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아이답게! 공부보다 중요한 것은 공동체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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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첫 협동조합형 공동육아기관 ‘도토리마을방과후’
“끼야아아!”, “이것 좀 봐봐”.
서울 지하철 6호선 망원역과 마포구청역 중간쯤 되는 성산동 골목, 2월 초 강추위에도 아침부터 왁자지껄 웃음소리가 요란했다. 아이들 목소리를 따라 도착한 회색빛 건물엔 ‘아이가 아이답게 자라는 곳’이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수은주가 곤두박질친 탓인지 입구에 쌓인 눈은 녹을 기미조차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어린 학생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았다.
건물 2층으로 올라 현관문을 여니 수십 켤레의 신발로 빼곡한 신발장부터 눈에 들어왔다. 바깥의 냉기는 온데간데없이 따뜻한 기운과 함께 아이들의 밝고 우렁찬 인사소리가 울려퍼졌다. 낯선 손님을 보고 대뜸 손을 건네며 인사를 청하는 아이, 허리를 꼭 붙들고 반가움을 표시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한 발짝 떨어져서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는 아이도 있었다.
부모와 교사가 함께 운영하는 전국 최초 협동조합형·생활형 공동육아기관 ‘도토리마을방과후’의 풍경이다. 1996년 첫 공동육아 어린이집(우리어린이집)의 방과후 방에서 출발했으니 벌써 30년이 돼간다. 당시 교육에 뜻이 맞는 부모들이 2000년 ‘도토리방과후’를 만들었고 2017년 고학년 대상 ‘성미산마을방과후’와 통합하면서 ‘도토리마을방과후(이하 도마방)’가 됐다.
아이들을 누군가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라 마을 안에서 조합원이 함께 키운다는 생각으로 만들어진 공간이다. 현재 초등생 47명(1~6학년)과 선생님 9명(5~10년 이상의 공동육아 교사 경험이 있는 정교사 5명, 간식 담당 교사, 장애비장애통합교사, 시간제교사)이 생활 중이다.
선행학습보다 더불어 사는 공동체 의식을 가르치는 것이 더 큰 교육이라는 도마방의 운영 원칙은 아이들의 하루 생활 속에 녹아 있다.
“여기 오면 항상 친구들이 있어요”
학기 중이었다면 오후 한 시는 돼야 도착했을 초등학교 저학년생들이 방학 기간인 이날은 오전 8시 30분부터 도마방을 찾았다. 아이들은 익숙한 듯 이름이 붙은 사물함에 겉옷을 정리한 뒤 하고 싶은 놀이를 시작했다. 밤새 밀린 대화를 풀어놓느라 바쁜 아이들 틈에서 조용히 자신만의 독서 시간을 갖는 아이도 있었다.
도마방 풍경은 가정집과 크게 다르지 않다. 널찍한 방 세 개와 작은 방 두 개, 그리고 화장실 두 개. 거실 역할을 하는 가장 큰 방 한쪽에는 음식 조리가 가능한 싱크대와 개수대가 갖춰져 있다. 거실 중앙 책상으로 선생님 한 명과 남학생 대여섯 명이 모여들었다. ‘움직이는 애벌레’ 모형 만들기가 시작됐다.
“안테나! 이렇게 하면 될까?”, “맞아. 근데 이쪽을 좀 잘라보는 게 어때?”
아이들은 선생님을 ‘안테나’라고 부르며 평어(이름 호칭에 반말을 쓰는 형태)로 대화했다. 다른 선생님을 부를 때도 ‘선생님’ 대신 ‘별칭’을 사용했다. 한 아이는 기자에게 “별칭이 뭐야?”라고 묻기도 했다. 복도 끝 방에서는 ‘장수풍뎅이 집 흙갈이’가 한창이었다. 몇몇 아이는 유충을 손바닥 위에 올린 채 장수풍뎅이에 대한 지식을 뽐내고 있었다.
대다수 아이가 1학년 때부터 방과후에 다니기 때문에 도마방 친구들과 허물없이 지내는 분위기다. 이든(11) 양은 “여기 오면 항상 친구들이 있다. 같이 얘기하는 게 제일 재밌고 밖에서 하는 공동체 놀이도 좋아한다”고 말했다. 4학년생 연서 양은 “부모님이 일을 하시기 때문에 집에서 아침밥만 먹고 여기로 온다. 친구들이랑 놀다가 5시가 되면 학원으로 간다”고 말했다. 6년간 도마방을 다닌 연서 양의 오빠는 올해 중학생이 돼 도마방 졸업을 앞두고 있다.
하교 후부터 저녁 7시까지
정오가 가까워지자 거실에서 고소한 냄새가 풍겼다. 점심식사 시간이 됐다는 신호다. 이날 메뉴는 갓 지은 밥과 시래기된장국, 제육볶음, 호박전, 배추김치, 무생채였다. 방학 때면 당일 아침 학부모들이 반찬을 두고 간다고 한다. 배식은 학년별로 이뤄진다. 아이들은 식탁마다 모든 친구가 앉고서야 수저를 들었다. 그리고 이현주의 시 ‘밥먹는 자식에게’를 외우기 시작했다. “천천히 씹어서 공손히 삼켜라. 봄부터 여름 지나 가을까지 그 여러 날들을 비바람 땡볕 속에 온 쌀인데. 그렇게 허겁지겁 먹어서야 어느 틈에 고마운 마음이 들겠느냐….” 30여 분의 식사 시간은 아이들이 개인 식판을 설거지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아이들의 진짜 놀이는 이제부터다. 오전 내내 몸을 움직였음에도 지친 기색이 없다. 공놀이, 공기놀이, 종이접기, 나무블록 쌓기 등 무리를 지어 오후 시간을 보냈다. 모든 놀이에는 담당 선생님이 함께한다. 독서 삼매경에 빠진 아이들도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지우(10) 양이 눈에 띄었다. 장애를 가진 지우 양 곁에는 보조교사가 늘 함께한다. 덕분에 지우는 큰 어려움 없이 하루를 지낸다.
학기 중 도마방 생활도 방학 기간과 크게 다르진 않다. 수업을 마치고 도마방에 모이면 손을 씻고 이를 닦는 게 먼저다. 그다음 책을 읽거나 숙제를 하고 자유놀이까지 하고 나면 배가 출출해지는 오후 3시다. 영양사 출신 선생님이 만든 ‘친환경 간식’을 먹는 시간이다. 역시나 아이들은 상 닦기, 그릇 챙기기, 설거지를 스스로 해야 한다. 요일에 따라 공동체 놀이, 모둠회의, 야외 나들이 등이 진행되고 오후 6~7시에 집으로 돌아간다.
아이는 교육 대상 아닌 삶의 주체
하교 후 곧장 학원으로 가는 것이 요즘 초등학생의 공식(?)이라면 도마방 아이들은 다른 게 맞다. 스스로 놀이를 만드는 ‘스스로데이’, 여름·겨울 2박 3일 여행 ‘들살이’, 자전거 타기 등 정말 열심히 놀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 더 들여다보면 아이들이 나이와 관계없이 대화하고 규칙을 세우며 상호존중의 자세를 배우는 과정이다. 도전과 실패를 반복하면서 넘어지더라도 금방 일어설 수 있는 힘을 기른다. 놀이방법도 교사 대신 아이들이 주도적으로 구성하게 한다. 한 학부모는 “많은 아이가 하교 후 학원을 돌고 고개 숙여 핸드폰만 보는데 우리 아이에겐 더 생기있는 생활경험을 주고 싶었다. 아이가 형, 동생들과 폭넓고 다양한 소통을 경험하면서 몸도 마음도 단단하게 클 수 있어 좋다”고 후기를 남겼다. 도마방 교사 장영진 씨는 “아이들과 ‘생활한다’는 표현이 맞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배움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놀이로만 볼 수 없는 활동도 많다. 이를테면 동네 어르신 간식 나눔을 통해 공동체 의식 배우기라든지, 1년에 한 번 열리는 성교육과 인권감수성을 높이는 도서 읽기 등이다. 최근에는 인근 성미산학교(대안학교), 개똥이네책놀이터(동네책방), 도마방이 뭉쳐 고학년을 대상으로 한 사회 이슈 강의도 있었다.
도마방은 아이들을 돌봄과 교육의 대상이 아닌 삶의 주체로 바라본다. 도마방이 정의하는 ‘교육’ 또한 아이들이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는 과정이다. 아이들이 살면서 필요한 생활습관을 스스로 익힐 수 있도록 독립성을 길러주고 제 목소리를 낼 줄 아는 아이로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이 깔렸다.
‘세상의 소금이 될 어린이가 자라는 집.’ 도마방 교실에 걸린 액자 문구다. 그야말로 ‘아이를 아이답게’ 키워내기 위한 부모와 교사의 노력의 집합체다. 다만 운영을 지속하기 위해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남아 있다. 학부모의 출자비와 월 보육료만으로 운영비용을 충당하고 있는 데다 방과후 교사는 법적으로 교사 직위를 취득할 수 없어 경력조차 인정받지 못한다. 나날이 줄어가는 학생 수도 난제다. 그럼에도 도마방은 멈출 수가 없다. 성산동 골목을 가득 채운 아이들의 목소리 덕분에 활기가 도는 마을, 도마방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다.
이근하 기자
도토리마을방과후 교사 장영진 씨
“내 역할은 아이들과 함께 노는 것”
청소년 지도사를 꿈꾸며 활동가로 일했던 장영진 씨는 우연히 접한 방과후 교사의 매력에 빠져 방과후 교사가 됐다. 올해로 13년 차다. 그의 목표는 아이들에게 혼자 노는 것보다 어울려 노는 게 더 재밌다고 가르쳐주는 것이다.
장 씨는 아이들에게 ‘안테나’로 불린다. 도토리마을방과후(이하 도마방) 교사의 역할은 아이와 놀아주는 것이 아닌 ‘같이 노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모든 교사가 별칭과 평어를 쓴다. “동네에서 마주친 졸업생들이 존댓말을 쓰는 경우가 있어요. 어색해서 ‘우리 사이 벌써 멀어졌느냐’고 우스갯소리를 건네기도 해요.”
하루 중 절반 이상을 아이들과 보내다보니 매 순간이 재미있을 수만은 없다. 화가 올라오는 순간도 가끔 생기지만 아이들 웃음 한 방이면 눈 녹듯 사라진다고 한다. 사춘기가 찾아온 고학년생 아이들과도 스스럼없다. 그가 졸업식 축하공연 연습실에 들어서자 아이들은 “오~ 안테나 왔다”라며 환히 반겼다.
그가 생각하는 ‘아이가 아이답게 자란다’는 ‘속도대로 크는 것’이다. “교사들마다 생각의 차이는 있겠지만 저는 아이돌 노래가 아이들 노래는 아니라고 봐요. 애들이 이해하기도 따라부르기도 어려운 가사 투성이예요. 성조숙증을 겪는 아이들이 많아진 데는 대중문화 흡수 속도의 영향도 있어요. 아이들이 원래 속도대로 누리면서 커야 하는데 안타까워요.”
방과후 교사로 일하면서 아쉬움이 있다면 교사 경력을 인정받을 수 없다는 점이다. “공동육아 초등방과후 교사라는 명칭은 저희끼리만 쓸 뿐 공식적으로 명명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법제화를 준비하고 있고요. 돌봄기관으로 공인받으면 정부 지원도 받을 수 있고 도마방을 더 오래오래 이어갈 수 있지 않을까요?”
그는 아이들에게 ‘편한 선생님. 재밌게 놀았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했다. 그의 초등학교 시절은 동네 골목, 놀이터에서 또래 친구들과 놀았던 추억으로 가득하다. 반면에 요즘 초등생들은 하교 후엔 학원으로, 학원에서 친구를 만날 수 있는 시간도 고작 쉬는 시간 10분 남짓이다. 그는 매일 ‘내일은 도마방 아이들과 어떻게 하면 더 즐겁게 놀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안고 퇴근한다.
[자료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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