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하가 녹는 건 80만 년 역사가 사라지는 것 끝까지 빙하 곁에 머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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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유일 여성 빙하학자 신진화
급속한 지구온난화로 빙하가 사라지고 있다는 말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이를 자연의 위기로만 볼 수 없다. 빙하가 사라지는 것은 우리 기후의 역사를 잃어가는 것과 같다.
빙하는 단순한 얼음 덩어리가 아니다. 지구의 과거가 층층이 쌓인 ‘기후의 유언장’이자 수십만 년 전 대기를 고스란히 품은 ‘냉동 타임캡슐’이다. 길게는 약 80만 년에 이르는 시간을 기록한 이 얼음은 인류가 과거를 복원하고 미래에 대비할 수 있는 열쇠다. 빙하 외에 나뭇잎 화석의 기공, 해양 퇴적물 속 유공충의 동위원소로도 기후 변화를 추적할 순 있지만 간접적인 추정일 뿐 직접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은 빙하를 활용하는 것뿐이다.
빙하는 남극대륙이나 그린란드, 고산지대처럼 연중 기온이 0℃ 이하인 지역에서 만들어진다. 쌓인 눈이 녹지 않은 채 계속 압력을 받으면 눈도 얼음도 아닌 ‘펀(firn)’의 단계를 지나 얼음으로 변한다. 이때 대기 중에 떠돌던 먼지, 해염, 에어로졸 같은 미세 입자들이 얼음 속에 갇힌다.
빙하 속 공기를 빼내 실험 장비로 분석할 정도의 양을 모으면 과거 이산화탄소 농도를 복원할 수 있다. 이러한 연구는 1965년 프랑스 그르노블 빙하연구소의 클로드 로리우스 박사가 남극 아델리랜드에서 빙하를 시추하면서 시작됐다. 극한 환경에 놓인 그는 매일 밤 위스키 한 잔을 마시며 고단함을 달랬다. 그러다 위스키용 얼음이 떨어져 시추한 빙하를 떼어다 위스키에 넣는 순간 얼음 조각에서 방울이 터져나오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는 빙하 속에 대기가 담겼을지 모른다는 의문을 갖고 연구소에 돌아와 빙하 속 기체를 추출해 이산화탄소를 측정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빙하 코어(원통형 드릴을 이용해 빙하를 수직 방향으로 채취한 시료)’ 연구의 출발점이었다.
현재 국내에 이 분야 전문가는 대여섯 명이다. 그중 유일한 여성 빙하학자인 신진화 박사가 최근 에세이 ‘빙하 곁에 머물기’를 펴내고 기후위기를 경고하고 나섰다. 13년간 빙하 연구와 탐사 활동을 해온 신 박사를 만나 빙하 연구의 필요성과 빙하학자의 역할에 대해 물었다. 신 박사는 2023년 ‘그린란드 국제 심부 빙하 시추 프로젝트(EGRIP)’에 한국 대표로 참여한 과학자이기도 하다. 현재는 극지연구소 박사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빙하학은 어떤 학문인가?
지구과학의 세부 분야 중 하나다. 1960년대부터 시작돼 다른 학문에 비하면 매우 젊은 편이다. 나는 그중에서도 빙하 속에 포집된 공기방울을 모아 이산화탄소를 분석하고 고기후를 연구하는 일을 하고 있다. 빙하 코어라는 시료를 통해 데이터를 얻고 실험 결과를 바탕으로 빙하에 기록된 과거의 의미를 읽어내는 작업을 한다. 연구를 시작한 지는 12년쯤 됐다.
그런 연구가 없었다면?
기후가 어떻게 변해왔는지에 대한 정밀한 자료는 얻기 어려웠을 거다. 빙하의 장점은 눈이 계속 쌓이면서 아주 촘촘하게, 연속적인 기록을 남긴다는 것이다. 해양 퇴적물 같은 물질로도 기후변화를 연구할 수는 있지만 퇴적률이 낮기 때문에 정확한 데이터라기보단 ‘이 시기엔 대략 이런 기후였겠구나’ 정도의 추정만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빙하는 지구의 과거를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는 유일한 기록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전 세계 빙하학자들의 노력으로 80만 년간의 온실 기체 농도 변화, 온도 변화 등이 밝혀졌다.
빙하 시료는 어떻게 얻나?
세상에서 가장 극한 환경으로 들어가야 한다. 고도가 높고 세상에서 가장 춥고 건조하고 바람이 많은 부는 그린란드와 남극에 가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빙하학자들은 과거 기후와 환경의 비밀을 지닌 빙하를 얻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극 지역으로 향한다.
기체는 쉽게 날아가지 않나? 빙하 속에서 어떻게 추출하는지 궁금하다.
빙하 내부 압력이 워낙 높아서 기체가 방울 형태로 갇혀있다. 10~40g의 빙하 샘플을 진공 상태로 만든 통에 넣고 그 안에서 물리적으로 깨부숴 기체를 뽑아낸다. 철로 만든 바늘이나 구슬, 칼날 같은 걸 이용해 파쇄한다. 그렇게 꺼낸 공기방울을 가스 크로마토그래피라는 장치를 이용해 분석한다.
수십만 년 전 공기의 냄새는 어떤가?
혹시나 과거 대기의 냄새를 맡을 수 있을까 싶어 샘플에 코를 갖다댄 적이 있는데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아, 빙하 코어에 위스키를 따라 마신 적도 있다. 그냥 기분 내고 싶어서 해봤다. 특별히 다른 맛은 느끼지 못했고 코어링 기계가 깨끗하진 않아서 약간 찝찝했다(웃음).
빙하 샘플을 처음 만졌을 때를 기억하나?
길이가 1m 정도 원통형의 빙하 코어였다. 빙하가 쌓이던 당시에 날씨가 따뜻했는지 잠깐 녹았다가 다시 언 자국이 보이더라. 눈들이 층층이 쌓인 흔적들도 보였다. 고기 뼈를 자를 때 쓰는 기계톱으로 아주 작게 잘라 표면을 들여다보니 작은 공기 기포가 있었다. 그게 과거의 대기다. 빙하 표면을 손으로 문지르니 “타다닥” 소리가 나면서 공기가 터져나왔던 기억이 난다.
프랑스에서 박사과정을 마쳤다고. 어떤 연구를 했나?
가장 오래된 과거를 복원할 수 있는 ‘돔 시(Dome C) 빙하 코어’를 이용해 17만~13만 년 전에 발생한 두 번째 빙하기 이산화탄소 농도를 고해상도로 복원하는 프로젝트를 맡았다. 1년 동안 아침 8시면 영하 20℃ 냉동고에 들어가서 빙하 샘플을 잘라 실험실로 가져갔다. 매번 압박감을 느꼈다. 어렵게 시추해온 샘플을 내가 실수로 망가뜨릴까봐, 실험을 망쳐버릴까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연구자 입장에서 특히 어려운 부분이 있다면?
빙하에 남은 기록들은 아주 작은 오염에도 훼손될 수 있다. 청정실같이 진짜 깨끗한 곳에서 커팅 작업을 해야 하는데 이 과정이 힘들다. 또 장갑 재질 자체가 오염원이 될 수 있어서 최소한의 장비로 작업해야 한다. 면장갑 정도만 끼고 거의 맨손에 가까운 상태로 빙하 시료를 다룬다. 하루 종일 냉동고에서 작업하는 날은 손끝이 동상처럼 얼얼해지는 날도 있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빙하가 빠르게 소실되고 있다. 빙하학자가 느끼는 위기는 다를 것 같다.
빙하는 내륙에서 해안을 따라 흐르다 가장자리에서 깨져 없어지는 게 일반적이다. 그래서 무한히 생겨나는 건 아니지만 기후조건만 일정하면 일정한 크기와 두께를 유지할 수 있다. 문제는 기후변화로 인해 그 두께가 급속도로 줄어들고 있다. 2023년 EGRIP에 참여했을 때 러셀 빙하 앞에서 “쿵” 하는 굉음과 함께 빙상 일부가 무너지는 현장을 봤다. 사진으로 봤던 20년 전 러셀 빙하와는 너무 다르게 작아진 모습이었다. 이렇게 전 세계 많은 빙하가 기후변화로 사라지고 있다. 빙하학자에게는 ‘조선왕조실록’ 같은 역사책이 불타 없어지는 것과 같다. 생을 마감하는 빙하를 직접 봤다는 신기함과 기후위기의 실체를 눈앞에서 본 공포가 동시에 밀려들었다.
빙하학자라고 해서 누구나 빙하 시추 현장을 밟는 건 아니다. 시추 기간이 제한되고 기술자가 우선적으로 배치되기 때문에 신 박사처럼 데이터를 분석하는 연구자에게 주어지는 기회는 드물다. 시추 전문가를 중심으로 연구원이 보조하는 형태로 시추 현장 팀이 꾸려진다. 육체노동이 필요한 데다 극한의 고산병 등을 이유로 여성 연구자는 배제되는 경우도 있다는 게 그의 얘기다. 그는 빙하학도가 되고 12년 만인 2023년 처음으로 빙원을 밟았다. 그해 6월 14일부터 4주간 그린란드에서 진행된 EGRIP 현장이었다.
마침내 빙상 위에 섰을 땐 어땠나?
비행기 꼬리 쪽 문이 열리자마자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세상이 온통 흰색과 파란색뿐이었다. 마치 천국에 도착한 것 같았다. 그 순간 한기가 확 끼쳐오는데 상상했던 풍경과 전혀 달랐다. 땅을 밟는 느낌도 달랐다. 방한화를 신은 채 얼음 위, 눈 위를 뒤뚱뒤뚱 걸어다녔다. 평소에 쓰지 않았던 다리근육을 움직이니 통증이 느껴질 정도였다. 육지에 돌아왔을 때 걷기 연습을 하는 아이처럼 걷는 연습을 다시 해야 했다.
해발고도는 어느 정도였나? 고산병 증세는 없었나?
캠프가 해발고도 약 2700m에 있어서 높은 고도에 익숙한 사람들도 경미한 통증을 느꼈다. 내 경우에는 나흘째 되던 날 갑자기 토할 듯이 어지럽기 시작했다. 고산병 때문에 중도 포기해야 하는 일이 생길까봐 이를 악물고 버텼다. 물을 많이 마시고 잘 자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증세가 심하지 않아서 예정대로 머물 수 있었다.
세상과 단절된 자연에서 지내는 게 겁날 만도 한데.
초반에는 무서웠다. 현장으로 떠나기 전에 크레바스(빙하 표면에 깊게 생긴 틈) 등에 대한 안전교육을 받았는데 듣고 나니 더 겁이 났다. 실제로 북극곰이 두 번이나 캠프 근처까지 와서 모든 사람이 대피한 일이 있었다. 곰이 달리는 속도가 워낙 빨라서 곰을 봤다 하면 끝이라는 말이 있다. 한 캐나다 보스는 총기 소지가 가능해서 늘 총기를 옆에 두고 작업했다. 계속 눈을 파야 해서 바깥 상황을 모르니 나한테 계속 “곰 있는지 확인 좀 해줘”라고 하더라.(웃음)
힘들게 얻은 빙하로 과거를 연구하는 일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인가?
우리가 살지 않았던 시대의 대기 정보를 알아내고 왜 이렇게 바뀌었는지 추정해나가는 과정이 정말 재밌다. 마치 사건의 원인을 찾아가는 셜록 홈즈가 된 기분이다. 빙하 속 공기방울은 육안으로도 볼 수 있다. 그래서 더 묘하다. 19만 년 전에 만들어진 빙하를 손에 들고 있으면 정말 타임머신을 타고 19만 년 전으로 여행을 떠난 듯한 기분이 든다.
앞으로도 빙하 곁에 머물고 싶다고?
연구자로 살아가고 싶다. 우리가 가진 기후변화 데이터는 대부분 산업혁명 이후의 것이다. 그보다 오래된 시기의 기후를 알려면 과거의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바로 빙하다. 미련이 남지 않을 때까지 끝까지 연구하고 싶다.
이근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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