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에 역사가 된 프리스키 개척자 “슬로프는 나의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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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하얼빈동계아시안게임 프리스타일 스키 金 이승훈
2월 7일부터 14일까지 열린 2025 제9회 하얼빈동계아시안게임에서 우리나라는 총 16개의 금메달을 획득하며 역대 동계아시안게임 최다 금메달 기록(타이)을 세우는 성과를 올렸다. 이는 당초 목표치였던 금메달 11개를 크게 웃도는 결과다. 요인은 크게 두 가지다. 쇼트트랙 등 기존 효자종목 외 선수들의 맹활약, 그리고 어린 신예 선수들의 약진이다.
그 중심에 이승훈이 있다. 2월 8일 프리스타일 스키 남자 하프파이프에 출전한 이승훈은 시상대 맨 윗자리에 올랐다. 우리나라 선수 가운데 이 종목에서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거머쥔 것은 그가 처음이다. 하프파이프는 반 원통 모양의 슬로프에서 스키를 타며 30~40초 안에 5~6개의 기술을 보여줘야 하는 종목. 이승훈은 공중에서 오른쪽으로 세 바퀴 반을 도는 ‘라이트 사이드 1260’ 등을 최고난도로 구사하며 97.5점의 압도적 점수 차로 다른 선수들을 물리쳤다. 이번 경기에서 91점 이상을 받은 선수는 이승훈이 유일했다. 2005년생으로 올해 나이 열아홉, 첫 출전한 아시안게임에서 거둔 성과다. 프리스키 불모지였던 한국에 새로운 스타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이승훈에게 ‘최고’, ‘최초’는 오래 전부터 익숙한 단어다. 15세에 출전한 2021년 주니어 세계선수권대회에선 한국 역대 최고 성적인 은메달을 땄고 2년 뒤에 캐나다 캘거리에서 열린 2023-2024시즌 FIS 월드컵에선 동메달을 획득하며 이 대회에서 한국 선수 최초로 입상했다. 당시 “여기서 만족하지 않겠다”던 이승훈은 하얼빈의 눈밭에서 그 약속을 지켰다.
‘한국 프리스키의 새 역사’에 궁금한 것이 많았다. 프리스키는 어떤 매력을 지녔는지, 불모지에서 빚어낸 빛나는 성과는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아시아 최고 타이틀을 거머쥔 순간 어떤 생각을 했는지…. 생애 첫 인터뷰라는 이승훈은 어색함에 자주 뺨을 붉혔다. 답변은 짧았고 내용은 투박했지만 그 단순함에서 오히려 우승자의 결기가 느껴졌다. “목표가 생기면 다른 생각은 하지 않는다”는 그의 말이 증거였다.
처음 출전한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땄습니다.
무척 기뻐요. 대회 직후 곧바로 캐나다 월드컵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한국에 오니 이제야 실감이 나네요. 공항에서 부모님께 메달을 걸어드리니 “고맙다”고 하셨어요.
‘아시아에선 적수가 없다’는 평가를 받죠. 메달을 예상했나요?
아니요. 아시안게임 직전에도 대회를 치르고 와 준비할 시간이 부족했어요. 게다가 경기장에 도착하니 눈 상태가 무척 안 좋더라고요. 인공 눈인데다 바람도 많이 불어서 쉽지 않겠구나 싶었어요. 실제로 선수들이 많이 고생했습니다.
아시안게임은 처음인 만큼 긴장도 했을 것 같아요.
무척 긴장했어요. 평소에 대회를 앞두고 많이 떠는 스타일이기도 하고요. 코치님한테 정신 차리게 저 좀 때려달라고 했어요. 등짝을 팍팍 맞고 나니 그때서야 좀 긴장이 풀리더라고요(미소).
시상대엔 한 쪽 눈에 안대를 한 채 올라왔던데요.
경기 전날 연습을 하면서 부상을 입었어요. 점프 연습을 하다 착지하면서 벽에 부딪혔는데 눈이 부었더라고요. 경기 중엔 안대를 하고 고글까지 쓰니 시야가 많이 가려져 불편했습니다. 그래도 큰 부상은 아니라 다행이었어요.
압도적 점수 차이로 우승을 하고도 경기 직후엔 아쉬움을 드러냈죠.
메달만큼 중요한 게 완벽한 기술을 구사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공중에서 축을 두 번 바꾸며 세 바퀴 반을 회전하는 ‘스위치 더블콕 1260’이 목표였는데 경기장 상황이 안 좋아서 다른 안정적인 기술로 대체했어요. 우승은 했지만 준비한 걸 다 못 보여드렸다는 점에서 여전히 아쉽습니다.
설명만 들어도 아찔합니다. 프리스키는 어떤 종목인가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스키라고 부르는 건 플레이트 스키예요. 플레이트 스키가 앞으로 활강하는 거라면 모굴·스키크로스·에어리얼·슬로프스타일 등의 프리스키는 다양한 형태의 슬로프에서 여러 기술을 소화해야 하죠.
주기술인 ‘스위치 1440(스키를 뒤로 타며 공중에서 4바퀴 회전)’, ‘1800도 동작(공중에서 5바퀴 회전)’은 전 세계에서 구사하는 선수가 몇 명 없을 정도라고요.
두 기술 각각 전 세계에서 가능한 선수가 세 명뿐이에요. 기술은 만들어진 걸 할 수도 있고 직접 개발하는 경우도 있는데 아직은 원래 있는 기술을 따라가는 입장이에요. 언젠가는 저만의 기술도 만들어보고 싶어요.
이 종목의 매력이라면?
고난도 기술을 계속해야 하기 때문에 스키를 타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스릴이 넘친다는 점이죠.
훈련은 어떻게 하나요?
선수용 트램펄린에서 맨몸으로 점프와 회전 연습을 해요. 한때 시계방향으로 회전이 잘 안될 때가 있었는데 오른손잡이라 그런 건가 싶어 한동안 왼손으로만 생활하기도 했어요. 크게 도움이 되진 않았어요, 하하. 그래도 알게 모르게 좋은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이승훈이 프리스키를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무렵이다. 재미삼아 발을 들였다 그 세계에 푹 빠졌다. 당시 취미로 즐기던 어그레시브 인라인스케이트에서 구사하는 기술이 프리스키 하프파이프에서와 비슷한 덕에 가능했던 일이다. 왜 스키에 더 끌렸냐는 질문에 그는 “스키는 눈 속에서 타니 땀이 안 나서 좋았다”며 천진하게 웃었다.
부모님의 적극적인 지지 속에 소년은 일취월장했다. 스키부츠를 신은 지 두 달 만에 대한스키협회 꿈나무 대표팀에 발탁됐고 청소년대표와 국가대표 상비군을 거쳐 2020년, 열네 살에 태극마크를 가슴에 품었다. 물론 좌절의 순간도 있었다. 남들이 보기엔 마냥 상승곡선이었으나 내면에선 자꾸만 곤두박질치려는 마음과 자주 싸워야 했다. 겨울이 짧은 우리나라의 자연환경도 그에겐 넘어야 할 산이었다.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냈죠. 자신의 강점이 뭐라고 생각하나요?
목표의식이 뚜렷하다는 것? 목표가 있으면 크게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아요.
우리나라는 설상종목에선 약체인데 그런 점에서 어려움은 없나요?
1년 중 한국에서 지내는 기간은 4개월 정도예요. 나머지는 모두 스위스나 미국 등 해외에서 훈련해요. 외국생활을 해야 하는 게 이 종목의 가장 힘든 점인 것 같아요. 오랫동안 이 생활을 반복해도 적응하기가 쉽지 않네요. 우리나라는 평창동계올림픽을 개최하면서 동계스포츠에 대한 지원이 많이 이뤄졌지만 한번 시설을 지었다고 해서 훈련환경이 마련되는 건 아니에요. 유지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꾸준한 관심이 필요합니다.(인터뷰에 동석한 소속사 관계자는 “동계스포츠는 지구온난화에도 영향을 받는다. 때문에 1년 내내 눈을 볼 수 있는 나라를 찾아다녀야 하는 어려움도 있다”고 덧붙였다.)
그간의 성과는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이뤄낸 것이라 더 놀랍습니다.
후원사의 도움이 컸어요. 2014년부터 롯데그룹이 대한스키협회 회장사가 되면서 스키와 스노보드 종목을 적극 지원했거든요. 개인적으로는 해외 훈련에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덕분에 전 세계 선수들이 모이는 스키캠프 등에도 참가할 수 있었죠. 이런 지원이 없다면 설상 종목같이 국내에서 훈련하기 힘든 선수들은 좋은 성적을 내기가 무척 힘들 거예요.
어린 나이에 포기하고 싶었던 적은 없나요?
대회를 앞두고선 매번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에요. 어렸을 때 미국에서 훈련하다 더 이상 못하겠다며 무작정 한국으로 와버린 적도 있죠. 매일 해도 여전히 힘들고 무서운 운동을 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코치님, 부모님에게 호되게 혼나고 정신 차렸습니다. 일주일 만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짧은 에피소드로 끝났죠.
하늘로 날아오를 땐 선수도 두려움을 느끼는군요.
남자 선수의 경우 비거리가 4~5m 정도예요. 그 높이에 오르면 선수도 무서워요. 고난도 기술을 시도할 때의 두려움은 연습을 많이 하면 줄어드는데 높이에 대한 공포는 쉽게 사라지지 않아요. 어떻게 이겨내느냐고 물어도 특별한 방법은 없어요. 그저 “해야 한다”고 끝없이 되뇔 뿐이죠. 그나마 도움이 되는 건 스키 탈 때 무선이어폰으로 노래를 듣거나 경기 직전에 폴을 세 번 두드리는 루틴에 의지하는 것 정도입니다.
스트레스는 어떻게 해소하나요?
패션에 관심이 많아요. 해외훈련 중 마음에 드는 옷을 발견하면 한국 집으로 배송을 시켜요. 오랜만에 집에 가서 택배를 받아보는 게 작은 기쁨이죠.
마침내 열아홉 살에 한국 스키의 ‘선구자’가 됐습니다.
여전히 프리스키 저변은 좁지만 청소년 선수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예요. 특히 어린 선수들이 제게 조언을 많이 구하죠. 주로 기술에 관한 질문인데 딱히 해줄 말이 없어요. 그저 연습하는 것밖엔 도리가 없으니까요. 제가 누굴 가르친다는 게 부끄럽기도 하고요(미소).
자신의 롤모델은 누군가요?
뉴질랜드의 니코라는 선수요. 이미 은퇴했지만 저에겐 여전히 스타예요. 다만 롤모델만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열심히 하는 선수가 되고 싶어요. 다른 선수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당장 3월 말 캐나다에서 열리는 세계선수권대회가 있고 내년엔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도 열립니다.
세계선수권대회는 가장 문턱이 높은 대회예요. 미국, 캐나다, 뉴질랜드 등 전통적인 스키 강국의 선수들이 대거 참가하죠. 일단 결승에 진출하는 게 목표입니다. 올림픽은 16세에 출전해 16위를 기록한 경험이 있어요. 그땐 너무 어려서 참가하는 자체에 의미를 뒀죠. 하지만 이번엔 정말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하얼빈에서도 그랬듯 두 대회 모두 메달보단 제가 목표한 기술을 최대한 완벽에 가깝게 구사하는 게 목표입니다.
이승훈에게 스키란 어떤 의미인가요?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 스키가 아니라면 저를 설명할 수 있는 건 없어요.
인터뷰 중 선수의 옷소매 사이로 손목에 새긴 작은 타투가 보였다. 의미를 물으니 ‘밝게 빛나라’라는 뜻의 라틴어라고 했다. 자세한 내막이 궁금했지만 그는 말을 아꼈다. 대신 오늘도 이승훈은 설원 위에서 외롭고 숭고한 자신과의 싸움을 이어가고 있을 것이다. 슬로프 위는 여전히 두렵지만 그럼에도 해내겠다는 빛나는 투지로.
조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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