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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국 헌신 기억하며 자전거로 ‘동맹로드’ 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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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행사 국가는 ‘튀르키예’… 경기 용인일대 22.4㎞ 달려
지난 4월 1일 경기 용인특례시에서 6·25전쟁 정전 70주년을 맞아 ‘유엔참전국 자전거 동맹로드(이하 자전거 동맹길)’ 행사가 열렸다.
자전거 동맹길은 유엔참전국 주요 전적지를 국가보훈처와 참전국 대사관, 지방자치단체, 자전거 동호인들이 함께 자전거로 달리는 행사다. 정전 70주년을 맞아 유엔 참전의 의미를 기리고 유엔 참전용사들의 희생과 헌신에 감사하기 위해 기획됐다.
보훈처는 오는 7월까지 서울, 가평, 인천, 부산 등지에서 자전거 동맹길 행사를 이어갈 예정이다.



튀르키예, 네 번째로 많은 병력 파병
자전거 동맹길 첫 행사 국가는 22개 유엔참전국 중 네 번째로 많은 병력을 파병한 튀르키예가 선정됐다. 용인특례시청 잔디광장에서 열린 이날 자전거 동맹길 행사에는 박민식 국가보훈처장, 살리 무랏 타메르 주한 튀르키예 대사, 이상일 용인특례시장, 김진익 육군 55사단장, 국가유공자 가족, 용인 시민, 자전거 동호인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박민식 처장은 흰색 헬멧에 빨간색 사이클 복장과 함께 6·25전쟁 정전일을 나타내는 배번 ‘727’을 달고 등장했다.
튀르키예 국가 연주, 애국가, 참전용사·지진 피해자 추모 묵념 순으로 진행된 개막식에서 박 처장은 “참전 22개국 청년들이 70여 년 전 이역만리 대한민국에 와 자유를 위해 싸운 헌신을 우리는 기억하고 또 기억해야 하며 예우해야 한다”면서 “이들 덕에 우리는 놀라운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두 바퀴 자전거를 타고 달리며 최근 지진 피해를 당한 튀르키예가 아픔을 하루빨리 이겨낼 수 있도록 응원하자”고 했다.
살리 무랏 타메르 대사는 “대한민국은 전쟁 폐허를 딛고 부강한 민주주의국가를 이뤄내 경의롭다”며 “비극 속에도 꽃은 핀다. 6·25전쟁에서 핀 한국과 튀르키예의 우정의 꽃이 그랬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난 2월 강진이 온 천지를 폐허로 만들어 제2의 6·25전쟁터와 같았다. 한국이 역대 최대 규모의 구호팀, 최고의 의료·기술진을 보내는 등 따뜻한 도움의 손길을 보내줬다. 우리의 형제애는 더 깊어졌다”고 말했다.
6·25전쟁 당시 튀르키예 군인과 전쟁 고아의 인연과 재회를 담은 영화 〈전쟁의 딸, 아일라〉의 실제 주인공 김은자(77) 씨도 이날 영상편지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김 씨는 “튀르키예군이 저를 구해주고 ‘아일라’라는 이름을 붙여줬다”며 “튀르키예 군인 술레이만 딜빌리이 하사를 아버지처럼 따랐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난 2월 튀르키예 지진 소식을 듣고 마음이 너무 아팠다. 제가 받은 사랑을 튀르키예 국민에게 조금이나마 전하고 싶다”며 성금을 전했다.
이날 자전거 동맹길은 용인특례시청을 출발해 튀르키예군이 중공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김량장 전투지인 처인구 김량장동 일대를 거쳐 양지IC를 반환점으로 하는 22.4㎞ 코스였다. 초등학생부터 70대에 이르기까지 100여 명이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전 마라토너 이봉주 씨도 참가
반환점을 돌아오는 길목(김량장동 통일공원)에선 자전거 동맹길 행사를 기념해 ‘튀르키예의 길’ 안내판 제막식이 열렸다. 이날 보훈처는 용인특례시와 함께 김량장동 일부 자전거도로를 ‘튀르키예의 길’로 지정했다. 도로 한쪽 공원 터에는 튀르키예 영문명을 형상화한 조형물을 세웠다. 조형물에는 용인특례시 어린이들이 그린 튀르키예에 대한 감사와 응원 메시지를 담은 타일도 부착했다.
이날 행사에는 2001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 우승자 이봉주 씨도 함께했다. 근육긴장이상증이라는 희귀질환으로 등이 굽어 있었다. 배번 ‘700’을 붙인 이 씨는 불편한 몸이지만 대열 맨 앞에서 완주했다. 이 씨는 “6·25전쟁 정전 70주년을 기념하고 튀르키예에 대한 감사를 전하는 의미 있는 행사라서 참석하게 됐다”고 했다. 이 씨는 “예전에는 많이 뛰었지만 최근에는 자전거를 많이 타고 있다”며 “불러만 준다면 다음 자전거 동맹길에도 참가하고 싶다”고 밝혔다.
용인에 사는 하태린(12·동림자유학교) 양은 아빠 하왕수(48) 씨와 함께 참가했다. 하 양은 언덕을 오르는 구간이 힘들었다고 했지만 무사히 완주했다. 하 양은 지진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튀르키예 국민을 계속해서 응원하겠다고 말했다.
하왕수 씨는 지인에게 자전거 동맹길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참가하게 됐다. 그는 “70년 전에는 튀르키예가 우리나라를 도왔지만 이번에는 우리가 은혜를 갚을 차례”라며 “지진으로 힘들어하는 튀르키예에 성금과 옷가지 등을 보냈다. 물질적·정신적으로 튀르키예를 돕겠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에는 용인대 학생들을 비롯해 2030세대 자전거 동호인들도 참석했다. 자전거 동맹길은 ▲경기 가평: 영연방 국가(영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 5월 초·중순) ▲경기 양평: 미국·프랑스(5월 하순) ▲서울~인천: 미국 등 유엔군(6월 중순) ▲부산 유엔기념공원 일대(마지막 행사): 미국 등 유엔군(7월 초순) 등 총 다섯 차례에 걸쳐 열릴 예정이다.

이경훈 기자


박스기사
튀르키예군의 활약
백병전의 강자 중공군 남진 늦춰



튀르키예군은 1950년 6·25전쟁 발발 직후 유엔군으로 참전(육군 1개 여단)했다. 미국·영국을 제외하고 지상군을 여단(4000~5000명) 규모로 파견한 나라는 튀르키예와 캐나다뿐이다. 튀르키예는 보병 외에 공병·수송·의무·병기 부대를 하나의 전투단으로 꾸려 독립적으로 전투를 수행했다. 전투부대 파병 국가 16개국 중 다수는 독립적으로 전투를 치를 만한 규모가 되지 않아 주로 미군이나 영국군에 배속돼 전투를 치렀다.
1950년 9월 25일 튀르키예 남부 이스켄데르항을 출발한 튀르키예 군대는 지구 반 바퀴를 돌아 10월 17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첫 전투는 평양 북방 군우리전투(1950년 11월 26일~12월 1일, 청천강전투)였다. 미 2사단이 청천강전투에서 중공군을 패해 철수할 때 튀르키예군은 미군을 구하기 위해 중공군 진지로 돌격해 백병전을 벌였다. 덕분에 미 2사단은 중공군 포위망을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튀르키예군은 전사 218명, 부상 455명, 실종자(포로) 100여 명이 발생했다. 튀르키예군은 미 2사단을 구출한 공로로 참전 유엔군 최초로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에게 부대 표창을 받았다.
튀르키예군은 1951년 1월 25일부터 27일까지 사흘간 치러진 김량장전투에서 인해전술로 밀고 내려오는 중공군을 대파했다. 튀르키예군은 김량장리, 151고지 등에 박격포를 배치해 진지를 구축한 중공군을 상대로 육탄 근접전을 벌였다. 튀르키예군은 공군·포병을 활용한 화력 지원으로 중공군 진지를 맹타한 후 ‘알라(Allah)’를 외치며 돌격해 백병전으로 적을 격퇴했다. 김량장전투에서 튀르키예군은 12명이 전사하고 30명이 다쳤지만 중공군은 1735명이 사살됐다. 튀르키예 군인 한 명당 40명의 적을 무찌른 셈이다. 유엔군은 김량장전투 승리로 중공군의 남진을 늦추고 반격의 계기를 마련했다.
중공군 474명은 튀르키예군과의 백병전에서 개머리판에 의해 턱이 깨지고 총검에 찔려 사망했다. 중공군은 김량장전투 이후 일선에 “튀르키예군과는 정면승부를 피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김량장전투는 튀르키예군이 앞서 치른 군우리 전투의 패배를 설욕하고 튀르키예군의 명예를 회복한 전투였다.
튀르키예는 미국, 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인명 손실을 봤다. 누적 인원 2만 1212명을 파병해 966명이 전사, 1155명이 다쳤다. 포로는 244명이 발생해 인명 피해는 2365명이다.
1952년 튀르키예군은 전쟁 고아들을 위해 튀르키예 수도 이름을 딴 ‘안카라 고아원(앙카라학원)’도 세웠다. 전후 튀르키예 잔류 부대가 철수한 1966년까지 14년 동안 전쟁고아 640여 명을 돌봤다.

영화 ‘전쟁의 딸, 아일라’
튀르키예 군과 한국 고아의 감동 실화



튀르키예 보병 여단 소속이었던 술레이만 딜빌리이 하사는 1950년 11월 말 평양 부근 군우리에서 북한군 포격에 부모를 잃고 우는 네 살배기 아이를 발견해 부대로 데려왔다. 당시 기온은 영하 30℃. 아이는 부모와 자기 이름도 기억하지 못했다. 술레이만은 아이의 동그란 얼굴을 보고 튀르키예어로 ‘달’이란 뜻인 ‘아일라’로 이름을 지어줬다.
술레이만은 당시 20대 중반으로 고국에 결혼을 약속한 애인도 있었지만 아일라를 친딸처럼 생각했다고 한다. 이에 전쟁 중 귀국 명령이 떨어지자 아일라를 몰래 상자에 넣어 튀르키예로 데려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실패했고 둘은 이별해야 했다.
그는 생전 언론 인터뷰에서 “아일라를 정말 내 딸로 여겼다.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고 했다. 아일라는 얼마 뒤 튀르키예군이 전쟁 고아를 돌보기 위해 경기 수원에 지은 앙카라학원에 맡겨졌다. 아일라는 여기서 ‘김은자’라는 이름을 얻었다.
둘은 헤어진 지 58년 만인 2010년에야 재회했다. 튀르키예에선 이들의 사연을 담은 영화 <전쟁의 딸, 아일라>가 2017년 개봉해 500만 명이 관람했다. 술레이만은 2019년 92세로 별세했다.


[자료제공 :icon_logo.gif(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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