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공에서 대통령까지 ‘누구도 탈락하지 않는 사회’를 꿈꾸다 > 정책소식 | 정보모아
 
정책소식

소년공에서 대통령까지 ‘누구도 탈락하지 않는 사회’를 꿈꾸다

작성자 정보

  • 공감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btn_textview.gif



이재명 대통령이 걸어온 길
끼니도 겨우 잇는 가난한 집 아들에서 기계에 팔이 눌리는 사고로 ‘굽은 팔’을 가진 소년공으로, 영어 단어 ‘바이블’을 ‘비블’로 멋대로 읽던 독학생에서 누구보다 앞장서 노동자를 변호하던 인권변호사로, ‘누구도 탈락하지 않는 삶’을 실천해 실질적인 결과를 이끌어내는 지방자치단체장에서 민주주의의 위기를 극복하는 지도자로, 이재명 대통령의 삶은 그야말로 ‘입지전적’이라는 단어 그 자체다.
“참혹했던 삶이 제가 어떤 곤경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지금도 누군가는 세상을 포기하고 떠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습니다. 희망을 만들어주고 싶습니다.”
이 대통령은 2022년 1월 24일 제20대 대통령선거 유세 일정 중 소년공 시절을 보낸 경기 성남시 상대원시장을 찾아 이렇게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난한 과거는 단지 이야깃거리가 아니다. ‘누구도 탈락하지 않는 삶’을 꿈꾸는 정치인 이재명의 뿌리다. 그런 점에서 이 대통령의 발자취를 되짚어보는 일은 앞으로 이 대통령이 이끌어갈 대한민국의 미래를 그려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시계를 거꾸로 돌려 1964년 경북 안동으로 돌아가보자.
이 대통령은 안동에서도 오지로 꼽히는 예안면 도촌리에서 태어났다. 모두가 어렵던 시절이지만 그중에서도 이 대통령의 집은 무척 가난했다. 그의 가족은 화전민을 위한 ‘소개집’에서 살았는데 겨울이면 방에 둔 물이 얼고 창에 허옇게 성에가 끼는 슬레이트 지붕의 벽돌집이었다.



성남시 상대원동의 기억
성남시로 이주한 것은 이 대통령이 삼계국민학교를 졸업한 1976년 2월 말의 일이었다. 성남시 상대원동에 있던 단칸방 월셋집에서 이 대통령은 소년공으로의 삶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정집에 차린 작은 공장에서, 그다음은 반지하에 있던 목걸이 공장에서 하루에 100원 남짓 받으며 일했다. 이 대통령은 책 ‘이재명의 굽은 팔’에서 “내 인생은 소규모 공장보다 아래인, 회사 이름조차 없던 공장에서 시작되었다”며 “납 연기 피어오르던 내 첫 공장은 아직도 내 혈관을 타고 몸속을 돌아다니고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사장이 야반도주해 하루아침에 직장이 없어지기도 하고 피부가 뭉텅뭉텅 떨어질 정도로 상처를 입으며 다닌 공장들에서 그는 갖가지 이름으로 불렸다. 어린 탓에 법적으로 취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느 곳에서는 앞집 청년 ‘박승원’의 이름으로 일했고 어느 곳에서는 ‘권영웅’으로 일했다. 이름 없는 소년공은 산업재해를 당하고도 그냥 ‘다쳤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세 번째로 취업한 ‘동마고무’에서 벨트에 손가락이 말려들어가는 사고를 당했다. 사고의 흔적은 아직도 손가락에 남아 있다.
다음으로 일한 ‘아주냉동’에서도 소년공의 몸은 성치 않았다. 공장에서 함석판을 자르고 접는 ‘샤링기(절단기)’는 위치를 정확하게 맞추지 못하면 손가락 따위는 순식간에 잘라버리는 위험한 기계였다. 함께 일하던 노동자들의 손가락이 잘리는 사고를 목격하면서 소년공도 자잘한 상처를 입었다. 그의 몸에는 100군데 가까이 그 시절 함석에 찢긴 흉터가 남아 있다. 치료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산업재해라는 단어를 아는 사람도 없었고 다친 노동자의 상처보다 기계의 흠집을 걱정하는 시대였다.
“그때 저희 가족과 함께 힘들게 살았던 사람들이 여전히 혹독한 노동에 시달리고, 위험 속에서 목숨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힘겹게 살아갑니까. (중략) 좌절해서 이 세상을 포기하고 싶은 사람이 없는 세상, 열심히 일하면 내게도 기회가 주어지고 나도 성공할 수 있다고 믿어지는 그런 세상, 여러분 만들고 싶지 않습니까?”
이 대통령의 상대원시장 연설은 상대원동에 있던 그 공장들을 떠올린 것이다. ‘누구도 탈락하지 않는 사회’에 대한 의지는 그 시절부터 다져진 것이다.
‘대양실업’이라는 회사에서 프레스 기계를 다룰 때의 일이다. 지금도 바로 펴지 못하는 그의 굽은 팔도 그때 일어난 사고 때문에 생겼다. 그의 왼쪽 손목 관절이 기계에 으깨졌다. 다행히 손목 전체가 눌린 것이 아니라 손이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바깥쪽 부분이 눌렸다. 그저 ‘다친 것’이었기 때문에 치료는 하지 않았다. 그는 책 ‘이재명의 나의 소년공 다이어리’에서 “조금 다치는 일은 너무도 일상적인 일”이라며 “뼈가 잘못되었을 거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문제는 키가 일 년에 15㎝ 이상 큰 열여섯 살부터 다친 손등 뼈 일부가 자라지 않으면서 손목이 뒤틀리기 시작한 것이다. 관절이 으스러져 근육으로만 버티는 왼쪽 손 때문에 그는 지금도 넥타이를 한 손으로 맨다.
이름 없이 고된 생활을 이어가던 소년공은 공부가 새로운 기회를 줄 것이라 생각했다. 소년공들을 윽박지르던 공장 관리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대양실업에 다니던 시절, 그는 선임들의 내기 권투시합에 참여해야 했다. 소년공들에게 글러브를 씌워놓고는 서로 치고받게 하는 내기 권투시합을 마치고 나면 좌절감이 들었다. 권투시합을 하지 않아도 되는 고졸 관리자의 대단한 위세를 보며 그는 고졸 자격증을 따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책에서 그 이유에 대해 “내 이름도 쓰지 못하고 지내는 공돌이 생활을 탈피해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내 이름 석 자가 제대로 사용되는 유일한 기회였기 때문일 것”이라고 떠올렸다.

“공부만이 유일한 기회”
그렇게 중졸 자격을 얻기 위해 1978년 4월 검정고시 학원에 등록했다. 8월에 있을 시험을 위해 몇 달간 매진한 끝에 중졸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그리고 시계 회사인 ‘오리엔트’에 입사했다.
시계공으로 일하면서도 그는 공부를 계속하겠다는 마음을 굽히지 않았다. 시계를 만드는 다양한 공정 중에서 ‘락카칠’을 하겠다고 나선 것은 공부를 하기 위해서였다. 혼자 밀폐된 공간에서 집중해 락카칠을 하고 나면 남는 시간에 귀퉁이에서 책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혼자 고군분투한 결과 1980년 고졸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그러나 삶은 변하지 않았다. 아무도 축하해주지 않는 합격을 뒤로한 채 시계공 이재명은 계속해서 락카칠에 매달려야 했다. 락카칠을 하는 공간은 아세톤과 벤졸, 석면이 공기처럼 떠다녔다. 그 독한 냄새를 매일 들이마셨다. 그 결과 오른쪽 코가 으스러졌고 냄새를 맡지 못하게 됐다. 그는 “대학에 들어간 뒤에야 공장 시절 가까이 했던 게 치명적인 유해물질이라는 걸 알았다”고 했다. 후각세포 55% 이상이 괴사된 이후의 일이다.
이 시절 그는 몸의 고통도 힘들었지만 마음의 갈등도 컸다. 굽은 팔로 세상을 제대로 헤쳐갈 수 있을지, 공부를 계속해야 할지 미래에 대한 고민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의 인생 전체로 보면 굽은 팔은 마냥 고통만을 주지 않았다. 그는 책을 통해 “굽은 팔은 소년공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자 공부에만 매달리도록 했고, 법을 공부해 노동자를 위한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했다”며 “비록 내 팔은 굽었지만 세상이 또 다른 굽은 팔을 만들지 않도록 하고 싶었다”고 회고했다.



고통 속에서도 희망이
고통 속에서도 희망은 자란다. 그는 “천장을 뚫고 올라가면 거기 다른 세상이 있으리란 막연한 믿음에 부응할 수 있는 건 공부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학원을 다니고 대학 등록금을 내려면 돈이 필요했다. 은인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돈이 없어 학원을 다닐 수 없다고 말하는 그에게 당시 성남 성일학원을 운영하고 있던 김창구 원장은 ‘공부를 해야 한다’며 무료로 수업을 듣게 해줬다. 처음으로 자신을 인정해주는 사람을 만난 소년은 공부에 대한 의욕을 느꼈다.
대학 등록금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학력고사에서 좋은 성적을 받아야 했다. 일을 하면서는 좀처럼 공부에 몰두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1981년, 6년을 일해오던 공장을 떠났다. 그는 그날을 이렇게 회상했다.
“아무도 환송하지 않았다. 오리엔트 시계 도금실에 그런 관행 따위도 없었다. 날이 유난히 후텁지근했던 것만은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내 후각과 한쪽 팔을 비틀어서 가져간 공장 지붕들이 말없이 상대원동 언덕에서 뜨겁게 햇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1982학년도 학력고사에서 285점을 받았다. 유난히 학력고사가 어려웠던 그해, 그 성적이면 서울대도 노려볼 만했지만 장학금과 생활비를 지원해주는 중앙대학교를 선택했다. 1982년 3월, 그토록 입어보고 싶었던 교복을 입고 대학 입학식에 참석했다. 다른 학생들은 교복을 입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중·고등학교 시절 내내 입었던 교복이 지겨웠겠지만 그에게는 꿈에 그리던 교복이었다. 그의 책 ‘그 꿈이 있어 여기까지 왔다’에서 “대학 교복을 입는 게 촌스러운 행동이라는 건 몰랐다”며 “평생에 교복 한 번 입어보는 것이 꿈이었으니까”라고 썼다. 그러면서 “성남시장 시절 무상교복 정책은 그런 경험에 뿌리가 닿아 있다”고도 했다.

5월 광주에 뿌리 내린 사회의식
대학을 다니면서 이 대통령의 삶과 의식은 큰 변화를 겪었다. 1980년 광주는 그의 ‘스승’이 됐다. 그는 대학에 입학할 당시만 하더라도 1980년 광주가 ‘폭도’들의 소동이었다고 알고 있었다. 입학 후 철조망에 매달려 소리를 지르던 한 학생을 처음 봤을 땐 ‘대학은 자유로운 분위기라더니 정말 이상한 사람도 많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또 다시 목 놓아 호소하는 학생들을 만났고 1980년 광주에 대한 진실을 조금씩 알게 됐다. 무작정 광주를 욕하기만 하던 자신이 너무나도 창피했다. 그는 “권력과 언론에 속은 내가 억울했고 분노가 치밀었다”며 “그건 내 안에서 치러야 하는 광주항쟁이었다”고 말했다.
그 후 그는 점점 변해갔다. 대학 4년 내내 고무신만을 고집스럽게 신었고 입학 때 맞춘 낡은 코트와 교련복만 입었다. 경제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감옥과 거리에서 싸우는 벗들 앞에서 공부에 몰두하는 자신이 죄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의 책 ‘이재명의 굽은 팔’에는 굵은 글씨로 5월 광주에 대해 적혀 있다.
“5월 광주는 나의 사회의식을 비로소 단련시켰고, 투박한 차림은 껍데기를 단단하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되었다. 광주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한낱 개가 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광주는 나의 구원이었고, 나의 스승이었고, 내 사회의식의 뿌리였다.”
그는 1986년 제28회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사법연수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면서 더욱 성장했다. 검사시보를 하며 국가 권력을 대리 수행하는 경험을 했지만 회의가 들었다. 그는 “내가 한낱 시험으로 얻은 엘리트 권력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당시 들었던 ‘노무현 변호사’의 특강이 그의 마음을 다잡게 했다. “변호사는 뭘 해도 굶지는 않는다”는 말에 용기를 얻고 그는 노동자들을 돕는 인권변호사가 됐다.
새내기 변호사가 ‘가난한 사람을 돕겠다’는 어린 시절 계획대로 변호사 사무실을 열며 걸어둔 액자에는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민생변론.’ 그는 책 ‘그 꿈이 있어 여기까지 왔다’에서 평생을 이어온 네 글자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생각해보면 당시의 결심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나는 지금도 변호인으로 살고 있을 뿐이다. 내가 변호하는 사람들은 어제의 수많은 ‘나’이고 매일매일을 성실히 살아가는 이웃들이다. (중략) 그들의 가장 충직하고, 가장 유능한 변호인이 되는 것. 그것이 내 소명이다.”

노동자와 시민의 곁에서 정치인으로
당시 성남에는 서울 도시정비사업으로 쫓겨난 철거민과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곤궁한 처지의 사람이 많았다. ‘소년공 이재명’과 별반 다르지 않던 그들의 삶에 그는 손을 뻗었다. 성남 인근 이천시와 광주시의 노동상담소장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활동을 했다. 경기 동부지역에서 무료 변론을 맡을 변호사가 그밖에 없었기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렇게 그는 성남의 ‘우리 변호사’가 됐다. 노조활동을 봉쇄하기 위해 위장폐업한 기업 때문에 해고 위기에 몰린 200명 넘는 노동자를 변호해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산업재해를 당한 외국인 노동자를 위해 보상금을 받아내고 수많은 구속 노동자와 평화운동가, 학생들을 변호했다.
그의 역할은 더욱 커졌다. 1995년 성남시민모임(현 성남참여자치시민연대)의 창립 구성원으로 참여하면서 시민운동을 시작했다. 성남시 ‘분당 백궁·정자지구 용도 변경’ 특혜 의혹, ‘분당 파크뷰 특혜분양 사건’을 사회에 고발하며 부패한 토건 카르텔, 기득권과 맞서 싸웠다. 회유와 협박이 이어졌지만 그가 흔들리지 않자 음해와 공격은 더욱 거세졌다.
2003년에는 성남시의 종합병원 두 곳이 동시에 폐업하는 일이 생겼다. 의료공백이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공공의료기관 설립 운동이 시작됐다. 성남시립병원설립추진위원회를 만들고 ‘성남시민 10만 서명 운동’에 돌입해 당시 성남 시민의 절반에 가까운 20만 명의 서명을 받았다. 이 서명을 바탕으로 2004년 3월 성남시의회에 ‘성남시립의료원 설립 및 운영에 관한 조례안’이 상정됐다.
그러나 당시 성남시의회는 아무런 토론 없이 시민이 만든 조례안을 47초 만에 부결시켰다. 시민들이 강하게 반발했고 시민단체 대표였던 그에게는 특수공무집행방해죄 혐의가 씌워졌다. 수배자 신세가 된 그는 성남주민교회 지하 기도실에 몸을 숨긴 채 인권변호사에서 정치인으로 나아가기로 결심한다. ‘세상이 변하지 않으면 세상을 바꾸겠다’는 다짐이었다.
정치는 쉽지 않았다.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와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잇따라 고배를 마셨다. 그러나 2010년 민선 5기 성남시장에 당선되기 시작하며 ‘정치인 이재명’은 확실한 변화를 이끌어냈다.

‘이재명의 정치’
당시 성남시는 6500억 원이 넘는 막대한 부채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취임 직후 지방정부로는 최초로 ‘모라토리엄(지불유예)’을 선언했다. 부정부패, 예산낭비, 세금탈루를 없애서 아낀 예산으로 복지를 강화하는 ‘3+1 원칙’으로 3년 만에 재정 정상화를 달성했다.
‘이재명의 정치’는 실질적인 결과를 만들어냈다. ‘누구도 탈락하지 않는 삶’이라는 신념을 현실 정치와 행정으로 입증했다. 청년배당·무상교복·산후조리 등 3대 무상복지 정책을 추진하고 65세 이상 노인들이 한 달에 20시간 일하면 10만 원을 지급하는 ‘소일거리 사업’을 시작했다. 정치 입문 계기가 됐던 공공의료기관도 마침내 설립했다. 9년 만에 설립된 성남시민의료원은 코로나19 팬데믹 사태에 공공의료의 중심축이 됐다.
‘이재명의 정치’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여정”이었다. 그는 제21대 대통령선거 본투표를 하루 앞둔 6월 2일 정치를 결심했던 그 자리, 성남주민교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그동안의 정치 여정을 간략하게 회상했다.
“성남시장으로 취임했을 때도 온통 불가능 투성이었습니다. 부패한 구조, 기득권의 벽, 냉소적인 시선이 넘쳐났습니다. 하지만 저는 시민들만 보고 시민의 기대를 따랐습니다.
불필요한 낭비성 예산을 줄이고 우선순위를 정했습니다. 행정도 시민 중심으로 바꿨습니다. 무상교복, 청년배당, 산후조리 지원 정책이 시민의 삶을 채웠습니다. 불가능하다고 외면받던 일들이 하나하나 현실이 됐습니다.
경기도지사 시절에는 성남시의 청년배당을 경기도 청년기본소득으로 확대 시행했고 농촌기본소득을 최초로 실시했습니다. ‘닥터헬기’를 도입해 응급환자 이송체계를 강화했습니다. 코로나19 위기 속에서 도민들을 지켜냈습니다.
그리고 민주당을 이기는 정당, 수권정당, 유능한 정당으로 만들어냈습니다.”
2024년 12월 3일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12·3 비상계엄’ 사태에 맞서며 그는 내란 종식과 국정안정에 앞장섰다. 비상계엄 선포 당시 그는 유튜브 라이브 방송으로 국민과 국회에 호소했고 결국 계엄 해제를 이끌어냈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회복탄력성을 가지고 있음을 주요 외신들을 통해 지속적으로 알렸다.

‘결국 국민이 합니다’
그는 무엇보다 ‘정치란 국민이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계엄이 해제된 12월 4일 낮 12시에 열린 비상시국대회 모두발언에서 그는 “이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고 대통령·국회의원이 행사하는 그 모든 권리도 결국 국민으로부터 온 것이고 그 권력은 오로지 국가와 국민만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며 “국민 여러분이 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사실은 헌법 제1조에만 쓰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투쟁의 현장에서, 삶의 현장에서 여러분 스스로가 증명하고 있다”고 감사의 뜻을 표했다.
6월 3일 제21대 대통령선거에서 그는 결국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6월 2일 성남주민교회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 대통령은 “정치인은 태어나지 않고 만들어진다”고 말했다. 그동안 이 대통령이 겪어온 일들이 정치인 이재명을 만드는 기반이 됐다는 얘기다. 이 대통령은 국민을 향해서도 “미래는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라며 “지금이 대한민국의 새로운 미래를 우리의 힘으로 새로 만들 바로 그 때”라고 강조했다.
이 대통령은 당선이 확실시된 6월 4일 오전 1시경 서울 여의도를 찾아 지지자들에게 인사하며 “우리가 겪는 이 잠시의 어려움은 위대한 역량을 가진 우리 국민들이 힘을 합쳐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다”며 “희망을 가지고 지금부터는 새로운 출발을 하자”고 당부했다.

김효정 기자




[자료제공 :icon_logo.gif(www.korea.kr)]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최근글


  • 글이 없습니다.

새댓글


  • 댓글이 없습니다.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