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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일합니다! 근로자 대기실이 당당한 출퇴근을 선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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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보라매공원 현장근로자 대기시설
서울 동작구 보라매공원이 그렇게 큰 줄 미처 몰랐다. 익숙하지만 딱히 보라매공원에 와본 기억은 없다. 동작구나 관악구를 오갈 때면 종종 지나게 되는 랜드마크라 익숙함이 불러온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오늘의 목적지가 보라매공원 안에 있다고 들었기 때문에 상세주소까지 챙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거기서부터 잘못된 판단이었다. 택시를 타고 보라매공원에 가달라고 하니 택시기사가 어느 쪽에서 세워줄까를 물었다. 어느 쪽이라니? 공원이 거기서 거기겠지 생각하며 “아무 데나 내려달라”고 했다.
그렇게 내린 곳이 보라매병원 방향의 동문이었다. 내리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당황했다. 입구에 들어서니 서울대공원이 연상될 정도로 넓은 잔디광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공원을 가로지르는 길들도 고속도로처럼 넓어 보였다. 상상했던 아기자기한 도심 공원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제야 보라매공원 부지가 공군사관학교였음이 떠올랐다. 멀리 전시용 비행기도 보였다. 부랴부랴 길찾기 애플리케이션에 상세주소를 입력했더니 목적지가 수없이 찍혔다. 공원이 워낙 넓은 탓이었다. 그때 화단에서 마른 풀을 뽑던 아주머니가 어디를 찾느냐고 물었다. 현장근로자 대기시설이라 답하니 “마침 교대시간이라 잘됐다”며 바지에 묻은 흙먼지를 탁탁 털어내고는 자신을 따라오라고 말했다.
보라매공원 현장근로자 대기시설은 정문 방향에 있었다. 동문에서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 했다. 덕분에 길을 안내하는 아주머니를 대상으로 취재를 할 수 있었다. 아주머니는 “전국 최초의 현장근로자 휴게공간으로 신축된 건물이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하려고 한다”고 했더니 반색을 하면서 “참 고마운 건물”이라고 말했다.
“경력도 없이 처음 지원한 데가 여기 보라매공원이었어요. 직장 다니는 딸아이가 내가 공원으로 일을 나간다니 말렸어요. 내가 고생하는 것도 싫고 엄마가 청소일 한다고 무시당할까봐 걱정이 됐겠지요. 하루는 오지 말라는데 기어코 날 데리러 말도 없이 왔더라고요. 근데 이 건물에서 내가 나오니까 ‘와, 건물 좋다! 엄마 여기서 일해?’ 하더라고요.(웃음)”
보라매공원에서 기간제근로자로 청소일을 하고 있는 아주머니는 건물이 고마워보기는 그날이 처음이었다고 말했다. 사전에 시설 담당자로부터 근로자들의 사생활을 보호해달라고 단단히 요청받은 터라 감사 인사만 하고 퇴근하는 아주머니를 보내드렸다.
2016년 완공된 대기시설은 보라매공원 현장근로자들이 쉴 수 있는 독립 휴게공간이다. 현장근로자들을 위한 전용 휴게시설로는 전국 최초다. 이곳은 지상 2층, 연면적 468.5㎡ 규모로 기간제근로자와 공공근로자가 각각 남녀별로 쉴 수 있게 건설됐다. 탈의실과 샤워실, 개별 수납함 등의 편의시설을 갖췄고 가변형 벽체를 설치해 필요에 따라 현장근로자들이 모일 수 있도록 했다. 서울시는 공사 과정에서 현장근로자들의 의견과 조경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았다고 한다.





전국 최초 현장근로자 전용 휴게시설
몇 년 전 휴게공간이 없어 화장실 마지막 칸에서 도시락을 먹는 청소부의 사진이 한 커뮤니티에 올라온 일이 있었다. 그 사진은 삽시간에 전 커뮤니티로 퍼지며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후 근로자들의 열악한 휴게 환경으로 인한 사건·사고가 지속적으로 발생하며 사회문제로 대두했다. 2021년 6월 경기 화성시의 한 고등학교 급식실 휴게소에서 벽에 달린 옷장이 무너져 조리사 한 명이 하반신 마비가 되는 사고가 있었다. 그해 8월에는 서울대 청소근로자가 교내 휴게실에서 사망한 사건이 있다. 모두 열악한 휴게공간이 화근이었다.
보라매공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간 보라매공원 현장근로자들이 사용해온 휴게공간은 2010년 보라매병원 재단장 공사 때 사용한 현장사무소 가설건물이었다. 외관상 문제뿐 아니라 냉난방 등 불편함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서울시 서부공원여가센터(옛 동부공원녹지사업소)는 현장근로자들의 복지를 개선하기 위해 전용 휴게공간을 신축했다. 당시 신축 담당자는 완공에 앞서 “이와 같은 배려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길 바란다”는 발언을 전하면서 훈훈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보라매공원 현장근로자 대기시설을 둘러봤다. 보라매공원은 크고 작은 언덕들이 공원 내에 있는데 대기시설 역시 그 언덕 중 하나가 끝나는 지점에 있었다. 이는 건물 부지를 통해 공원 내 산책로가 시작되며 그 밖의 여러 길이 이어지는 곳임을 뜻한다.
그래서일까? 설계자는 1층 공간을 보행자들에게 양보하기 위해 근로자들의 휴식공간을 필로티 구조를 적용해 위로 들어올렸다. 그리고 지면 위에 창고들을 분산 배치했다. 기둥이 아닌 창고가 받쳐주는 형상이라 언덕의 땅이나 바위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 같다. 노출 콘크리트 외벽도 이 같은 분위기에 한몫하고 있었다. 공원을 방문한 이용객들은 건물 1층을 지나 자연스럽게 산책로 등으로 이동하게 돼 있다. 근로자들의 휴게공간을 구석진 곳에 동떨어지게 만든 것이 아니라 공원의 중요한 일원으로 끌어안았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서면 부채꼴 모양으로 휘어진 건물이 만들어내는 큰 중정이 한눈에 들어온다. 건물 옆의 큰 언덕이 중정을 가득 채우고 있다. 준공된 지 7년이 지나 낡고 닳은 부분도 보였지만 노출 콘크리트의 세련됨과 수직 루버로 감싼 건물은 여전히 멋졌다. 곳곳에 놓인 근로자들의 흙 묻은 운동화, 청소도구 등이 현장근로자 전용 휴게공간이라는 영역 표시를 분명히 하고 있었다.





멋진 건물이 높인 것은 근로자의 자존감
우리나라 근로기준법은 근로시간 4시간당 30분 이상, 8시간당 1시간 이상의 휴게시간을 보장하고 있다. 이처럼 휴게시간이 법적으로 명확하게 규정돼 있는 반면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휴게공간에 대한 기준은 모호했다. 안전이 담보되지 않은 휴게공간은 앞서 말한 사건·사고처럼 오히려 근로자들을 위험에 처하게 한다.
비상구 문 뒤 계단이나 화장실의 마지막 한 칸, 언제 뭐가 떨어질지 알 수 없는 창고, 어둡고 좁은 공간에서 종이박스를 깔고 쉬고 있는 근로자들을 우리는 익숙한 풍경으로 지나쳤을지 모른다. 창문 없는 지하실이나 자동차 매연 가득한 주차장 한 편에서 밥을 먹고 쪽잠을 자는 근로자들을 외면한 적도 있을 것이다. 길 안내를 해줬던 기간제근로자 아주머니의 딸 역시 그런 걱정으로 엄마를 찾아왔을 것이다.
보라매공원 현장근로자 대기시설은 건물 외관만으로도 그런 걱정을 한순간에 덜어준다. 단순히 외관과 시설이 좋아서만은 아니다. 근로자를 배려하는 마음 위에 건물이 서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배려가 전국적으로 퍼져나가길 바란다”는 건물 신축 담당자의 7년 전 바람은 이제 현실이 되고 있다.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으로 2022년 8월 18일부터 사업 종류와 상관없이 휴게시설을 설치하는 것이 법적으로 의무화된 데 이어 올해 8월부터 50인 미만 사업장까지 확대됐다. 20인 이상 50인 미만 사업장, 건설업의 경우 20억 원 이상 50억 원 미만 현장은 앞으로 휴게시설을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하며 10인 이상 20인 미만 사업장 역시 전화상담원과 청소원, 경비원 등 7대 직종에 해당하면 휴게시설을 마련해야 한다. 현장근로자들이 당당하게 “여기서 일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공간을 전국 곳곳 어디서나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강은진 객원기자


[자료제공 :icon_logo.gif(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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