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이런 곳이! 군사 요새가 문화 요새로
작성자 정보
- 공감 작성
- 작성일
본문
서울 도봉구 평화문화진지
‘서울 도봉구 마들로 932’. 평화문화진지의 현 도로명 주소다. 옛 지번은 ‘서울 도봉구 도봉동 7-4번지’로 의정부와 맞닿은 진짜 서울의 북쪽 끝이다. 1호선을 타고 목적지인 도봉산역을 지나치지 않기 위해 여러 번 지하철 노선을 확인했다. 한 정거장만 지나쳐도 서울이 아닌 경기 의정부시였기 때문이다. 행정구역이 달라지다보니 심리적 긴장감이 적잖았다. 도봉산역에 무사히 도착해 평화문화진지 방향 안내표지를 따라 1-1번 출구로 나갔다.
유행이다 싶을 정도로 많은 문화복합공간이 생기고 있는 요즘, 평화문화진지는 전무후무 군사시설을 재단장해 처음부터 큰 화제를 모았던 곳이다. 군사시설이라니! 인터넷으로 검색도 해보고 해당 누리집에 들어가 살펴도 봤지만 좀처럼 공간이 그려지지 않았다. 일반인에게 군사시설은 멀고 낯선 곳이다.
한편으론 군사시설이라 한들 도시 안에서 시민들을 위한 문화공간으로 재단장을 마쳤다면 군사시설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웬걸! 지하철역을 나서자마자 딴 세상이 펼쳐졌다. 평화문화진지를 중심으로 동쪽에는 수락산이, 서쪽에는 도봉산이 딱 붙어 있다 싶을 정도로 가깝게 자리하고 있었다. 흐린 날씨 탓에 짙은 운무가 산 중턱까지 내려앉아 산 정상이 보이지 않으니 평화문화진지를 둘러싼 산세들이 더욱 거대하게 느껴졌다. 여기가 서울인가 싶었다.
평화문화진지가 자리 잡은 도봉산자락은 원래 원산~서울을 잇는 3번 도로가 남북으로 뻗어 있어 북한이 전차로 남침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길목이었다고 한다. 당시 작전지역은 동쪽으로 수락산과 불암산, 서쪽으로 도봉산과 북한산, 그리고 남쪽 끝은 북악산에 잇닿아 있어 동서 양쪽 고지를 잘 방어한다면 적의 보병과 전차 활동에 커다란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충지였다. 이곳이 점령당하면 전선이 한강 이남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는 지세이다 보니 아군과 적군 모두에게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곳이었다.
서울을 지켜라! 길목에 내려진 명령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6·25전쟁을 발발한 북한은 전차를 앞세우고 현재 평화문화진지가 위치한 의정부~창동 방어선을 21시간 만에 돌파해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창동·미아리전투는 6월 27일부터 28일까지 북한군과 서울 점령을 둘러싸고 벌어진 전투였다. 화력이 부족했던 국군은 속수무책 남쪽으로 밀려났고 서울과 북방을 잇는 가장 중요한 길목이 손쓸 새도 없이 침략의 지름길이 됐다.
평화문화진지 자리에 군사시설이 들어서게 된 건 1968년 북한 무장간첩단이 대통령 암살을 목표로 청와대 인근까지 침투한 ‘김신조 사건’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정부는 수도 서울을 방어하기 위해 ‘서울 요새화 계획’을 수립하고 1970년 평화문화진지 자리에 유사시 건물 자체를 폭파시켜 탱크가 통과하지 못하도록 길을 막는 대전차 방호시설을 세운다. 군사시설을 재단장했다는 평화문화진지는 본래 대전차 방호시설이었다. 시설의 목적은 오직 하나였다. 길을 막는 것이다. 중요한 길목을 빼앗긴 뼈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6·25전쟁 당시 북에서 서울로 오는 이동경로상에 지어진 대전차 방호시설은 그래서 일반 군사시설과 달리 군인들이 상시 거주하며 유사시 신속하게 대처하기 위한 형태로 설계됐다. 1층은 공격과 방어 및 대피소·참호 역할이 가능한 군사시설로, 2층부터 4층까지는 장교나 하사관들의 관사 아파트 5개 동으로 만들어 긴급상황이 발생하면 바로 1층으로 내려와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아파트는 일종의 위장술 역할도 했다. 그러나 실제 군인들이 거주한 기간은 얼마 되지 않았고 1970년대 후반 일반 분양되면서 평화문화진지에는 도봉구 최초의 시민아파트라는 이력이 추가된다. 이후 1990년대 후반 건물 노후화로 인해 철거가 결정됐고 2003년 아파트가 철거되면서 1층 군사시설만 존치됐다.
10년 넘게 방치된 지역의 흉물
조선시대 평화문화진지 일대는 왕실묘역이나 사대문 문중묘역이 형성돼 나무를 베거나 무덤 쓰는 것을 금지하는 일종의 그린벨트와 같은 사산금표(四山禁標)가 있는 지역이었다. 그렇다보니 풍광이 뛰어나 겸재 정선(1676~1759)의 ‘도봉추색도’와 심사정(1707~1769)의 ‘도봉서원도’, 바위 위에 새긴 송시열의 한시 ‘제일동천(第一洞天)’과 같은 작품으로 남아 있다. 또 공무로 여행하는 관리나 일반인에게 숙박을 제공하던 원(院) 중 ‘다락원’이 있던 자리로 물류 유통의 집산지이기도 했다. 수려한 풍광부터 지리적 위치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아파트가 철거되고 10년 넘게 그 쓰임새를 찾지 못하고 방치돼 지역의 흉물이 됐다. 대전차 방호시설에는 쓰레기가 쌓이기 시작했고 어두워지면 음산해서 누구도 가까이 갈 엄두를 내지 못하는 폐허로 변해갔다. 2016년 12월 서울시와 도봉구청, 그리고 제60보병사단은 재단장 협약을 체결했다. 시민의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었다. 2017년 10월에 정식 개관한 평화문화진지는 남북의 길목을 끊는 목적을 가진 시설이었던 만큼 건물은 단층으로 전체 5개 동이 동서로 늘어선 길이 250m의 단일 건축물이다.
1동은 공연장이다. 2동에서 4동까지는 예술가들과 시민들을 위한 공방, 전시실, 강의실을 비롯한 커뮤니티 공간이 있다. 2동과 3동 사이 베를린장벽이 전시된 평화광장과 잔디마당은 축제와 장터를 위해 쓰이고 있다. 5동 앞에는 주변 경관뿐 아니라 기다란 평화문화진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자리하고 있다. 특히 평화문화진지는 남북 분단의 역사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 문화사적 유적이므로 그 상징성을 공간에 잘 보존하고 드러내는 데 신경을 썼다. 콘크리트 덩어리뿐 아니라 끊어진 계단이나 벽, 보, 소총거치대, 소총수 번호, 낙서 등 안전상 문제만 없다면 남길 수 있는 것은 모두 남겼다.
건물 사이사이 고스란히 노출된 옛 콘크리트가 전쟁의 폭력성을 증언하고 있는 듯하다. 새로 추가된 공간 역시 외장 재료로 나무(탄화목)를 사용해 원래 그 자리에 그렇게 있었던 것처럼 도봉산, 수락산, 중랑천을 비롯해 서울창포원 같은 주변 공간과 이질감 없이 어울리도록 했다. 이제 공모를 통해 선발된 작가들에게 작업공간을 제공하고 다양한 전시와 교육, 행사 등을 진행하는 이름 그대로 평화문화 공간이다. 군사 요새에서 문화 요새로 변신한 것이다.
길을 다시 잇고 싶은 염원을 담아
평화문화진지의 백미는 옥상과 중정이다. 동서를 횡단하며 남북의 이동을 끊은 방호시설만큼 분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공간이 또 있을까. 평화문화진지는 공간을 단순히 재활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공간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상징성을 보다 극대화하고자 했다.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담아서 끊어진 길을 다시 잇는 것이다.
먼저 옥상이다. 기존에 없었던 옥상을 지붕으로 연결해 다시금 남과 북을 이었다. 옥상에 올라가면 동쪽으로 수락산과 중랑천, 서쪽으로 도봉산, 남쪽으로 서울창포원과 북쪽으로 동북권 체육공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잠시나마 동서남북이 하나로 이어진 듯한 착각이 든다. 옥상은 잔디를 깔고 화단까지 조성해 놓았으니 평화문화진지를 방문했다면 꼭 올라가 걸어보길 권한다.
중정의 의미도 크다. 중정은 한옥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건축양식이다. 평화문화진지는 기존 대전차가 들어가던 곳을 그대로 두면서 앞부분은 예술가들의 창작공간을 짓고 그 사이에 공간을 뒀다. 낡은 군사시설과 새 문화시설을 연결하며 과거와 현재를 만나게 한 것이다. 중정에는 파라솔을 세워 시민들이 그늘을 피하며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했다. 미완의 평화이지만 공간을 통해 이보다 더 미래지향적인 역사를 보여줄 순 없을 것 같다.
아직도 평화문화진지 일부는 국방부 소유로 유사시에 대비해 특정 용도의 시설을 만들지 않고 세미나실 같은 빈 공간을 남겨두고 있다. 공간은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지만 분단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날이 좋아도, 날이 좋지 않아도 공간이 주는 상징이 극대화되는 곳! ‘도봉구 마들로 932’ 길목 위의 평화문화진지다.
강은진 객원기자
[자료제공 :(www.korea.kr)]
관련자료
-
링크
-
이전
-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