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나라 젊은이가 피 흘리며 자유 지켰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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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70주년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16개국이 전투부대를, 6개국이 의료지원단을 파병했다. 1129일 간의 전쟁에서 유엔군은 4만 670명이 전사, 10만 4280명이 다쳤고 4116명은 실종, 5815명은 포로가 됐다.
고마운 나라, 고마운 사람들④
태국·필리핀·콜롬비아·남아프리카공화국·에티오피아
태국
쌀부터 시작해 전투 병력에 의료지원단 지원
육·해·공군 6326명 파병
(전사 129명, 부상 1139명, 실종 5명)
태국은 6·25전쟁이 일어난 지 5일 뒤인 1950년 6월 30일 쌀 4만 톤을 우리나라에 제공하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의 한국 지원 결의에 지지를 보냈다. 태국은 지상군 1개 대대(1000명), 해군 군함, 공군 수송기를 파견했다. 아시아 국가 중 유일하게 육·해·공군을 모두 파병했다. 전투부대를 파병한 16개국 중 육·해·공군을 모두 파병한 나라는 미국·호주·캐나다·태국뿐이다. 여기에 의료지원단까지 파견해 후방 지역에서 유엔군 부상자를 돌봤다. 태국군은 그 용맹함 덕분에 ‘작은 호랑이(The Little Tigers)’라는 별칭을 얻었다. 태국 사람의 체구가 서양인보다는 작지만 용맹하다는 의미에서 비롯됐다.
1950년 11월 7일 한국 땅을 밟은 태국군은 1952년 11월에 치른 포크찹고지(Porkchop Hill)전투에서 실력을 발휘했다. 태국군은 1952년 10월 22일 미 2사단장에게 포크찹고지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고 진지를 점령했다. 열흘 뒤인 11월 1일 중공군은 포크찹고지를 빼앗기 위해 병력을 투입했다. 태국군은 백병전을 벌이며 세 차례의 공격을 막아내고 끝내 고지를 지켜냈다. 중공군의 공격이 끝나면 태국군은 쉬지 않고 곧장 진지를 보강하며 이어질 공격에 대비했다. 태국군의 활약은 정전협정 하루 전날인 1953년 7월 26일까지 계속됐다.
태국한국전참전용사회 회장을 지낸 차웽 용차른 씨는 포크찹고지전투를 회상하며 “당시 후방에 있던 대대장이 최전선의 병사들에게 무전기로 ‘짜이 옌 옌(진정하라), 마이 떵 끌루어(무서워하지 마라)’를 반복했다. 태국군의 용맹과 미군 포병 72문의 화력 지원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태국 공군은 전선에 보급품을 나르고 환자를 후송하느라 바빴다. 태국은 육·해·공 전투부대뿐만 아니라 공군의무대, 적십자의무대, 야전병원 실무교육 요원 등도 파견해 후방에서 의료지원을 했다. 태국 의사·간호사로 이뤄진 적십자의무대는 태국 장병들만 진료하도록 계획돼 있었지만 국적에 관계 없이 모든 유엔군 장병을 치료했다.
필리핀
라모스 전 대통령도 6·25전쟁 참전
육군 7420명 파병
(전사 112명, 부상 229명, 실종 16명, 포로 41명)
필리핀은 미국, 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지상군을 한국에 파병했다. 당시 필리핀은 공산 반군과 내전을 벌이고 있었다. 정세가 불안했지만 유엔이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결의하자 필리핀도 동참했다. 필리핀 지상군은 1950년 9월 19일 부산항에 도착해 곧장 미 25사단에 배속됐다. 낙동강방어선전투, 38선 진격 작전, 평양 점령 작전 등에 투입됐다.
혹한의 날씨는 열대지방 출신인 필리핀 장병들에게 큰 고통이었지만 이들은 용감하게 싸웠다.
필리핀군은 서부전선인 경기 파주에서부터 중부전선인 강원 철원, 동부전선인 강원 양구 지역에 이르기까지 주요 전선을 누비며 미군·영국군과 연합 작전을 폈다.
부하를 구출하기 위해 역습을 감행한 용감한 필리핀 군인이 있다. 필리핀 전우애의 상징인 콘라도 디 얍(Conrado D. Yap) 육군 대위다. 그는 경기 연천 북방에서 치른 율동전투(1951년 4월)에서 부하를 구출하던 중 전사했다. 필리핀군은 수적 열세에도 강인한 정신력을 바탕으로 중공군에 맞서 용전분투(있는 힘을 다해 용감하게 싸움)했다. 이 덕분에 미군과 튀르키예군이 후퇴할 시간을 벌었다.
얍 대위는 즉각 철수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장병을 구출하고 전우들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중공군을 역습했다. 고지를 탈환하고 부상한 동료 2명도 구출해냈다. 그는 철수 과정에서 적 저격수에게 공격받았다. 곧장 이송됐으나 숨을 거두고 말했다. 필리핀·대한민국 정부는 얍 대위의 용기와 책임감을 기리기 위해 최고 무공훈장을 수여했다.
필리핀 12대 대통령(1992~1998)을 지낸 피델 라모스 전 대통령(1928~2022)은 6·25참전용사다. 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대장으로 참전했다. 그는 1952년 5월 21일 강원 철원 일대에서 벌어진 에리고지전투에서 소대원 44명을 이끌고 중공군 70여 명을 사살했다. 아군 사상자는 한 명도 내지 않고 적군 벙커 7개를 파괴했다. 이 공을 인정받아 이승만 대통령에게 표창을 받기도 했다. 라모스 전 대통령은 2022년 8월 9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는 생전 한국 언론과 인터뷰에서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는 싸워 쟁취한 것이다. 한국 젊은이들은 여러 나라의 젊은이가 피를 흘려 자유를 지켰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길 빈다”고 했다.
콜롬비아
미군 장군이 극찬한 가장 용감한 군대
육·해군 5100명 파병
(전사 163명, 부상 448명, 포로 28명)
중남미 국가 중 유일하게 전투병을 파병했다. 콜롬비아군은 유엔군 중 마지막으로 한국에 도착한 지상군이었다.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유엔군은 1950년 10월 1일 38선을 넘어 북진해 통일을 앞두고 있었기에 추가 병력이 필요 없을 것이라고 봤다. 하지만 중공군이 개입하자 전황이 달라졌다. 1951년 4월 중공군은 유엔군을 철수시키고자 대공세를 벌였다. 한반도 상황이 급박해지자 콜롬비아는 1951년 5월 해군에 이어 같은 해 6월 15일 지상군을 지원했다.
미 24사단에 배속돼 전투를 치른 콜롬비아군은 규율이 엄하고 용맹하기로 소문났으며 ‘절대 후퇴하지 않는다’는 모토를 지켰다. 당시 참전했던 병사들은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소년들이었다. 몸에 잘 맞지도 않는 커다란 미군 군복을 입고는 치열하게 싸웠다. 콜롬비아 참전 노병들은 참전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한국의 놀라운 발전에 자신도 기여했다고 자부하기 때문이다.
콜롬비아에서는 6·25전쟁을 기억하기 위해 매년 4차례 공식 기념식을 연다. 콜롬비아 국방대학교에는 2003년 한국 정부가 기증한 석가탑 모양의 참전기념탑이 있다. 기념탑에는 콜롬비아 지상군을 지휘했던 미 24사단장 블랙시어 브라이언 장군의 글이 새겨져 있다.
‘나는 봤다.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병사들이 싸우는 것을. 콜롬비아 병사들은 내가 일생에 걸쳐 본 사람들 가운데 가장 용감했고 자랑스러웠다.’
남아프리카공화국
공군 파병… 총 1만 2405회 출격
공군 806명 파병
(전사 36명, 포로 8명)
아프리카 대륙 가장 남쪽에 있는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은 전투부대 파병국 중 유일하게 공군만 파병했다. 남아공은 한국 파병을 위해 외국에 군대를 파병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긴급하게 새로 만들기까지 했다. 이 파병안은 의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당시 대한민국과 남아공은 국교도 수립되지 않은 상태였다.
남아공은 당초 지상군과 공군(전투비행대대)을 파견하려고 했으나 남아공 공군 ‘제2전투대대’만 파병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이 부대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용맹을 떨쳐 ‘나르는 치타’라는 별칭을 갖고 있었다.
남아공 조종사들은 1950년 9월 26일 남아공을 떠나 1만 6000㎞를 배로 이동해 같은 해 11월 5일 일본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미군 F-51 머스탱 전투기 16대를 넘겨받고는 적응 훈련을 했다. 1950년 11월 15일 미 18전폭비행단에 배속된 남아공 공군은 이틀 뒤인 11월 17일 한국전 첫 출격에 나섰다. 1953년부터는 F-51보다 성능이 좋은 F-86 전투기까지 보급됐다. 한 조종사는 머스탱을 타다가 제트기인 F-86 세이버를 타고 고도 3만 피트(약 9000m) 상공까지 올라가니 적의 대공포 사정거리로부터 멀어져 “소풍 나온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남아공 공군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맺어질 때까지 2년 8개월 8일 동안 부산, 평양, 경기 수원, 경남 진해, 서울 여의도, 강원 횡성, 경기 오산 비행장 등 최전방 기지에 배치돼 최전선 상공을 누비며 적 보급로를 차단하고 지상군에 대한 근접 항공지원 사격을 폈다.
남아공 공군은 전투기 115대를 동원해 총 1만 2405회 출격했다. 적 전차 44대, 야포 221문, 대공포 147문, 보급품 집적소 500여 곳, 교량·철로 152개 등을 파괴했다. 작전 과정에서 남아공 공군은 36명이 전사하고 8명이 포로가 됐다. 전투기도 78대가 손실됐다.
소위로 참전한 데니스 어프 씨는 1951년 9월 17일을 잊지 못한다. 그는 개성 동북쪽에서 머스탱을 타고 적의 후방을 날던 중 격추되는 바람에 중공군에 포로로 잡혔다. 참전 4개월 만에 벌어진 일이다. 겨울에도 좀처럼 영하로 떨어지지 않은 남아공 출신이 혹한과 모진 고문 속에 23개월 동안 포로로 지내야 했다. 그는 1953년 9월 포로교환으로 풀려난 후 군 생활을 이어가 공군참모총장까지 역임한 뒤 2019년 88세로 별세했다.
어프 전 총장은 생전에 “북한은 최악의 독재국가가 됐고 남한은 자유민주주의를 이룩한 국가이자 세계 경제의 리더가 됐다. 참전은 당연히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에티오피아
포로 0명, 용맹하게 싸운 황제의 군대
육군 3518명 파병
(전사 121명, 부상 536명)
에티오피아는 유엔참전국 중 아프리카 대륙에서 지상군을 파견한 유일한 나라다. 에티오피아는 황실근위대에서 지원자를 엄선해 부대를 편성한 후 8개월간 영국군 교관에게 훈련을 받았다. 셀라시에 황제는 출정식에서 “국제평화와 인류의 자유수호를 위해 침략자에 대항해 용전하라”고 격려하며 파병 부대에 ‘강뉴(Kagnew)부대’라는 호칭을 부여했다. ‘강뉴’는 에티오피아어로 ‘혼돈에서 질서를 정립하다’, ‘초전박살’이라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황실근위대에서 엄선된 강뉴부대는 명예와 긍지로 가득 찼었다. 단결력을 바탕으로 용감하게 싸웠기에 포로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장병들은 다친 전우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챙겼고 전사한 동료는 시신까지도 모두 옮겨왔다.
강뉴부대는 1956년까지 주둔하며 평화를 지키고 전후 복구를 도왔다. 부대원들은 월급을 모아 1953년 경기 동두천에 ‘보화원’이란 고아원(보육원)을 세워 전쟁고아들을 보살폈다.
구르무 담보바 이병은 부상을 입었음에도 한국인의 눈빛에 끌려 두 번이나 참전했다. 그는 31세의 나이로 1951년 참전해 강원 화천·철원 일대에서 무공을 세웠다. 전투 중 허벅지와 엉덩이에 관통상을 입어 고국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참전했다. 당시 강뉴부대에는 담보바처럼 무반동총을 잘 다루는 병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죽음의 공포와 혹한의 고통을 다시 맞고 싶지 않았지만 어려움을 겪는 한국인들을 외면할 수 없어 두 번째 파병 명령도 받아들였다.
에티오피아 참전용사 중에는 하계올림픽 사상 최초로 마라톤 2연패를 달성한 맨발의 마라토너 아베베 비킬라도 있었다. 그는 한국전 참전을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참전용사들은 고국으로 돌아가 ‘한국촌’이라는 마을에서 함께 살았다. 하지만 에티오피아에서 1974년 공산 쿠데타가 일어나자 전쟁 영웅으로 칭송받던 참전용사들은 동맹군(공산군)과 싸운 배신자로 몰려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공산정권은 1991년 퇴출됐다. 우리나라는 2000년대부터 에티오피아를 지원하고 있다. 정부와 민간단체가 나서 참전용사와 그 후손을 돕고 있다.
강원 춘천시에 있는 에티오피아군 참전비 건너편에는 2007년 문을 연 에티오피아한국전참전기념관이 있다. 참전국을 기리기 위해 기념관을 세운 곳은 춘천이 처음이다. 2층 규모인 기념관은 크진 않지만 알차게 구성돼 있어 에티오피아군의 활약상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
이경훈 기자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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