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을 켜켜이 쌓아 올리 듯 ‘블랙큐브’ 안에 빛의 예술이
작성자 정보
- 공감 작성
- 작성일
본문

서울시립 사진미술관
오래간만에 서울 지하철 1호선을 타고 도봉구 창동역에 내려 역사를 빠져나왔다. 서울의 북쪽 끝자락, 상대적으로 낙후된 외곽의 베드타운. 일반적으로 알려진 창동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독창적인 형태의 개성 있는 건물들이 눈에 띄었다. 일부가 공중으로 돌출해 마치 보드게임 ‘젠가’를 연상시키는 고층 건물도 보인다. 2년 전 창동역 환승주차장 자리에 들어선 49층짜리 복합시설 ‘씨드큐브 창동’이다. 그 맞은편, 매끈한 흰 구(球) 형태의 미래적인 건물이 시선을 끈다. 터키 건축가 멜리케 알티니시크가 설계해 2024년 8월 문을 연 ‘서울로봇인공지능과학관’이다.
최근 이 변화의 중심에 또 하나의 랜드마크가 등장했다. 서울로봇인공지능과학관 바로 옆에 위치한 ‘서울시립 사진미술관’이다. 10여 년의 긴 준비 기간 끝에 완공된 국내 최초 사진 전문 공립미술관이다.
카메라 조리개를 닮은 미술관
설계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라예보 출신으로 오스트리아 빈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건축가 믈라덴 야드리치와 한국 건축가 윤근주(일구구공 도시건축 대표)의 협업으로 이뤄졌다. 두 건축가 모두 공공 프로젝트를 통해 사회적 참여를 실천해오고 있다.
이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사진 작품 전시장과 수장고, 교육 기능까지 담은 미술관을 설계하는 것이었다. 이 건축물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빛’이다. 사진을 뜻하는 영어 단어 ‘Photograph’는 그리스어 ‘Phos(빛)’와 ‘Graphos(그리다)’의 합성어다. 즉 사진은 ‘빛으로 그린 그림’이라는 뜻이다. 야드리치는 “사진은 빛으로 그린 그림이고 건축은 빛 아래 전개되는 형체의 유희”라면서 둘 사이의 공통점에 주목했다. “건축과 사진에는 예술, 과학, 일상이라는 접점이 있다. 지구상 거의 모든 장소와 사물은 한 번쯤 사진으로 기록됐고 대부분의 장소는 한 번쯤 건축적으로 다뤄졌다. 그리고 어떤 예술도 사진과 건축처럼 탄생과 발전에 빛에 의존하는 경우는 드물다. 둘 다 무한한 시간 속의 한순간을 포착함으로써 기록으로 남게 된다.”
미술관 형태는 카메라의 렌즈 유닛과 조리개에서 영감을 받았다. 윤 대표는 “사진이라는 매체의 특성을 공간적으로 구현하고 시민들이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개방된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 목표였다”며 “명료하면서도 강렬한 조형적 형태를 제안했다”고 설명했다. 시민들이 공간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는 뜻이다.
건축과 사람의 상호작용에 집중
외관을 보면 상부는 사각 박스 형태지만 하부는 건물이 살짝 회전하면서 한쪽이 들어 올려진 구조다. 처마처럼 올라간 부분이 주 출입구다. 건물 윗부분은 직선으로 이뤄졌지만 아래로 내려오면서 곡선과 만나며 역동성이 더해졌다.
외피는 콘크리트 루버(louver·줄무늬 형태의 입체 구조물)를 층층이 쌓은 형태로 시각적으로 유연하고 흐르는 듯한 리듬을 보여준다. “정적인 구조물이 아니라 생동감 있는 대상으로 인식하게 하고 건축과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상호작용할 수 있도록 유도한 디자인”이라는 것이 윤 대표의 설명이다.
압출 성형 콘크리트 수평 띠로 이뤄진 루버는 미적인 장치인 동시에 기능적인 역할도 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빛의 방향과 강도가 달라지면서 외벽 색이 검정과 회색으로 변주되며 겨울에는 냉기를 막고 여름에는 열을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기단부의 루버는 넓게 펼쳐져 시민들이 머물 수 있는 공공 공간이 된다. 층층이 쌓인 루버는 파란만장한 한국 근현대사를 차곡차곡 기록한 사진들을 모아둔 공간이라는 사진미술관의 목적을 시각적으로 은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건물은 지하 2층, 지상 4층으로 이뤄져 있다. 입구로 들어가면 층고 10m의 탁 트인 로비가 펼쳐진다. 야드리치는 이 공간을 “게스트룸처럼 방문객을 환대하는 구조”라고 설명한다. 2~3층 전시장은 회색 콘크리트와 검정으로 마감했다. 전반적으로 어두운 무채색 계열이다. 흔히 미술관의 전형으로 여겨지는 흰색 사각형의 ‘화이트 큐브’를 깨고 대신 어두운 ‘블랙 큐브’를 채택했다. 1층과 4층에는 로비, 포토북카페, 포토라이브러리, 교육실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천장 구조물은 일반적인 건물과 달리 교량 하부 구조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형태다. 이는 곡선 구조를 구현함과 동시에 구조적 하중을 안정적으로 지지할 수 있도록 설계한 결과다. 윤 대표는 이 건물을 감상할 때 눈여겨볼 요소로 세 가지를 꼽았다. 수평선이 만들어내는 유연한 형태, 천장 속에 숨겨진 대형 구조, 강렬한 외형과 대비되는 절제된 전시 공간이다.
치열한 논의와 설계의 결과물
최근 들어 공립미술관의 건축 수준이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졸속 행정 탓에 원안과는 전혀 다른 결과물이 나오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사진미술관은 국내 국공립미술관 건축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설계 과정에서 다양한 아이디어 교류와 협업이 이뤄졌으며 예산 제약이나 법적 규제 등 암초에 부딪혔을 때도 관계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타협점을 찾아갔다. 윤 대표는 “미술관 운영자, 큐레이터, 시민 등 사용자는 실용성과 편의성을 강조했지만 건축 전문가들은 구조적·미학적 완성도를 우선시했다”며 “이견 조율을 위해 공식 회의와 심의를 무려 230회 이상 진행했다”고 말했다. 보완 기간까지 포함하면 설계만 663일, 공사는 1016일이 소요됐다. 실시 설계 과정에 제출한 문서만 3만여 장, 쌓으면 3m 정도 되는 분량이다.
두 설계자와 친분이 있는 건축가 승효상 씨는 야드리치 교수가 설계를 보여줬을 때 감탄했다고 한다. 그는 “사진의 본질, 장소의 역사, 파편적 시대에 대한 깊은 공감으로 완성한 건축”이라며 “건축이 가져야 할 세 가지 기준인 합목적성, 장소성, 시대성에 너무나 적확히 복무한 선한 건축”이라고 호평했다.
철학자의 면모를 지닌 야드리치는 프로젝트 초기부터 대중문화와 시대정신을 미술관이라는 건축물에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까 고민했다. 결론은 이것이었다. “홀로 요트를 타고 세계 일주를 하다 보면 시간이 끝도 없이 펼쳐지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끝없는 역사의 시간이 아니라 스토리다. 건축도 마찬가지다. 건축은 무한한 시간 여행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로서 시간 위에 놓인다. 미술관 설계는 장대한 대서사의 도입부를 만드는 것일 뿐이다.”
긴 시간을 거쳐 도입부는 쓰였다. 어떤 빛깔의 대서사를 써내려갈지는 이 공간을 사용할 우리 손에 달렸다.
김미리 문화칼럼니스트
새 밀레니엄의 시작과 함께 신문사 문턱을 가까스로 넘은 26년 차 언론인. 문화부 기자로 미술·디자인·건축 분야 취재를 오래 했고 지금은 신문사에서 전시기획을 한다.
[자료제공 :

관련자료
-
링크
-
이전
-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