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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언덕’에서 ‘삶의 숲’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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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랑망우공간
서울 동북부 끝자락 망우리를 떠올리면 많은 이들의 머릿속엔 공동묘지라는 단어가 자동 완성된다. 한용운, 이중섭, 안창호, 박인환…. 한국 근현대사를 빛낸 수많은 예술가와 지식인이 잠든 ‘야외 교과서’이지만 그동안 선뜻 발걸음이 향하는 장소는 아니었다. 묘지라는 공간이 지닌 무겁고 으스스한 이미지가 선입견처럼 자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이곳은 ‘죽음의 언덕’에서 ‘삶의 숲’으로 변모하고 있다. 그 변화의 중심에 ‘중랑망우공간’이 있다. 중견 건축가 정재헌이 설계해 2022년에 들어선 쉼터 겸 복합문화공간이다.
망우역사문화공원 초입에서 걸어서 조금 올라가면 관람객을 맞이하는 건물 하나가 시야에 들어온다. 얼핏 보면 건물이라기보다 길처럼 뻗은 콘크리트 구조물이 능선을 따라 120m가량 이어져 있다.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있는 듯 없는 듯 자연에 살포시 놓인 건축. 풍경 속에 묻혀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렵다. 설계자 정재헌은 이 건물을 “자연을 담은 상자”로 정의하며 “자연과 역사, 죽음과 삶을 이어주는 매개”라고 설명한다. 건물에 들어서기 전부터 묘역과 숲이 맞닿은 이곳의 분위기에 스며든다.



망우(忘憂)… 시름을 잊는 공간
망우리는 1933년 일제강점기에 공동묘지로 조성된 뒤 수많은 근현대 인물이 묻히면서 역사적 기억을 간직해왔다. 1973년 만장으로 매장이 중단된 이후 반세기 가까운 세월이 흘러 서울에서 드물게 숲이 우거진 공간으로 변했다. 묘비 사이 시간이 켜켜이 쌓이면서 조성된 숲은 생태적 다양성과 역사의 무게를 동시에 품고 있다.
‘망우리’라는 이름은 ‘논어’ 술이편의 구절 ‘낙이망우(樂而忘憂)’, 즉 ‘도를 행하는 즐거움 속에서 시름을 잊는다’에서 비롯됐다. 묘지에 깃든 어두운 이미지와 달리 이름에는 위로와 치유의 의미가 담겨 있다. 정재헌은 “망우에 담긴 뜻을 확장해 죽은 자의 공간인 묘지가 오히려 산 자들이 위로받고 삶을 이어가는 장소가 되길 바랐다”고 말한다. 프랑스 파리의 몽파르나스, 페르 라세즈의 공동묘지처럼 일상과 어우러지며 관광 명소로 사랑받는 공간을 꿈꿨다. 기억의 장소를 넘어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성찰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존재를 드러내는 기념비적인 건축물이 아니라 숲과 사람을 이어주는 매개로서의 건축을 지향했다.
그는 현상설계 과정에서 처음 현장을 찾았을 때의 인상을 잊지 못한다. “월하의 공동묘지 같은 으스스한 곳일 거라 생각했는데 남산보다 숲이 더 울창했어요. 북한산과 인왕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한눈에 보였지요. 동쪽에서 바라본 서울의 파노라마는 내가 알던 도시의 얼굴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묘지라기보다 거대한 숲의 성소 같은 풍경. 이 발견은 건축가에게 강렬한 영감을 줬다.



건축 인생 30년 만의 첫 공공건축
정재헌에게 중랑망우공간은 각별하다. 건축 인생 30년 동안 수많은 주택과 상업건축을 설계했지만 공공건축과는 인연이 닿지 않았다. 여러 차례 현상설계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낙방했다.
그가 공공건축을 꿈꿔온 이유는 분명했다. “몇몇 사람을 위한 집이나 상업시설이 아니라 시민 모두가 쓰고 행복해지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것이었다. “주택은 한두 명의 삶을 바꾸지만 공공건축은 수많은 사람의 일상을 바꿉니다. 건축가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방식이 공공건축이라고 믿습니다.”
망우리 설계 과정에서 그는 만해 한용운의 묘소에 들러 술 한 잔을 올렸다. ‘꼭 당선되게 해달라’는 소망이 담긴 작은 의식이었다. 정성이 통한 것일까. 결국 그는 당선의 기쁨을 거머쥐며 공공건축가로서의 소명을 증명했다. 프로젝트가 단순한 설계 이상의 의미를 갖는 이유다.



성찰의 공간 만든 ‘여백의 미학’
그렇게 만들어진 중랑망우공간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흔히 공공건축이라 하면 도시를 상징하는 랜드마크를 떠올리지만 이곳은 정반대다. 건물은 능선을 따라 낮게 눕듯 펼쳐지며 숲과 어우러진다. 콘크리트, 목재, 유리라는 절제된 재료가 빛과 바람을 끌어들이고 큰 창과 데크는 내부와 외부를 자연스럽게 잇는다. 방문객은 건물 안에 있으면서도 숲의 일부에 있는 듯한 경험을 한다. 건축은 주인공이 아니라 풍경을 바라보게 하는 프레임으로 존재한다.
내부에 들어서면 ‘목적 없는 공간’이 펼쳐진다. 1층은 차를 마시며 쉬는 카페이자 작은 도서공간, 2층은 전시와 관리 기능을 수용한다. 그러나 어느 것도 고정되지 않는다. 모임, 공연, 강연, 휴식 등 사용자의 필요에 따라 유연하게 변한다. 정재헌은 “공공건축은 목적이 드러나지 않을수록 풍요롭다”고 말한다. 특정 기능에 갇히면 금세 낡지만 비워두면 언제든 다른 삶으로 채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의 언덕에 서 있지만 죽음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대신 묘역을 향한 창, 숲길과 이어진 동선을 통해 죽음을 일상의 배경 속에 들인다. 겸손한 건축물 대신 숲과 바람, 그 속에 깃든 이름들을 마주하며 사람들은 걸음을 늦추고 시야를 넓힌다. 단순한 애도의 장소가 아니라 ‘성찰의 공간’인 것이다.



공공건축이 우리 삶에 스며들려면
아쉬움도 있다. 건축가는 ‘여백’을 강조했지만 완공 후 현수막이나 기념식수, 불필요한 시설물이 들어서며 본래의 의도가 흐려졌다. 그는 “자식 같은 건물이 변한 모습을 보는 게 두려워 완공 후에는 거의 가지 않는다”며 “비움을 염두에 두고 만든 건축물인데 왜 자꾸 채워넣으려는지 모르겠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이 문제는 망우리만의 것이 아니다. 한국 공공건축 전반이 안고 있는 과제다. 공공건축은 설계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시공 과정에서의 품질 관리, 완공 이후의 운영 철학, 행정과 운영, 시민의 감각이 더해질 때 비로소 품격 있는 사회적 자산으로 거듭난다. 공공건축은 과연 어떤 방식으로 우리 삶 속에 스며들 것인가. 중랑망우공간이 우리 사회에 던진 질문이다.
숲길을 따라 걸음을 옮기다보면 무수한 이름들이 바람에 스치듯 다가온다. 죽음과 삶, 기억과 현재가 공존하는 공간의 의미를 되새기며 자연스럽게 묵상에 잠기게 된다. 조용히 일상에 내려앉은 건축의 힘이다.

김미리 문화칼럼니스트
새 밀레니엄의 시작과 함께 신문사 문턱을 가까스로 넘은 26년 차 언론인. 문화부 기자로 미술·디자인·건축 분야 취재를 오래 했고 지금은 신문사에서 전시기획을 한다.


[자료제공 :icon_logo.gif(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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