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가 침묵하던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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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길 한국체육대학교 교수 |
스포츠를 향해있는 부정의 그림자는 꼬리가 길다. 지난 몇 년, 대한민국에서 스포츠는 불공정의 대명사였고 혁신의 대상이었다. 그러한 대한민국에서 스포츠는 움츠린 채로 자기방어에 급급했다. 누명을 쓰고도 스포츠를 향해있는 오해와 편견에 침묵하면서, 이 침묵이 길어지면 역사는 스포츠를 이렇게 기록할 것이다. “2020년대 대한민국 스포츠의 최대 비극은 스포츠를 향해 있는 악한 사람들의 거친 아우성이 아니라, 선한 사람들의 소름끼치는 침묵이었다.” 스포츠는 무엇을 침묵하고 있었을까?
개인적으로 많은 선수를 만나왔다. 한국체육대학교에 근무하면서 대학선수의 평범한 일상을 매일 만나고, 대한축구협회와 올림픽대표단 멘탈코치로 월드컵이나 올림픽 원정에 나서는 대표선수나 지도자의 긴박함을 만나왔다. 때로는 이제 막 운동을 시작한 초등학교선수와 부모의 막연함을 만나기도 한다. 대한민국 스포츠의 성장 이야기는 언제부터인가 스포츠와 운동선수를 향해있는 혁신과 공정의 거친 아우성으로 대체되고 있다. 스포츠와 운동선수를 향한 거친 아우성이 대한민국에서 스포츠를 회피대상으로 낙인해버릴지도 모른다. 대한민국 스포츠 성장의 이야기도, 거친 아우성도 모두 대한민국 스포츠 이야기다. 성장과 아우성에 묻히기에는 너무 아름다운 스포츠 이야기도 포함해.
아름다운 스포츠 이야기
멘탈코치로 20여 년 선수를 만나오면서 침묵하기에는 너무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나곤 한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언제나 나를 돌아보게 하였다. 올림픽 은메달리스트 체조선수를 만났다. 이 선수는 그 더운 8월에도 두꺼운 장갑을 끼고 다닌다. 운동에 중요한 손을 보호하기 위해, 내 삶에 그토록 진심인지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국제대회 금메달리스트 배드민턴선수를 만났다. 이 선수는 경기 후 상대선수 경기운영을 분석해 기록한다. 다음 경기에 활용하기 위해, 내 목표를 치밀하게 준비하고 있는지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쇼트트랙선수를 만났다. 그 힘든 인터벌 트레이닝을 하루에 네 번 하고도 지도자가 개인운동을 추가시키면 지도자에 고마워한다. 내 운동시켜 주셔서, 작은 불편에도 불평하는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한국체육대학교에 근무하면서 많은 지도학생을 만났다. 2008 베이징올림픽을 끝으로 은퇴하고 대학원 공부를 시작해 5년 동안 하루 16시간씩 공부해 박사학위를 받은 대학원생이 있다. 공부를 시작하고 3년쯤 지났을 무렵 왜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는지 물었다. “교수님, 제가 운동하면서 세계 최고가 되려면 얼마나 노력해야 되는지 알았어요. 제가 고등학교 때부터 대표선수로 공부는 초등학교까지가 전부인데, 매일 공부만 하던 사람들만큼이라도 하려면 이렇게 해도 부족하다는 걸 잘 알아요.” 그 대답에 가슴이 뛰었다. 운동선수의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에 침묵한 나 역시 스포츠를 향하는 거친 아우성의 방조자이다. 운동선수의 깨달음은 침묵으로 존재하면서 다른 일상으로 확장된다.
스포츠 참여 경험이 만든 심리자본
선수는 스포츠에 참여하면서 극상의 경험부터 트라우마까지 심리적 스펙트럼을 경험한다. 그리고 심리적 참여 경험의 스펙트럼은 단기에서 장기까지 기억되고 영향을 미친다. 운동 참여 경험의 트라우마는 거친 아우성으로 익숙하니 침묵을 들여다보자. 필자는 축구대표팀 멘탈코치로 2014 인천아시안게임에 참가했다. 대회 준비를 위한 소집훈련과 대회를 거치는 동안 선수의 마음 변화를 관찰하였다. 대회 후 수집한 자료로 메가스포츠이벤트 참여로 인한 대표선수의 심리자본 변화를 연구했다. 연구결과, 4주 소집훈련과 2주 아시안게임 기간, 아시안게임 동메달 획득 후 마음의 변화 양상은 달랐다. 팀이나 자신의 경기력 지각, 지도자 신뢰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하였다. 반면 자신의 미래를 보는 태도나 운동을 잘하기 위한 스스로의 조절과 노력, 자신감이나 집중력 같은 심리기술에는 변화가 없었다. 결국 6주 합숙과 아시안게임 성취는 선수 개인의 외부 지각은 변화시켜도 선수 내면을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내면의 변화는 없지만 외부 요인 평가와 해석 관점의 긍정적 변화는 궁극적 내면 변화의 전제 과정이다.
스포츠는 단기적으로 선수의 내면을 변화시키지는 못하지만, 기간이 길어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필자는 1976 몬트리올올림픽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여자배구선수들에게 올림픽과 운동선수 경험이 40년 동안 어떤 방식으로 일상에 영향을 미쳤는지 연구했다. 연구결과, 올림픽메달 획득과 운동선수 경험은 은퇴 후 개인의 일상에 성실한 태도, 감사하는 마음, 도전으로 성취 경험, 관계 열쇠로 유연함을 형성하는 삶의 자원으로 전이된다. 은퇴 이후 60대 중반에 이르는 동안 운동선수 경험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운동선수로 만들어진 성실한 태도는 은퇴 후 자신의 신념이나 정체성에 영향을 미쳐 매사에 최선을 다하게 했고, 최선은 성취의 기쁨으로 이어졌다. 둘째, 운동선수로 올림픽 성취에 감사하게 되었고 감사하는 태도는 은퇴 후에도 이어져 삶을 풍요롭게 하는 자원이 되었다. 셋째, 운동을 하면서 내면화한 동료에 대한 배려와 희생, 협력은 은퇴 후 인간관계의 폭과 깊이를 확장하는 매개가 되었고 건강한 사회적 관계의 토대가 되었다. 이렇게 개인의 운동선수 경험은 장기적으로 주변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배려하고 때로는 협력하면서 노력하는 태도의 자원이 된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하지만 지금은 어려운 삶을 견뎌가는 선수 이야기는 운동선수를 향해있는 거친 아우성이다. 그리고 이 거친 아우성은 스포츠를 향한 사회적 편견을 강화한다. 예능프로그램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선수들의 거침없는 소탈함에 미소 짓곤 한다. 여기에는 꾸밈이나 속임이 없고, 프로그램이 아닌 비춰진 일상은 묵묵하며 성실하다. 운동선수 생활을 하면서 깨닫는 것들이다. 그리고 필자가 세계적인 경기력을 보유했던 제자들에게 보아왔던 심성이다. 스포츠에 참여하면서 누구나 배우고 얻게 되는 심리자본이다.
고통에서 배우다, 외상 후 성장
스포츠로 아름다운 경험만을 하는 것은 아니다. 선수는 경기에서 극한에, 훈련에서는 더 빈번하게 설계된 극한에 직면하곤 한다. 물론 신체적 한계의 극한은 운동을 중지하면 사라진다. 문제는 심리적 극한이다. 필자는 선수의 심리적 극한과 극한을 거치면서 일어나는 변화를 연구했다. 연구결과, 선수는 팀 동료나 지도자와 갈등, 정서적 고립이나 자신감 상실, 신체적 부상, 이외의 패배로 심리적 극한에 이른다. 심리적 극한에 이른 선수는 무력감, 압박감, 상실감, 적개심 등과 같은 부정정서를 경험한다. 운동선수의 심리적 극한 경험이 여기까지라면 운동선수 경험은 불행이다. 다행스럽게도 선수들은 심리적 극한에 이어지는 부정정서 속에서도 사회적 지지를 추구하고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극한에 심리적 적응을 거치면서 선수는 정서를 조절하는 심리적 도약을 경험하고 사회적으로 성숙해간다. 이 과정은 경기력 향상으로 이어지고 선수는 심리적 극한을 통해 성장할 수 있음을 배운다. 운동선수의 외상 후 성장이다.
운동선수로 외상 후 성장 경험은 일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축구선수 이야기다. “중3 때 후반전 중반까지 0:2로 지고 있던 경기에서 간절히 이기고 싶었고, 정말 열심히 뛰어서 3:2로 역전한 경험이 있다. 그 뒤로는 어떤 경기도 끝날 때까지 했고, 운동을 그만두고 다른 일도 될 때까지 포기하지 않게 되었다.” 스포츠에서 의외의 결과가 펼쳐지는 상황을 마주하는 선수의 당혹감과 팬의 당혹감은 결이 다르다. 선수는 경기에서 너무도 절박하다. 그리고 그 절박함의 잔상은 경기가 끝나고 이어지기도 한다. 스포츠는 패하는 방법을 배우는 활동이다. 상대와의 경쟁에서 패인을 분석하고 치밀하게 준비해 다음 경기에서 같은 상대를 만났을 때 같은 방식으로 패하지 않는다. 패하는 방법을 배우면서 성장한 때문이다. 경기 중에도 외상 후 성장과정이 진행되고, 경기 중 강렬했던 외상 후 성장경험은 생활기술로 삶의 심리적 자원이 되기도 한다. 스포츠를 통해 경험한 외상 후 성장은 일상의 심리적 한계에서 심리적 백신으로 기능한다.
스포츠의 그림자 운동, 운동의 그림자 스포츠
개인적으로 20대까지 승리의 대상이었던 스포츠가 50대 중반에 이르면서 건강의 매개로 재정의되고 있다. 운동이 스포츠이고 스포츠가 운동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개념적으로 확연히 구분된 운동과 스포츠를 애초에 나눌 필요가 없었던 개념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스포츠가 승리의 대상이라면 이제는 할 수 없다. 축구선수로 90분 경기에서 10km 가량 가까이 달리던 20대의 나는 흔적도 없고, 지금은 90분 경기가 불가능할뿐더러 축구하기 자체가 두렵다. 학생들과 부딪히면 뼈가 울리는 통증이 있고 무릎도 아프다. 하지만 체력은 저하됐어도 기술과 전술은 건재해 20대들과 축구장에서 함께한다. 한발이라도 더 뛰기를 목표로.
스포츠로 운동할 수 있고 운동으로 스포츠할 수 있다. 운동의 성공적 노화 기여를 연구한 필자의 연구결과, 운동은 노년기 신체, 사회, 심리적 건강과 개인적 성장에 포괄적으로 기여한다. 신체적 건강은 활동량 유지와 성공적 노화의 전제이다. 노년기 운동은 체력을 유지하고 신체적 컨디션을 개선해 신체적 건강에 기여한다. 심리적 건강은 생각과 행동의 원천이다. 노년기 운동은 긍정정서를 유발해 도전적 태도와 활력을 유지시켜 심리적 건강에 기여한다. 사회적 건강은 노년기 외로움과 연결된다. 노년기 운동은 부부 유대감 회복과 자녀와 상호작용을 촉진하는 동시에 적극적 사회 참여의 계기로 사회적 건강에 기여한다. 개인적 성장은 노년기 생애 통합에서 중요하다. 노년기 운동은 삶의 의미를 회복하고 적극적 자기계발의 매개로 개인적 성장에 기여한다. 노년기 스포츠 참여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예방적 복지이다.
오즈의 마법사를 좋아한다. 도로시의 집, 허수아비의 지혜, 양철나무꾼의 심장, 사자의 용기까지, 그들은 소유하면서 갈망한다. 다만 협력하면서 눈먼 소유를 갈망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승리를, 건강을, 즐거움을, 소통을 위한 수단으로 스포츠라면 이미 스포츠가 아니다. 스포츠 속에는 이미 승패의 교훈, 건강과 즐거움, 그리고 소통 너머의 가치와 삶의 지혜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스포츠 성장의 이야기와 스포츠를 향한 거친 아우성 사이에 숨겨진 스포츠의 아름다운 침묵이다. 스포츠는 스포츠로 충분히 아름답다.
* 한국스포츠정책과학원이 발행하는 <스포츠 현안과 진단> 기고문 입니다.
* 이번 호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과학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님을 밝힙니다.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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