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생은 외줄타기, 난 그저 몸으로 보여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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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년 줄타기 외길인생 ‘어름산이’ 권원태 명인
새파란 하늘에 팽팽한 황금빛 밧줄이 내걸렸다. 높이 3m, 길이 9m의 줄 하나를 놓고 세상은 둘로 갈라졌다. 줄 위에 선 자와 땅을 딛고 선 자. 땅 위의 눈동자가 일제히 줄 위를 향했다. 아슬아슬 걷던 새하얀 버선발이 줄을 퉁겨내며 마침내 하늘로 떠오른 순간, 숨죽였던 대지는 환호로 진동했다. 날개마냥 펼쳐진 두 다리는 줄을 사이에 놓고 내려앉았다 공중으로 솟구치기를 반복했다.
“아이고 똥꼬야. 여기 있는 애들, 공부하기 싫으면 아저씨 똥꼬가 얼매나 아플지 생각해. 공부 안 하면 나처럼 줄이나 타야 되는 거여.”
천지가 쌍으로 놀랄 재주를 선보이고 난 줄꾼은 박수 대신 웃음을 받는다. 구경꾼들도 덩달아 조였던 긴장의 끈을 푼다. “잘했다!” “아 돈 받고 하는 건디 잘해야제.” “우린 돈 줘도 못해요. 하하하.” 아무 때고 오가는 줄꾼과 구경꾼의 재담에 줄 위의 세상과 줄 아래 세상은 이내 같은 공기로 버무려진다. 마당놀이의 매력이다.
유독 서둘러 찾아온 봄, 청와대는 ‘권원태 줄타기 연희단’의 한바탕 줄놀음으로 4월의 첫날을 맞았다. 그 중심에 ‘어름산이’ 권원태 줄타기 명인이 있다. 남사당패 최고 줄꾼을 뜻하는 어름산이는 줄타기가 얼음 위를 걷는 것 같이 위태롭다 해 붙여진 이름이다. 열 살에 부모 손에 이끌려 운명처럼 줄꾼이 됐다는 명인, 굵기 3㎝의 외줄이 그가 47년째 서는 ‘무대’다. 그의 이름은 영화 <왕의 남자(2005)> 이후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남사당패 광대 ‘장생’을 연기한 배우 감우성의 화려한 줄타기가 실은 그의 몸짓이었다. 권 명인은 국가무형문화재인 남사당놀이 이수자인 동시에 기네스북 기록 보유자이기도 하다. 제자리에서 반 바퀴 돈 뒤 줄에 앉는 ‘거중돌기’를 열두 번이나 해내 2014년 기네스북에 올랐다.
난생 처음 본 줄놀음의 여흥이 가시기 전, 진정한 국가대표 줄꾼의 뒤를 좇았다. 후들거리는 외줄 위의 삶은 어떤지, 하늘 위에서 본 세상의 모습은 어떤 풍경인지, 하늘과 땅을 오가는 이의 시선은 평소 어디를 향하는지 궁금했다. 재담꾼이기도 한 줄꾼은 막힘 없이 질문을 받아냈다.
줄놀음이 이리 재미있는 줄 몰랐습니다. 줄 위에 선 자도 즐깁니까?
줄타기는 삼대가 함께 볼 수 있는 공연이에요. 연령도 취향도 안 가리죠. 배경지식도 필요 없고요. 저잣거리에서 광대배들이 하던 놀이니까요. 반면 줄꾼은 목숨 걸고 합니다. 1년에 약 50차례 공연하지만 줄 위에 설 때는 물론 줄을 설치할 때부터 긴장합니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공연 전 누가 농담을 하는 것조차 싫어했죠. 줄이 20~30㎝ 차이로 줄고 느는 게 저한테는 1m 차이로 느껴집니다. 남들은 못 느끼는 지진을 저만 알아챌 정도로 예민했어요. 몇 시간 뒤 뉴스 보면 지진이 맞대요. 그래도 오늘처럼 관객이 많이 웃어주고 잘한다 해주면 줄 탈 맛이 납니다.
날씨, 특히 바람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약간 바람이 부는 게 오히려 좋아요. 부채로 중심을 잡는 것 같죠? 사실 바람을 이용하는 겁니다. 바람에 싹싹 등을 기대면서 가면 편해요. 고수들만의 노하우죠. 힘으로 타는 젊은 줄꾼은 바람이 안 부는 게 낫습니다. 아마추어일수록 부채에 의존하죠.
평소 연습을 안 한다고 해 놀랐습니다.
공연 자체가 연습이죠. 몸을 다칠까 리허설도 잘 안 합니다. 어릴 때 워낙 혹독하게 훈련했어요. 어려서 배운 숟가락질은 평생 안 잊듯 몸에 다 배어 있는 덕입니다. 지금 줄타기하는 사람 중엔 내가 제일 나이가 많은데 아직 배에 ‘왕(王)’자도 있습니다. 줄에서 뛰어오를 땐 호흡을 참아야 하는데 이때 배에 힘이 들어가면서 복근이 생긴 겁니다. 운동은 계단 오르기, 허리 운동 정도만 해요.
줄꾼은 입담도 좋아야겠더군요. ‘재담’은 서양 줄타기와 구분되는 전통 줄타기의 특징이기도 하죠.
재담은 관객과 소통하는 핵심 요소예요. 그 때문에 줄타기만큼 재담에도 무척 신경씁니다. 기본 뼈대에 그때그때 살을 붙이는 식이죠. 그건 관객과 같이 만들어나갑니다. 예전엔 광대들이 음담패설도 많이 했어요. 하지만 이젠 말실수했다간 큰일 납니다. 나이 50이 넘으니 이야기하는 게 좀 편해요. 젊은 줄꾼은 줄타기보다 재담을 더 힘들어 합니다.
하늘을 나는 건 인간의 오랜 꿈입니다. 줄 위에선 무엇이 보이나요?
제 꿈이 원래 비행기 조종사였어요. 그 꿈을 몸으로 날며 이룬 셈이죠. 줄에 탁 올라서면 사람들이 한눈에 다 보여요. 한 명 한 명의 시선까지 다 들어옵니다.
한강 위에서 줄을 탄 적도 있죠. 세계를 돌며 각종 줄타기 대회에도 나갔습니다.
2007년, 2008년 한강에서 열린 세계줄타기대회 조직위원장이자 한국 대표를 맡았어요. 1㎞ 길이의 쇠줄을 한강 위에 설치해놓고 누가 빨리 건너는지 겨뤘죠. 밸런스봉 하나에 의지해 가는 건데 이게 줄타기랑은 아예 다른 차원이에요. 쇠줄을 밟는 느낌도 평소 타는 ‘조선줄’과는 완전히 달랐어요. 이후 2019년 중국에서 열린 세계줄타기대회에도 초청받았는데 그땐 안 하겠다고 했습니다. 산 속에서 150m 높이의 줄 위를 걷는 대회인데 ‘난 이런 거 안 맞는다’고 했죠. 중국이나 유럽 쪽엔 이런 하이와이어(high wire)만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 많아요. 한국 대표로 와달란 말에 결국 갔는데 정말 아찔했습니다.
오래전 한 언론 인터뷰에서 권원태 명인은 10대 땐 눈물로 줄타기를 배웠고 20대 후반이 돼서야 줄꾼의 운명을 받아들였다고 했다. 줄놀음의 재미를 알게 된 건 30대 이후라고. 평생직장이 사라진 지 오래인 세상에서 반세기 가까이 한길만 걸어온 그는 이제 무엇을 위해 줄 위에 오를까.
뭐든 빠르고 쉽게 바뀌는 세상에서 줄타기만 47년째입니다.
<왕의 남자>로 줄타기를 비롯한 전통문화가 크게 부흥했어요. 30대 후반이었는데 그때 줄타기가 재밌다고 느끼기 시작한 거예요. 그전까지는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으니 그냥 한 거죠. 수입도 겨우 연명할 정도였어요. 아르바이트로 택시 운전도 했고요. 지금은 찾아주는 이가 있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합니다. 나는 돈 받고 팔려가는 사람이에요. 자부심, 사명감도 있지만 돈 받고 하는 일인데 무대 위에서 ‘누’가 되지 않게 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국내에 줄꾼은 몇 명이나 됩니까? 본인이 배운 것처럼 제자들에게도 혹독하게 하나요?
줄꾼은 열댓 명 정도 됩니다. 제자 중엔 초등학생도 있습니다. 줄을 가르칠 땐 많이 혼내고 엄하게 해요. 줄타기는 공연예술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익스트림 스포츠’예요. 잘한다고만 하면 크게 다칠 수 있어요. 요즘 줄은 다 과학적으로 설계돼 만들어지지만 예전엔 줄꾼이 말뚝 박는 것부터 직접 했어요. 젊은이들은 우리가 만들어놓은 걸 가져가기만 하면 돼요. 우리 때보다 훨씬 더 잘해야 해요.
양반병신걸음, 외무릎훑기, 아낙네걸음, 참봉댁맏아들 등 줄타기 기술도 다채롭습니다. 기술개발이나 현대화 노력도 합니까?
같은 기술도 줄꾼에 따라 스타일이 굉장히 달라요. 저는 이야기를 끌고 가면서 결정적인 순간에 ‘빵’ 하고 기술을 임팩트 있게 보여주는 식이죠. 그렇다고 너무 재담 중심으로만 해도 안돼요. 외국 애들 봐요. 줄 타고 날아다니잖아요. 젊은 줄꾼들이 기술을 발전시켜야죠. 나처럼 전통예술을 정석대로 하는 사람도 있는 거고요. 그런 가치가 인정받는 때가 또 올 겁니다.
‘때’를 앞당기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지방공연에 가 보면 꼭 가수들을 불러요. 전통예술 공연만 하면 사람이 안 모이니까요. 가까운 일본만 해도 전통문화를 굉장히 존중하는 사회 분위기가 있는데 우리는 전통예술 하려면 투잡은 기본으로 해야 되는 거예요. K-콘텐츠, K-관광 하는 것들도 우리와는 먼 이야기로 느껴지죠. K-콘텐츠에 전통문화를 반드시 포함해야 해요. 전통놀이를 의무교육으로 해 어릴 때부터 많이 접하게 하고요. 전통문화를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이 대중문화예술에만 관심을 갖는 게 당연하지 않겠어요? 오직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관광상품으로 전통문화공연을 상품화할 필요도 있죠. 외국인들에게 한국에는 방탄소년단(BTS)만 있는 게 아니란 걸 보여주고 싶습니다.
줄은 언제까지 탈 생각입니까?
누누이 말하지만 난 하나의 ‘상품’이에요. 대충하면 안돼요. 내가 설렁설렁하면 사람들이 줄타기는 저런 거구나 생각하죠. 무대에서 관객에 대한 예의를 못 지킬 때 내려올 겁니다.
흔히 인생을 외줄타기에 비유합니다. 줄타기 비법이 있습니까?
인간은 탯줄을 타고 나와 삼베줄에 꽁꽁 묶여 한 줌의 재로 떠납니다. 평생 줄을 타야 하는 운명인 거죠. 인생사 바람에 흔들릴 때가 많겠지만 운전할 때 차선을 벗어나면 안되듯 안전운행해야 합니다.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았지만 끝까지 버티니 남사당 줄꾼으로 이름 석자는 남더군요. 모든 인생이 다 외줄타기입니다. 줄꾼은 그걸 몸으로 보여줄 뿐이죠. 힘들어도 내려오지 말고 끝까지 안전하게 줄 잘 타십시오.
인터뷰를 마친 뒤 공연에서 줄꾼이 내뱉던 말이 계속 머리에 맴돌았다. “겨우 죽을 둥 살 둥 건너왔는데 또 저쪽으로 건널 생각을 하니 아득하네. 그럼 이번엔 뒤로 걸어가볼까.” 이것은 줄타기에 대한 한탄인가 인생에 대한 묘사인가. 다시 무대로 향하는 명인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조윤 기자
박스기사
청와대에서 새봄 맞이 공연 즐기세요
새봄을 맞이해 청와대에서 '다시 봄, 설레는 청와대' 문화예술공연이 펼쳐진다. 한국문화재재단 예술단(4월 7일)을 비롯해 아카펠라 그룹 나린(4월 8~9일), 재즈 삼인조 젠틀레인(4월 10~12일), 5인조 재즈 금관악기 연주단체 미스터 브라스(4월 13~14일) 등이 참여해 남녀노소 모두가 즐길 수 있는 흥겨운 공연을 선사한다. 모든 공연은 하루 두 차례 오전 11시와 오후 3시 청와대 헬기장을 무대로 펼쳐진다. 이어 4월 15~16일 주말 이틀간 오후 3시 청와대 대정원에서는 ‘국방부 근무지원단’이 대한민국 전통 의장과 군악의 진수를 선보이며 봄 풍경에 운치를 더할 예정이다.
공연은 별도 예매 없이 청와대를 찾아 누구나 즐길 수 있다. 우천 시 취소될 수 있으며 자세한 사항은 전화(1522-7760)로 문의하면 된다.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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