기’라는 뜻이다. 작은 무늬를 도장 찍듯 찍고 그 안에 백토를 메운 상감분청, 백토를 칠한 후 양각이나 음각으로 무늬를 새겨넣는 박지분청과 조화분청, 백토로 분장한 후 석간주로 그림을 그려넣는 철화분청, 귀얄(붓)로 힘 있고 빠르게 물감자국이 남게 한 귀얄분청, 손으로 굽을 잡고 백토물에 ‘덤벙’ 담갔다 꺼낸 덤벙분청 등이 모두 청자가 될 수 없는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문양 또한 거칠거칠한 표면에 어울리도록 활달하고 대담하게 새겨넣었다.
필자가 40여 년의 세월을 ‘K-명품’에 빠져 살았던 이유는 단지 그 미적인 아름다움에 취해서만은 아니다. 분청사기를 만든 도공처럼 도자기의 생명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바닥을 딛고 일어나 새로운 세계로 향한 문을 밀고 나간 용기를 봤기 때문이다. 요즘은 시도 때도 없이 자주 막다른 골목에 서 있을 때가 많다. 분청사기를 감상해야 할 시간이다.

조정육 미술평론가


[자료제공 :icon_logo.gif(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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