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필수품에서 댄서 소품까지 부채의 변신은 무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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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의 풍속화는 읽는 재미가 있다. 당시의 풍속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림 속 등장인물의 사연까지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들이’ 또한 마찬가지다. ‘나들이’는 ‘단원풍속도첩’에 들어 있는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배경을 전혀 그리지 않고 움직이는 인물과 동물만 그렸다. 소를 탄 가족과 말을 탄 선비가 길거리에서 마주쳤다. 왼쪽으로 향하는 가족은 전면에 배치하고 오른쪽으로 향하는 선비는 후면에 배치했다. 그 덕분에 전면에 그려진 가족의 모습은 세밀한 부분까지 추측이 가능하다. 가족 모두가 장에 다녀온 듯 엄마와 아기는 소를 탔고 아빠는 큰아이를 등에 업었다. 등에 업힌 큰애는 걸어도 될 나이지만 먼 길을 다녀오느라 다리가 아파 칭얼거렸을 것이다. 아빠는 씨암탉을 넣은 등짐 위에 큰애를 올렸다. 귀한 소를 키울 수 있을 정도이니 서민 중에서는 나름 부자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아빠의 흡족한 미소에 그런 자부심이 묻어 있다.
나들이 갔다 온 가족에 비하면 후면에 그려진 말 탄 선비는 그다지 읽을거리가 많지 않다. 고급스러운 가죽 안장과 생황으로 보이는 악기의 윗부분, 그리고 걸어가면서도 어미젖을 빨고 있는 망아지가 눈에 띌 뿐이다. 여기까지만 그렸더라면 그저 그런 그림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런데 김홍도는 말 탄 선비가 부채를 들고 얼굴을 가린 모습을 그려 넣었다. 이것은 남녀 내외용 차면으로 부채가 단순히 바람을 일으켜 더위를 쫓는 도구에 국한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선비가 든 부채는 합죽선으로 손에 쥐고 접었다 폈다 하기 때문에 쥘부채, 접부채 또는 접선(摺扇)이라고도 부른다. 합죽선은 바람을 일으키고 얼굴을 가리는 실용성이 가장 큰 목적이었지만 한겨울에도 손에 들고 다닐 정도로 옷치레에서 빼놓을 수 없는 패션 아이템이었다. 가객이나 소리꾼들은 판소리 중간중간에 합죽선을 펼치면서 흥을 돋우었고 줄타기를 하는 광대는 줄 위를 걷을 때 한손에 부채를 들고 균형을 맞췄다. 조선에서는 선비들이 여인네보다 부채를 더 애용했다. 부채는 현재 알려진 종류만 해도 70여 종이 넘는데 그중에서도 합죽선은 단연 최고의 인기상품이었다.
합죽선은 대나무의 겉껍질을 가늘게 잘라 살을 만들고 한지를 붙여서 완성한다. 이것은 곧 합죽선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화선지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명절지도(器皿折枝圖)’는 근대에 활동한 작가 이도영(1884-1933)과 고희동(1886-1965)이 1915년 부채에 그림을 그리고 그들의 스승인 안중식(1861-1919)으로부터 짧은 글을 받은 작품이다. 그림은 가운데를 중심으로 좌측에 고희동이 수박, 복숭아, 산딸기, 옥수수 등을 감각적으로 그렸고 우측에는 이도영이 고동기(古銅器)와 물고기, 순무 등을 그렸다. 고희동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로 일본 유학을 다녀왔고 이도영은 전통화법을 계승한 토종 작가였다. 서로 다른 길을 걸었던 두 사람이 한 화면에서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가치있는 작품이다. 그림을 완성한 두 사람은 스승인 안중식에게 그림평을 부탁했고 스승은 수박 위쪽 빈 공간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술이 오고 생선도 익었으며 순무도 맛이 딱 들었구나. 정결한 다섯 가지 과일을 꼭꼭 씹어 먹으면 백발이 머리로 올라오지 않을 것이라네.” 이 정도의 의미가 담긴 그림이라면 함부로 부채질하는 데 쓸 수 없을 것이다.
부채의 역할은 대충 이 정도 선에서 끝났다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댄스 서바이벌 프로그램‘ 월드 오브 스트릿 우먼 파이터’에서 한국팀 ‘범접(BUMSUP)’이 선보인 메가 크루 퍼포먼스 ‘몽경(夢境)-꿈의 경계에서’를 보고 나서 완전히 바뀌었다. 갓 쓰고 춤추는 댄서들의 손에 들린 부채가 K-컬처의 상징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K-컬처가 확산될수록 부채의 변신 또한 눈부실 것으로 기대된다.
조정육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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