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치는 인생은 비겁하다 전 부치다 보면 언젠가는 복이 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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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외식을 했다. 식사를 마친 후 자매끼리 화장실에 갔는데 아뿔싸! 두루마리 휴지가 없었다. 다행히도 내 가방에 휴지 대여섯 장이 들어 있었다. 카페에서 점원이 챙겨준 것을 모아둔 덕이었다. 사람이 넷인지라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위기는 모면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큰언니가 돌연 소리쳤다. “난 이걸로 안돼! 큰 거란 말이야!” 나는 화장실 칸막이벽으로 들어가 소사를 치르며 외쳤다. “아니, 그런 건 집에서 해결하고 나와야지 무슨 오후 일곱 시에 큰 거 타령이야, 타령은!”
그때 바깥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일행이 화장실에 들어온 것이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나는 손을 씻는 둥 마는 둥 하며 화장실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그런 내 모습을 본 막냇동생이 배를 잡고 웃었다. “공중화장실에서 그렇게 큰소리로 말하면 어떡해? 아우, 아줌마 같아!”
동생의 말은 틀려도 한참 틀렸다. 나는 아줌마 같은 게 아니다. 그냥 아줌마다. 아가씨는 카페에서 쓰다 남은 휴지를 가방에 챙겨두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자매들은 그날 저녁 내내 깔깔 웃으며 화장실에서 허둥지둥 대던 나를 흉내 냈다. 그런데 나는 그 상황에 짜증이 일기는커녕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어차피 아줌마가 되어야 한다면 웃기는 아줌마가 되고 싶다고 생각해왔는데 자매들을 박장대소하게 했으니 꿈을 이룬 셈 아닌가. 개그우먼도 아니면서 남들을 웃기려 드는 이유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행복한 삶을 살고 싶어서”라고 대답하겠다. 사람들이 나를 향해 웃으면 나 역시 웃음이 나고, 웃음을 웃으면 절로 행복해진다. 이런 내가 본보기로 삼는 사람이 있다. 그건 바로, 불쾌하면서도 유쾌한 글을 쓰기로 유명한 일본 작가 ‘사노 요코’다.
죽음을 앞둔 한 작가의 자세
사노 요코가 죽음을 앞두고 써내려간 수필인 ‘사는 게 뭐라고’로 그녀의 글을 처음 접했다. 육십 대 중반 무렵 그녀에게 유방암이 발병했다. 수술을 받았지만 안타깝게도 뼈에 암이 재발했다. 항암제도 맞지 않고 연명치료도 원하지 않은 그녀가 의사에게 한 유일한 부탁은 일상생활을 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책 전반에 걸쳐 전한다. 그녀의 글이 불쾌한 이유는 버석버석한 노년의 삶을 생기 넘치게 포장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사노 요코의 글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녀는 시한부 선고를 받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재규어 대리점에 들어가 차를 사고 한국 드라마 ‘겨울연가’를 보다가 ‘욘사마’에게 푹 빠져 촬영지인 남이섬까지 찾아간다. 박력 넘치는 돌파구를 찾는 할머니의 모습에 폭소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떨 때는 우울해하고 또 어떨 때는 비탄에 잠기기도 하지만 그녀는 셋 중 하나는 암으로 죽는다고 말하며 덤덤한 태도를 유지한다. 죽음이라는 낯선 일 앞에서 그녀가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마작 채널을 시청하던 그녀의 모습에서 힌트를 엿보았다. “뻔히 질 줄 알면서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다. 포기해서는 안된다·도망치는 인생은 비겁하다. (중략) 프로는 먼 곳을 바라본다. 패 건너편의 희망을. 인생은 도중에 무엇이 있을지 모른다·눈앞의 욕망에 달려들어서는 안된다·먼 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며 현재를 성실히 살아가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사노 요코는 뻔히 죽을 줄 알면서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다. 비겁하게 포기하지 않고 도망치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렇게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가다가 시한부 선고를 받은 지 삼 년 만에 눈을 감는다.
자유분방한 글과 순수한 그림
기계치인 그녀는 원고를 육필로 썼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썼다, 지웠다, 잘랐다, 붙였다 하며 징그럽게 다듬은 요즘 사람들의 글에서는 볼 수 없는 자유분방함이 느껴진다. ‘일정한 형식을 따르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쓴 산문 형식의 글’이라는 수필의 정의에 꼭 부합하는 것이다. 다만 여러 이야기가 두서없이 튀어나오다 보니 흐름을 놓치기도 쉽다. 1938년 그것도 일본에서 태어난 할머니의 이야기인 탓에 그녀가 말하는 풍경이 선뜻 떠오르지 않는 점도 다소 아쉽다. 낫토 위에 고명으로 얹는다는 ‘양하’가 무엇인지, 그녀가 데이트해보고 싶다는 정치인 ‘하마다 고이치’는 어떤 생김생김을 지녔는지, 일본 사람들이 전원생활을 즐긴다는 ‘가루이자와’는 또 어떤 곳인지 나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만일 나와 같은 어려움을 겪는 독자가 있다면 ‘요코 씨의 말’을 추천한다.
일본 공영 방송사 NHK는 사노 요코가 전 생애에 걸쳐 발표한 작품 중 핵심 문장을 엄선해 ‘기타무라 유카’의 그림을 붙여 낭독하는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시청자들은 눈시울을 붉혔다가 시원하게 웃기도 하며 삶을 살아갈 힘과 용기를 얻었다고 한다. ‘요코 씨의 말’은 이 방송을 책으로 엮은 작품이다. 만화책과 동화책의 중간쯤이랄까? 글 서너 줄에 그림 하나가 곁들여져 있어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 그림은 아이가 그린 것처럼 순수하지만 디테일이 살아 있어 일본의 풍경을 살피기에 충분하다. ‘사는 게 뭐라고’의 백미인 한류 열풍 에피소드가 실려 있음은 당연지사다. 일본인 일러스트레이터의 시각으로 그린 배용준과 최지우의 얼굴을 마주하면 웃음이 터진다. 이 재미있는 시리즈는 무려 다섯 권에 걸쳐 이어진다. 긴긴 추석 연휴, 하루에 한 권씩 읽어 보면 좋지 않을까.
책 따위 읽을 여유 없다고 볼멘소리할 사람이 많을 줄 안다. 고향에 내려가느라 꽉 막힌 도로 위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도, 기름 지글지글 끓는 프라이팬 앞에 앉아 전을 부치고 먹지도 않을 송편을 몇 소쿠리씩 빚어야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것뿐이면 다행이지. 어르신들의 잔소리를 온몸으로 견뎌내다 보면 몸져눕기 십상이다. 뉴스에서는 명절 때마다 최대 인파가 인천국제공항에 몰렸다고 호들갑을 떠는데 어째서 우리는 그 안에 포함되지 않는 것일까. 그들 틈에 스리슬쩍 섞여 먼 나라로 도피하고 싶지만 육신은 큰집에 묶여 있으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럴 때는 사노 요코의 말을 떠올리자. 도망치는 인생은 비겁하다. 프로는 먼 곳을 바라본다. 현재를 성실히 살아가며 프로답게 전을 부치다 보면 조상께서 우리 앞날에 복을 내려주실지도 모른다.
이주윤
여러 작가의 문장을 따라 쓰다 보니 글쓰기를 업으로 삼게 됐다. ‘더 좋은 문장을 쓰고 싶은 당신을 위한 필사책’, ‘요즘 어른을 위한 최소한의 맞춤법’, ‘요즘 어른을 위한 최소한의 문해력’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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