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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없는 미술, 한국적인 매력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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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비 한, ‘지우개 드로잉–아리아스’, 종이 위에 지우개 가루, 풀, 79×56cm, 2004

감나무 가지에 매달린 열매처럼 벌겋게 가을이 익어간다. 계절을 체감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코끝으로 전해지는 알싸한 새벽 공기에서 가을 냄새를 맡고 누군가는 대학입학 시험 소식에 겨울을 체감한다. 요즘 각 대학에선 수시입학 전형이 한창이다. 특히 미술대학에선 실기 시험이 치러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미대 입시를 준비하는 수험생은 반드시 넘어야 하는 산이 있다. 석고 데생이다. 아폴로, 헤르메스, 라오콘, 비너스, 아그리파, 줄리앙, 시저, 브루투스…. 그리스·로마시대 만들어진 대리석 조각상이다. 미대 입시에 사용되는 석고상은 이 대리석 조각 모사품이다. 일종의 ‘가짜 조각상’이다.
미대 지망생들은 몇 시간 내에 이 석고상을 똑같이 그려내는 기법을 배운다. 가짜를 보고 진짜처럼 그려내는 기술을 미술학원에서 체득한다. 이때 사용하는 재료는 오직 연필과 지우개. 눈처럼 하얀 석고상을 검은색 연필로 그린다는 것 자체가 역설이 아닐 수 없다. 누가 더 묘사(눈속임)에 능숙한가를 겨루는 셈이다. 물론 긍정적인 부분도 없지 않다. 하지만 제한된 시간 내에 기계처럼 익힌 기술을 평가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음을 부정할 수도 없다.

▶2009년 LA컨템포러리 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광경

획일적인 미술대학 입시제도의 그늘
아무튼 석고 데생으로 대표되는 우리의 미대 입학 제도는 여전히 아쉬운 점이 많다. 이런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것을 현대미술 작품으로 만들어낸 작가가 있다. 재미교포 1.5세 데비 한이다. 2004년 데비 한이 발표한 ‘지우개 드로잉(Eraser Drawing)’ 시리즈는 당시 한국 미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그가 그린 석고 데생은 어딘지 다르게 보인다. 이유는 연필이나 목탄으로 그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지우개 찌꺼기를 붙여서 그려졌다. 수없이 반복되는 연습 과정에서 생산(?)된 노력의 흔적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한국 입시미술 제도의 이면을 비판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이 작품에는 연필로 그린 것 못지않게 오랜 시간과 노력이 깃들었다. 그래서 수공예적인 느낌이 물씬 풍긴다.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난 데비 한은 어릴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작가가 돼 2002년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때 미대를 지망하는 중고생들이 똑같이 기계처럼 석고 데생을 하는 걸 보고 놀랐다.
“한국에 처음 왔을 땐 정말 신기했어요. 뉴욕이나 유럽에서 볼 수 있는 미술 트렌드가 전부 있어서요. 그래서 한국 미술계가 매우 역동적으로 보였지요. 그런데 조금 지내보니 그게 아니란 걸 알게 됐어요. 겉모습만 그럴 뿐 속내는 그게 아니었어요.”
데비 한은 당시 한국 미술계를 이렇게 진단했다. 그리고 그 원인이 획일적인 미술대학 입시제도 때문이란 걸 알게 됐다고 한다.
“한국은 미술에서도 정답을 찾으려고 하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그림을 보고 ‘이건 잘 그렸고 저건 못 그렸다’는 식으로 기준을 정해서 점수를 매기고 따져요. 예술은 정답이 없는 창작이잖아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정답을 미리 정해놓고 그 틀에 맞추려는 것 같아요.”

▶데비 한, ‘The Battle of Conception’, 도자기에 청자유액, 35×33×16cm, 2010(부분)

▶데비 한, ‘두 여신 Ⅲ(Two Graces Ⅲ)’, 디지털 프린트, 180×160cm, 2008

▶데비 한, ‘앉아있는 삼 미신(Seated Three Graces)’, 디지털 프린트, 160×235cm, 2009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한 장면
이처럼 한국 미술계에 적응하면서 맨 처음 든 의문은 미술대학 입학을 위한 획일적인 석고 데생이었다. 이런 문제의식은 좀 더 심각하고 다양한 주제로 확장됐다. 비뚤어진 한국 여성의 미의식, 즉 서구적인 외모를 선망하면서 행해지는 성형수술 같은 사회현상으로까지 관심이 확대됐다. 청자나 백자로 만든 비너스 도자기 작품, 서양 고대 조각상과 한국인 신체를 합성한 사진 작품 시리즈가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작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뭔가를 고친다는 건 잘못되었기 때문이잖아요? 그렇다면 한국 여자 얼굴이 잘못된 건가요? 아니잖아요?”
지나치게 외모에 신경 쓰는, 그것도 서양인 기준에 맞추려는 한국 여성의 세태를 안타까워했다. 이런 배경에서 한국 여성 특유의 몸짓에 주목했다. 찜질방 바닥에 편하게 앉아서 수다를 떠는 중년여성, 친한 친구들끼리 스스럼없이 팔짱 끼고 다니는 여학생,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공손히 인사하는 백화점 여점원 등이 그 예다.
작가는 이런 모습에서 한국 여성의 문화적 특성을 발견했다. 그들 특유의 특징을 표현하기 위해 일반인을 섭외해서 촬영했다. 그리고 서양 고대 조각상의 여신 얼굴을 컴퓨터로 합성했다. 피부도 대리석이나 석고상처럼 매끄럽게 만들었다. 이 작업 역시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 페미니즘 미술 분야 권위자이자 서울시립미술관 관장을 역임한 평론가 김홍희는 이렇게 평가한다. “데비 한의 작품은 서구 문화에 대한 동경과 성형산업의 성행, 문화적 상징 속에 드러나는 새로운 형태의 성차별주의, 왜곡된 자본주의 문화 현상과 젠더 위계를 진단하는 페미니스트 비너스인 것”이라고.

이준희 건국대 현대미술학과 겸임교수_ 미술대학을 졸업했지만 창작에서 전향해 몇 년간 큐레이터로 일했고, 미술 전문지 기자로 입사해 편집장까지 맡아 18년 8개월 동안 근무했다. ‘저널리스트’로 불리는 것보다 여전히 아티스트에 가까운 ‘미술인’으로 불리기 원한다.





[자료제공 :icon_logo.gif(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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