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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정상 지킨 39세 비보이 “도 닦듯 춤 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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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불 비씨원 월드 파이널’ 세 번째 우승 홍텐
10월 22일(한국시각) 프랑스 파리에서는 브레이킹의 새 역사가 쓰였다. 세계 최고 권위의 일대일 브레이킹 배틀 ‘레드불 비씨원 월드파이널 2023(이하 비씨원)’ 결승에서 이 대회 두 번째 최다 우승자가 탄생한 것이다. 주인공은 대한민국의 비보이 홍텐(HONG10·본명 김홍열)이었다. 그는 심사위원 5인의 만장일치로 세계랭킹 1위 캐나다의 필 위자드를 꺾었다. 스물두 살이던 2006년, 스물아홉 살이던 2013년에 이은 세 번째 우승이다. 두 번째 우승 후 꼭 10년 만에 다시 챔피언 벨트를 들어올린 그는 서른아홉 살이 됐다. 이번 결승 상대와는 열두 살 차로 참가자 중 가장 나이가 많았다. 더욱이 그의 우승은 2022 항저우아시안게임 참가 직후에 이뤄진 것이라 더욱 의미가 컸다. 브레이킹이 아시안게임 정식종목으로 처음 채택된 올해 대회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고 아쉬움을 드러낸 그였다. 홍텐은 결승에서 일본의 시게킥스에게 1대 2로 패해 준우승했다. 비씨원 우승은 정상을 향한 갈증을 털어내기에 충분했다.
홍텐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유명한 비보이다. 열여덟 살이던 2002년, 팀으로 참가한 세계 최대의 브레이킹 대회 ‘UK 비보이챔피언십’과 ‘배틀 오브 더 이어(BOTY)’에서 연달아 우승하며 일찍이 이름을 알렸다. 이후 20년간 정상의 자리를 놓치지 않는 그를 향해선 끊임없이 도전장이 날아들었다. 대만 비보이 해리케인이 콜아웃(상대가 먼저 대결을 제안)해 무려 35라운드를 전승으로 이긴 배틀, 홀로 10명의 미국 비보이를 상대로 각각 10라운드, 20라운드를 치른 경기는 두고두고 회자된다. 그에게 ‘브레이킹의 고트(GOAT·특정 분야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을 일컫는 말)’라는 찬사가 따라다니는 이유다. 그러나 정작 스스로는 ‘세계 1등’이라는 타이틀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는 “우승의 영광은 잠시다. 경기가 끝나면 모두가 같은 자리로 돌아와 새로운 도전을 이어갈 뿐”이라고 이야기했다.
홍텐을 만났다. 시상대에서 내려와 다시 연습실 바닥에 선 그의 스텝은 올림픽을 향해 있었다. 브레이킹은 아시안게임에 이어 2024 파리올림픽에서도 정식종목으로 채택됐다. 홍텐은 “누구보다 많은 나이로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되겠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거리의 춤’이 올림픽 종목으로 진화하는 동안 살아 있는 브레이킹의 전설은 또 다른 역사를 써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다.



비씨원은 비보이들의 꿈의 무대다. 그런 대회에서 세 번이나 우승한 기분이 어떤가?
매년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비보이 16명이 비씨원 무대에 모인다. 출전 자체가 어려운 대회다. 그런데 세 번이나 우승을 했다니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사실 아시안게임이 끝난 뒤 번아웃(탈진 증후군)이 왔다. 모든 걸 쏟아부은 탓이다. 비씨원은 아시안게임 2주 뒤에 열렸다. 내겐 일주일의 시간이 있었지만 연습을 제대로 하지 못할 만큼 지쳐 있었다. 그저 도전자의 마음으로 참가했다. 비씨원에는 누구보다 많이 출전했기에 홈그라운드처럼 느껴졌고 왠지 긴장도 하지 않았다. 즐기는 마음으로 임한 것이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

2000년대·2010년대·2020년대에 한 번씩 우승을 했다. 각각의 의미가 다를 것 같다.
첫 우승을 하기 전까지 굉장히 많은 대회에 나갔는데 번번이 2등을 했다. 한계를 느꼈다. 그러다 우승을 하니 다 여기까지 오기 위한 과정이었구나 싶었다. 그런데 그 후로 다시 성적이 떨어졌다. 결승은커녕 1회전에서 탈락하기도 했다. 더욱이 2016년 대회는 역대 우승자들이 겨루는 형식이었기에 아무도 나에게 기대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열린 대회라 그저 열심히 하자는 생각으로 했는데 우승했다. 그 뒤론 솔로 배틀 대회는 피했다. 워낙 체력적으로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몇 년 사이 무제한 배틀을 많이 한 덕에 체력이 굉장히 좋아졌고 다시 참가할 기회가 생겼다. 앞서 말했듯 우승에 대한 부담감까지 덜어낸 덕에 세 번째 우승까지 하게 됐다. 네 번째 우승에 도전할 생각은 없다. 비씨원은 정말 힘들다(웃음).

이번 대회는 2024 파리올림픽의 전초전 성격도 있었다.
주최 측은 올림픽을 염두에 두고 비보이 선발에 굉장히 신경 썼다. 세계랭킹이 높은 이들은 물론 랭킹과 상관없이 실력이 뛰어난 비보이들을 모았다. 그들 사이에서 우승을 하니 올림픽도 해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하지만 성격이 다른 올림픽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있을지에 대한 부담감도 동시에 든다.

올해 아시안게임에 참가한 경험에 비춰볼 때 스포츠로서 브레이킹은 다른 점이 있나?
선수 입장에서 스포츠로서 브레이킹은 재미가 덜한 것이 사실이다. 브레이킹은 힙합문화에서 비롯된 것이고 자유로움이 큰 특징이다. 제도 안으로 들어오니 일정한 형식에 맞춰야 하는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다. 경기 운영 방식이나 심사 방식은 더 개선해나가야 한다. 반면 브레이킹의 저변을 넓히는 차원에선 제도권 스포츠로 편입된 것이 매우 긍정적이다. 비보이들이 보다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발판이 만들어졌다.

아시안게임에서 은메달에 그친 것엔 아쉬움을 드러냈다.
내가 이겼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심사위원의 생각은 달랐다. 1라운드에서 한 표만 더 받았어도 우승이었다. 많이 아쉽다.

대회 직전까지 심한 부상이 있었던 걸로 안다.
이제 춤을 그만 춰야 하나 생각할 정도로 지난해 목 부상이 심했다. 다행히 회복되고 있었는데 국가대표 선발전을 치르는 와중에 다시 허리 부상을 입었다. 게다가 대회 2주 전엔 무릎까지 다쳤다. 그나마 다행인 건 대회 준비를 일찍 마쳐둔 터라 몸만 회복하면 됐다. 매일 혼잣말을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고. 조금씩 회복되면서 경기 때는 진통제를 먹고 버텼다.

아시안게임에서 겨룬 두 일본 선수 잇신, 시게킥스와는 약 스무 살 차이가 난다. 은퇴하고도 남을 나이에 여전히 어린 선수들을 상대할 수 있는 비결은 뭔가?
나는 춤을 운동처럼 생각한다. 운동은 며칠만 안 해도 몸이 금방 퇴화된다. 춤도 마찬가지다. 꾸준한 연습만이 답이다. 특별한 비법도 지름길도 없다. 조금씩 매일 연습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원하는 모습이 돼 있다. 무엇보다 체력적으로는 자신이 있다. 나보다 어린 친구들이 먼저 지치는 모습도 많이 본다. 매일 스트레칭하고 맨몸 운동을 한다. 어떤 경우라도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열아홉 살에 세계적인 대회를 석권했다. 20년 넘게 활동하면서 슬럼프는 없었나?
중학교 때 친구의 브레이킹을 보고 따라한 게 시작이었다. 그 후 4년 만에 UK 비보이챔피언십과 BOTY에 나가게 됐다. 동영상으로만 보던 해외 유명 비보이들을 직접 만난 것이 그저 신기하던 시절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들을 이긴 거다. 세계 대회에서 연달아 우승을 하니 스스로도 많이 놀랐다. 그런데 너무 큰 목표를 이루고 나니 더 이상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이제는 돈을 벌어야 할 때라고 느꼈다. 춤을 그만두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냈다. 6개월이 지났을 즈음 문득 내가 뭘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야 내가 정말 춤을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다. 비보이 인생에서 유일하게 춤을 놓은 시기다. 그 이후로는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브레이킹은 아무리 오래 해도 어렵다. 안 되는 걸 극복하고 싶은 마음이 나를 계속 움직이게 한다.

무제한 배틀, 일 대 다 배틀을 여러 번 치렀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2020년 대만의 유명 비보이 해리케인의 제안으로 35라운드 배틀을 한 게 시작이었다. 이 대결에서 승리한 뒤 이런 걸 잘하는 선수라는 이미지가 생겨 비슷한 배틀 제안이 많이 왔다. 가장 힘들었던 건 2022년 미국 뉴욕에서 비보이 10명을 상대로 나 혼자 20라운드를 뛴 거다. 10라운드를 마친 뒤 잠깐 쉬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때 너무 고통스러웠다. 다시 10라운드를 할 생각을 하니 도망가고 싶었다(웃음). 난 왜 자꾸 이런 걸 할까,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발전에 큰 원동력이 됐다. 이게 가능할까 싶은 것에 도전하다 보면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더 나은 모습이 돼 있었다. 이걸 깨닫고 난 뒤엔 웬만한 제안은 다 받아들이려 한다.

손가락만으로 물구나무를 서는 ‘핑거 프리즈’ 등 자신만의 시그니처 동작이 많은 걸로도 유명하다.
비보이들은 시그니처 동작을 만들고 나면 대체로 10년 정도는 그걸 밀고 나간다. 반면 나는 계속해서 새로운 기술을 만드는 재미로 춤을 춰왔다. 시그니처 동작을 만드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다. 원래 브레이킹 기술이 다 어려운데 여기에 나만이 보여줄 수 있는 독창성까지 갖추려면 난이도가 더 올라간다. 그걸 개발했다고 해도 지속해서 보여줄 수 있을 만큼 스스로 단련하는 과정도 필요하다.

최근 방송 등을 통해 댄서들이 큰 인기를 얻고 있다. 브레이킹에 대한 인식도 달라졌을 듯하다.
예전엔 비보이를 그저 ‘노는 아이’로 생각했다. 그런 편견을 깨부수기 위해 학창시절엔 공부도 더 열심히 했다. 바닥에서 시작된 문화가 이젠 올림픽 종목이 됐다. ‘춤을 그만 출 때가 되지 않았냐’고 하시던 부모님도 아시안게임에 나간 걸 보고는 뿌듯해하신다. 하지만 브레이킹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부족하다. 중국이나 일본만 봐도 부모가 직접 아이를 브레이킹 학원에 데리고 간다. 반면 우리나라는 브레이킹을 하려는 어린 친구들이 많지 않다. 돈을 벌기 어려운 직업이라는 인식이 강한 탓이다. 다행히 내가 속한 플로우엑셀(FXL) 크루는 지난 9월부터 서울 도봉구청 브레이킹 실업팀에 소속돼 춤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됐다. 선수 선발과 육성, 지속적인 활동을 위한 지원체계가 구축돼야 한다.

다음 목표는 파리올림픽이다.
국가대표 선발전을 거쳐 내년 5월부터 예선이 시작된다. 두 차례 예선을 통해 전 세계 40명의 선수 중 10명을 선발한다. 큰 전쟁터가 될 걸로 예상한다. 나이가 많아 여러 배틀을 소화하기 힘들겠지만 그때까진 어떻게든 견뎌보려 한다.

많은 걸 이뤘다. 지금은 어떤 마음으로 춤을 추나?
도 닦는 기분(웃음). 그리고 또 다시 버티자는 마음이다. 2013년 이후 비보이로서 커리어는 ‘보너스’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보너스의 보너스 인생을 살고 있다. 춤을 그만두려다 나를 보고 마음가짐을 바꿨다는 이들의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내가 가는 길이 누군가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는 점에서 사명감을 느낀다. 목표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앞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달라진다. 이제는 내가 이룬 것들을 나누고 싶다. 그 방법에 대해선 계속 고민하고 있다. 즐기는 걸 목표로 한다면 50세에도 브레이킹을 못할 이유가 없다. 비보이 역사에서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헤쳐가겠다.

조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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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킹(breaking)이란?
1970년대 미국 뉴욕의 흑인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한 길거리 춤(스트리트 댄스)에서 유래했다. 당시 클럽에서 음악의 간주 부분(break)에 춤을 추는 이들을 가리켜 ‘브레이크 보이’라 불렀고 이것을 줄여 ‘비보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물구나무를 한 채 멈추는 ‘프리즈’ 등 격렬하고 화려한 동작이 특징이다. 2022 항저우아시안게임과 2024 파리올림픽에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다. 파리올림픽에는 남녀 각각 한 개의 금메달이 걸려 있다.


[자료제공 :icon_logo.gif(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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