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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모니카도 악기냐고? ‘내가 서는 곳이 무대’ 불모의 땅 개척 “천상의 소리 들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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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하모니카대회 한국인 첫 심사위원 이윤석 하모니시스트
유튜브 검색창에 ‘하모니카 이윤석’을 쳤다. 첫 화면에 떠오른 건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스페인 환상곡 톨레도’ 공연 영상. 7분 가까이 이어지는 연주에 넋을 잃었다. 4옥타브를 넘나드는 선율은 환상적이었고 화려한 손놀림은 새의 날갯짓을 연상케 했다. 손바닥만 한 작은 금속악기에선 트럼펫의 강인함과 플루트의 감미로움, 바이올린의 섬세함과 반도네온의 애절함이 한데 뿜어져 나왔다. 수십 개의 클래식 악기 속에서도 하모니카는 독보적인 존재감으로 오케스트라를 리드했다. 어릴 적 아빠가 불어주던 하모니카, 전에 알던 소리가 아니었다. ‘저 작은 악기로 이런 연주가 가능하다니’, ‘아름다워서 눈물이 난다’, ‘하모니카의 재발견’…. 댓글창에도 감탄이 쏟아졌다.
하모니시스트 이윤석 씨는 클래식 하모니카 연주자다. 전 세계적으로도 하모니시스트가 많지 않지만 클래식을 전문으로 하는 이는 열 손에 꼽을 정도라는 게 그의 설명. 대학에서 작곡을 전공한 이 씨는 어릴 적 배운 하모니카의 매력을 잊지 못해 대학 시절부터 직업 연주자의 길을 걸었다. 세계적인 하모니카의 거장 지그문트 그로븐의 가르침을 받는 영광도 누렸다. 이후 지휘자 금난새와 협연하고 유수의 교향악단과 무대에 서며 하모니카가 클래식 솔로 악기로 설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왔다. 이 씨는 “클래식 하모니카 연주를 접하는 게 쉽지 않다보니 관객들은 어떤 곡도 좋아해준다”며 허리를 낮췄다.
그는 오는 10월 독일에서 열리는 제10회 세계하모니카대회에서 한국인 최초 심사위원으로 선다. 1989년 처음 개최된 후 4년마다 열리며 ‘하모니카 올림픽’으로 불리는 대회다. 심사위원 위촉은 국제하모니카연맹의 초청으로 이뤄졌다. 전 세계 35개국의 전문 연주자와 애호가들이 찾아오는 가운데 이 씨는 마스터클래스와 갈라쇼까지 이끌 예정이다. 그는 20년 만에 다시 그곳을 찾게 된 것이 설렌다고 했다. 중학생 때 대회에 참가해 수상했던 기억 덕분이다. 참가자에서 심사위원으로 신분도 나이도 달라졌지만 열정만은 그대로인 ‘소년’이 눈을 반짝이며 답을 했다.

세계하모니카대회가 있는 줄 몰랐습니다. 독일이 하모니카의 본고장이라죠?
독일 트로싱겐은 ‘하모니카의 메카’로 불려요. 대회가 열리면 마을 전체가 축제 분위기죠. 중학생 때 무대에 선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연주를 마치고 내려와 엉엉 울었죠. ‘망했다’고 생각했거든요. 결과는 좋았습니다만. 마냥 하모니카가 좋았던 어린 시절을 지나 심사위원으로 돌아간다는 게 정말 믿기지 않아요.

하모니카는 어릴 때 누구나 한 번쯤 불어봤을 악기이지만 깊이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하모니카는 ‘트레몰로’라는 종류예요. 가수 김광석 씨 하면 떠오르는 그 하모니카는 ‘블루스 하모니카’고요. 제가 연주하는 건 ‘크로매틱’인데 한 번 들어보세요. 엄청 묵직하죠? 은으로 만든 데다 1000만 원이 넘는 고가예요. 하모니카는 종류만 100가지가 넘을 정도로 무척 다양해요. 그중 전문 연주자들이 쓰는 건 세 가지 정도고요. 하모니카는 관악기로 분류되는데 원리는 파이프오르간이나 반도네온과 같아요. 그래서 하모니카를 ‘마우스오르간’이라고 부르기도 하죠.

하모니시스트라는 직업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다른 클래식 악기에 비해 역사가 짧은 탓이에요. 처음 만들어진 게 1820년대이고 크로매틱 하모니카가 등장한 건 그보다도 100년 뒤인 1920년대니까요(오르간은 8세기, 바이올린은 15~16세기경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릴 때 잠깐 배우는 교육용 악기, 할아버지가 불어주시던 추억의 악기, 혹은 지하철에서 울려퍼지는 구슬픈 악기의 이미지가 강한 게 사실이죠.

그런 악기에 흥미를 느낀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아홉 살 때 문화센터에서 처음 하모니카를 잡았어요. 피아노를 먼저 배웠는데 부모님께서 “가지고 다닐 수 있는 악기도 배워보라”며 권하셨죠. 근데 이게 너무 재밌는 거예요. 코드가 맞았다고 할까요. 특히 그때 만난 최광규 선생님 덕을 많이 봤습니다. 학생들을 무대 위에 세워주시고 해외 하모니카 대회에도 데리고 다니셨죠. 매주 토요일 문화센터에 가는 게 무척 즐거웠어요. 그때 하모니카에 대한 좋은 기억이 씨앗처럼 심어진 것 같아요.

공연 영상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하모니카가 이렇게 풍부한 소리를 낼 수 있나 하고요.
하모니카는 사람의 호흡을 바로 받는 악기예요. 다른 금관악기가 숨을 내뱉을 때만 소리가 나는 것과 달리 숨을 들이마실 때도 소리가 나죠. 그만큼 연주자와의 관계가 내밀해요. 누가 연주하느냐에 따라 뿜어져 나오는 소리도 다 다르고요. 호흡만으로 4옥타브까지 소리를 낼 수 있고 한 번에 여러 음을 내 화음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애수를 자극하는 음색이 하모니카의 매력이죠.



그의 하모니카 사랑은 충만했으나 이 세상은 이 작은 악기를 무시하기 바빴다. ‘하모니카도 악기냐’는 무시가 돌아오기 일쑤였다. 직업으로 삼기엔 전공도 무대도 없었다. 길은 만들면 되는 것. 직접 전공을 설계해 유학길에 나섰고 ‘어디든 내가 서는 곳이 무대’라는 생각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갔다. 노르웨이 국립음악원 역사상 최초 하모니카 전공 졸업, 예술의전당 단독 리사이틀 공연, 최초의 하모니카 협주곡 ‘미하일 스피바코프스키’ 국내 첫 연주…. 하모니시스트 이윤석을 설명하는 지금의 수식은 불모의 땅을 스스로 개척하며 일궈낸 결과다.

작곡과 입시에서도 하모니카를 불었다고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국내 대학엔 하모니카 전공이 없었어요. 유년기 땐 그저 취미생활로 즐기는 정도였죠. 그럼에도 하모니카에 대한 애착이 강했어요. 입시에서 자유악기를 하나 연주해야 했는데 문득 하모니카 소리를 들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입학처에 문의하니 이전까지 아무도 이 악기로 시험 본 사람이 없다더군요. ‘장난하는 거 아니냐’고 의심하는 분위기마저 느껴졌죠. 입시장에 하모니카를 들고 서 있으니 다른 수험생들은 ‘한 명은 제꼈다’는 표정이었고요.

대학에선 전공에 더 깊이 몰두해야 하는 환경이었을 텐데요.
책상에 앉아 작곡 이론을 공부하는 게 재미없었어요. 어릴 적 하모니카를 들고 무대에 섰던 기억이 자꾸 저를 건드렸죠. 세계적인 하모니카 연주자 지그문트 그로븐의 CD를 들으면서 매일 연습했어요. 그러던 중 그가 내한공연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2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있을 때였는데 장기자랑으로 하모니카를 연주해 포상휴가를 받아 공연엘 갔어요. 그때부터 막무가내로 그를 향한 구애작전이 시작됐죠.

거장이 응답을 하던가요?
사인을 받으면서 이메일 주소를 물어봐 매일 편지를 썼어요. 나 좀 가르쳐달라고요. 놀랍게도 연주 영상을 찍어 보내면 선생님이 피드백을 해주셨어요. 첫 내한공연 이후 5년 연속 한국에서 공연을 했는데 그때마다 직접 만나 가르쳐주셨고요.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내한공연 땐 함께 무대에 올라 협연을 했습니다. 제 우상과 나란히 서다니 ‘성덕’이 된 거죠.

그때부터 진정한 하모니시스트의 길로 접어든 거군요.
대학생 때부터 프리랜서 하모니카 연주자로 활동했어요. 처음엔 무대가 없으니 동호회나 교회에서 공연을 했어요. 관객들 반응은 늘 좋았습니다. 그런데 세계 최정상의 연주를 눈앞에서 보고 들은 저로선 만족이 안 되더군요. ‘하모니카의 진정한 소리는 이게 아닌데, 훨씬 좋은 소리가 저곳에 있는데’ 싶어서요. 지그문트에게 제대로 배워야겠다는 결심이 섰습니다.

노르웨이 국립음악원 최초로 하모니카 전공으로 입학했죠.
노르웨이가 특별히 하모니카 저변이 넓은 나라는 아니에요. 오로지 선생님 한 분만 보고 간 거였어요. 정규 코스를 통해 배우고 싶어 대학에 지원했습니다. 노르웨이 국립음악원은 학생이 전공을 직접 설계해 지원하는 게 가능했거든요. 하모니카 전공에 지그문트 그로븐을 교수로 초빙하겠다는 계획서를 제출해 통과됐어요.

그 후론 탄탄대로였나요?
전혀요. 매일 혼나고 울기 바빴어요. 막상 제대로 배워보니 제 실력이 형편없었거든요. 평생 모범생으로 살아온 탓에 이전까진 누구에게 혼나본 적이 없었어요. 다 때려치우고 돌아가고 싶었죠. 하지만 일을 너무 크게 벌려놓은 통에 그만둘 수조차 없었어요. 꾸역꾸역 버텼습니다. 그런 날들도 쌓이고 쌓이니 실력으로 돌아오더군요.

제 발로 불모지대로 걸어들어왔으니 당연히 힘들었을 법합니다.
작곡을 계속했더라도 미래가 마냥 안정적이진 않았을 겁니다. 음악을 직업으로 삼는다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에요. 물론 하모니카 연주자가 된다는 건 모든 길을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는 걸 뜻해요. 하지만 연주할 때만큼 제 삶에 행복한 순간도 없어요. 안전하되 불행한 삶보단 불안해도 행복한 삶이 낫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등 무대가 넓어졌습니다. 금난새 지휘자와도 여러 번 협연했죠?
금 선생님은 비주류 악기와 협연하는 걸 즐기세요. 그럼에도 첫 협연 땐 무척 떨렸어요. 공연이 끝난 뒤엔 딱 한마디 하시더군요. “재밌네?”라고. 이후로 100번 넘게 협연을 했습니다. 3월엔 함께 하와이 공연투어도 할 계획이고요.

활동하기에 주변 여건도 나아졌나요?
1년 내내 공연은 계속 있습니다. 하지만 저변이 넓어졌냐고 하면 그건 아니에요. 새로 도전하는 이에겐 여전히 기회가 적고 애초에 하려는 이가 드문 것도 사실이에요. 클래식 하모니카는 연주곡도 많지 않습니다. 하모니카 클래식 협주곡이 처음 만들게 진 게 불과 1950년대거든요. 악보를 구하기 어려운 경우도 허다하고요. 계속 곡을 발굴하고 무대에 선보이는 게 중요해요. 연주곡을 직접 작곡하고 친숙한 영화음악이나 가요를 편곡해 대중이 좋아할 만한 음악도 만들고 있어요.

앞으로도 할 일이 많겠습니다.
후학을 길러야죠. 지금은 노년층이 은퇴 후 배우는 악기 정도로 인식되고 있어요.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도록 전문 교재도 만들고 동영상 강의도 제작하려고 합니다. 하모니카는 깊이 알수록 정말 매력적인 악기거든요.

누구보다 하모니카를 사랑하지만 때로는 손바닥만 한 이금속덩이가 ‘남’처럼 느껴질 때도 있단다. 매일 연습해도 평생 ‘완성’은 없는 것이 연주자의 운명이라서다. 그럴 땐 자신의 스승을 떠올린다. 1946년생, 일흔아홉의 나이에도 무대에 오르는 지그문트 그로븐. “그처럼 오래도록 연주할 수 있다면 바랄 게 없어요.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소리가 있다는 걸 더 널리 전하고 싶습니다.” 하모니시스트 이윤석의 꿈이 그의 두 손 안에서 오롯이 자라고 있다.

조윤 기자


[자료제공 :icon_logo.gif(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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