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가 누군가의 가능성이 될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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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 청각장애인 앵커 노희지 씨
매일 낮 12시 ‘KBS 뉴스 12’의 ‘생활뉴스’ 코너는 KBS 제8기 노희지 앵커가 진행한다. 노 씨의 진행을 들으면 별다른 점을 느끼지 못하겠지만 그는 국내 최초 청각장애인 앵커다. 수어가 아닌 발화로, 그것도 비장애인 앵커와 다르지 않은 속도로 또박또박 뉴스를 전하는 노 씨는 선천적으로 중증(3급) 청각장애를 갖고 태어났다. 오랜 언어치료를 받아 발화는 가능하지만 보청기 없이는 자신의 말소리를 인지하기 어렵고 비행기 이륙 소리조차 겨우 들릴 정도다.
그는 어린시절 대다수 사람이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청력을 가진 줄 알았다고 한다. 때문에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에야 청각장애 판정을 받았다. 또래보다 언어발달이 느리고 이름이 불려도 곧바로 반응할 수 없었던 이유를 뒤늦게 이해했다.
초등 저학년 시절 그는 친구들 앞에서 발표하기 좋아하는 외향적인 학생이었다. 점점 주변 이야기를 잘못 받아적거나 ‘사오정’이라고 놀림 받는 일이 잦아지면서 위축되고 소심한 성격으로 변했다. 청각장애를 숨긴 채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점심시간에 친구들과 대화 속도를 맞추느라 체하기 일쑤였고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 소외당했다. 아나운서가 꿈이었지만 포기하는 게 당연한 것 같았다. 대학교 졸업 때까지 미래에 대한 불안이 이어졌다. 그러나 다운증후군 작가 정은혜 씨와 청각장애인 아이돌 그룹 ‘빅오션’ 등 대중매체에 비친 장애인의 모습을 보고 다시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는 “그분들을 통해 용기를 얻었던 것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용기를 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사명감 때문에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노 씨가 앵커로 발탁된 지 한 달여가 지나 인터뷰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통역은 필요하지 않았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그가 상대편의 입 모양을 유심히 보며 대화를 나눈다는 것뿐, 대화의 흐름이나 속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앵커석은 좀 익숙해졌는지?
‘이거 아니면 안된다’는 각오로 아나운서 지원을 준비했다. 내가 앵커가 됐다는 게 여전히 실감나지 않고 꿈꾸는 기분이다. 늘 긴장되지만 앵커석에서 카메라 빨간불을 기다리는 순간이 가장 떨린다. 나만의 마인드 컨트롤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 중이다.
앵커 발탁 소식이 알려진 뒤 기억에 남는 반응이 있나?
많은 댓글이 달렸는데 그중에서도 ‘세상에서 제일 멋진 뉴스다’, ‘당신의 도전이 내게 울림이 됐다’는 댓글이 인상 깊었다. 정말 과분한 응원을 받고 있는 것 같다.
아나운서를 준비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이었나?
아나운싱은 단순히 읽는다고 되는 게 아니다. 원고에 대한 이해부터 발성, 발음, 톤, 포즈까지 종합적으로 이뤄진다. 청각장애가 있다 보니 적당한 톤으로 명확한 소리를 내는 게 너무 힘들었다. ‘어제의 나보다 더 나은 내가 되자’, ‘내가 누군가에게 희망이 될 수 있다면’ 하는 마음으로 젓가락 물고 발음 연습하기, 복식호흡 훈련, 원고 리딩을 하루도 빠짐없이 했다. 첫 방송을 마치고 눈물을 흘리진 않았느냔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울지 않았다. 부족한 부분이 많이 보여서 아쉬움이 컸고 어떻게 해야 더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먼저였다.
말하는 속도나 발음의 정확도만 보면 청각장애가 있다는 게 느껴지지 않는다.
보청기의 도움을 받고 있다. 보청기를 빼면 바로 발음이 어눌해져서 인플루엔자(독감)에 걸린 게 아니냐는 오해를 받는다. 청각장애인이라고 밝히면 많은 사람이 “당연히 말은 못하겠지”, “수어를 쓰겠지”라는 반응을 보인다. 나는 청능훈련을 오래 한 덕분에 말로 소통하는 게 훨씬 익숙하다. 방송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친구들과 전화통화를 잘한다. 종종 “너는 장애인 티가 나지 않으니 괜찮은 것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다는 느낌이 든다. 수어를 쓰는 사람, 수어와 구화를 하는 사람, 또 나처럼 말을 할 줄 아는 사람 등 청각장애도 다양한 모습과 의사소통 방식이 있다는 걸 알아주면 좋겠다.
뉴스를 진행할 땐 보청기 대신 인이어(제작진의 지시를 실시간으로 듣는 장치)만 착용하나?
보청기는 왼쪽에, 인이어는 그나마 청력이 조금 나은 오른쪽 귀에 착용한다. 인이어에서 나오는 소리를 최대로 키워야 겨우 들을 수 있는 정도가 된다. 제대로 듣지 못해 실수하는 일이 없도록 남들보다 몇 배는 더 집중해야 한다.
청력이 좋지 않다는 건 언제 깨달았나?
열세 살 때 내가 먼저 청력검사를 받아보고 싶다고 부모님께 얘기했다. 선천적인 장애였는데 가족이나 지인 중에 청력이 나쁜 사람이 없다 보니 부모님이 청각장애 증상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부모님은 내가 집중력이 떨어져서 알아듣지 못하거나 발달이 늦은 편이라고만 여겼다더라. ‘ㅅ’, ‘ㅈ’ 발음을 잘 못해서 세 살 때부터 소아정신과 부속 언어치료실을 다녔다. 원인을 모른 채로 혹독하게 언어치료를 받았다. 6년간 설압대(혀 누르개)를 입에 물고 작은 떨림의 차이를 느끼면서 말을 익혔다. 혀 위치와 입술 모양, 복압에 따라 어떻게 소리가 나오는지도 외워야 했다. 말을 또박또박 하지 못하면 큰일이 날 것만 같았다. 너무 힘들었던 기억이라 아나운서 준비를 하면서 그때가 떠올랐다.
언어치료 외에 특별한 경험이 있다면?
주말마다 온 가족이 여행을 떠나 그곳의 계절을 느꼈다. 부모님 덕분에 전국 방방곡곡을 다 돌았다. 독서논술토론학원, 미술학원, 레고학원, 종이접기, 발레 등 내가 세상을 몸으로 느끼고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부모님이 도와줬다. 그 덕분에 내가 앵커가 돼 말을 하고 누구보다 감정을 솔직하게 전달할 수 있는 어른이 됐다.
보청기는 언제부터 끼기 시작했나?
중학교 입학 직전에 보청기를 끼기 시작했다. 이전에 듣지 못했던 잡음이 너무 크게 들려서 놀랐다. 라디오 주파수를 맞출 때처럼 “지지직” 하는 소리였다.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특히 급식실에서 힘들었다. 너무 시끄러우니까 대화를 알아듣지 못해 친구들이 짜증을 내는 일이 많아졌다. 그럼에도 내가 청각장애인이라는 걸 알리고 싶지 않아 오해를 많이 받았다. 반대로 듣게 돼서 반가운 소리라면 물소리다. 전에는 고요하기만 했던 소리가 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소리가 됐다. 그래서 마음이 무거울 땐 바다에 간다.
숨겨오던 장애를 드러낸 계기가 궁금하다.
성인이 되고 청각장애인 모임에 나가면서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장애도 내 정체성의 하나인데 왜 숨기기 급급했을까, 왜 부끄러워했을까 후회가 됐다. 같은 장애가 있는 친구들을 만나면서 연대의 힘이 커졌던 것 같다. 나처럼 혼자 끙끙 앓으며 힘든 길을 걷고 있을 누군가에게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장애를 대하는 사회적 인식이 많이 개선됐다. 중고등학생 때만 해도 이렇게 장애인이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일은 드물었다. 장애는 부끄러운 게 아니니 숨지 말라는 이야기도 해주고 싶다.
밝게 이야기하던 그가 동생 이야기를 꺼낼 때 잠깐 말을 잇지 못했다. 여섯 살 어린 동생도 그와 비슷한 시기에 청각장애 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노 씨에게는 동생이 삶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극단적인 생각에 이르다가 마음을 고쳐먹은 것도, 아나운서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온 것도 동생이 가장 큰 이유였다.
언니의 행보가 동생에게 좋은 자극이 되겠다.
글쎄(웃음). 장애인 앵커를 꿈꾸게 된 계기 중 하나가 동생이었다. 내가 제일 사랑하는 존재에게 자신감을 불어넣는 언니가 돼주고 싶었다. 나를 자랑스러워하면서 친구들한테 소개할 때 너무 고맙고 뿌듯하다.
지금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청각장애인 아이돌 그룹 ‘빅오션’을 만나고 싶다. 데뷔 무대가 빛이 나더라. 정말 피나는 노력을 통해 무대에 섰을 거다. 세 멤버와 깊은 속마음을 나눠 보고 싶다. 그리고 11월에 일본 도쿄에서 데플림픽(청각장애인 세계 스포츠 대회)이 열린다. 이런 대회가 있다는 걸 알리고 한국 선수들의 활약을 직접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좋겠다. 나에게 앵커는 숨죽여 울던 어린 노희지, 상처가 너무 커서 아팠던 노희지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내가 이 일을 통해 위로를 받게 된 것처럼 나 역시 소외된 사람들의 말소리를 전하는 아나운서, 앵커로 기억되고 싶다.
‘국내 최초 청각장애인 앵커’라는 수식어가 부담스럽지는 않나?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다. 나의 도전을 보면서 사람들이 자신의 가능성에 함부로 한계를 두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어릴 때 언어치료를 받으면서 수없이 또래들과 비교당했다. 그럴수록 나는 이것밖에 되지 않는다며 스스로 한계를 정했던 것 같다. 성인이 되고 페루, 칠레, 발리 등을 여행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넓은 세상에서 나는 하나뿐인 존재인데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인가. 이후로 나의 비교 대상은 ‘어제의 나’다. 나의 이야기가 누군가의 가능성을 여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이근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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