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는 불완전한 것? 세상을 다르게 감각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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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미술공간 개막작 ‘감각한 차이’ 엄정순 예술감독
28년 전, 엄정순 현대미술 작가가 충북 충주의 한 장애인학교에 찾아들었을 때 주위에선 물음표가 쏟아졌다. ‘잘나가는 미술작가가 왜?’ 독일 유학에서 돌아와 대학의 전임교수로 있던 때였다. 교수직을 뒤로한 채 시각장애 학생들의 미술수업을 돕겠다고 나섰으니 세간의 궁금증은 당연했다. 게다가 그저 자원봉사자 신분. 학교 운동장 한편에 있는 컨테이너를 빌려 3년 동안 학생들에게 미술을 가르쳤다. 작가는 갑작스러운 결심은 아니었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유독 시각이 예민했어요. 숟가락에 비친 괴물, 강가를 흐르는 주스…. 내가 본 걸 말하면 어른들은 거짓말이라고 했죠. 실제로 본 장면에 어린아이의 판타지를 더해 이야기한 것 같은데 그런 반응이 상처로 남았어요. ‘본다는 것은 뭔가’라는 질문이 평생의 화두가 됐습니다. 그 생각을 오래 하다 보니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뭘까’라는 생각에 다다르더군요. 시각장애 학생들을 찾아간 건 그 답을 찾는 여정이었어요.”
‘앞이 안 보이는 사람이 어떻게 미술을?’, ‘시각장애인에게 굳이 미술이 필요할까?’ 편견은 여전했지만 믿음엔 흔들림이 없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상상하지 않기에 예술적 가능성은 더욱 충만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 믿음은 1996년 아트랩 ‘우리들의 눈’ 설립으로 이어졌고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를 비롯해 찾아가는 맹학교 미술수업, 점자촉각 아트북 프로젝트 등 기존에 없던 새로운 미술교육을 탄생시켰다.
“시각은 세상을 이해하는 한 가지 수단일 뿐입니다. 누군가는 세상을 보는 다른 눈을 가졌단 걸 확인시켜주고 싶었어요.”
지난해 12월 문을 연 모두미술공간(서울 중구)의 개막작 예술감독을 엄 작가가 맡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모두미술공간은 국내 최초의 장애예술인 표준전시장이다. 장애예술인들의 작품을 누구나 쉽게 감상할 수 있도록 정부가 나서 조성했다. 개막작 ‘감각한 차이’에선 세상을 자신만의 해상도로 바라보는 이들의 작품 다섯 점을 선보인다. 엄 작가는 다양한 장애를 가진 예술인 4인과 비장애예술인 2인의 이야기를 한데 모았다. 그는 “장애는 부족함이 아니라 세상을 다르게 감각하는 차이일 뿐”이라며 “그 다름에서 비장애인이 생각해낼 수 없는 창의력이 나온다”고 했다. 엄 작가를 따라간 전시장. 그가 300여 권의 점자책으로 연출한 설치작 ‘감각의 벽’과 마주했다.
왜 ‘감각의 벽’인가?
비장애인은 점자책을 볼 일도 없고 대다수 사람은 읽을 수조차 없다. 점자를 더듬어보면서 비장애인으로서 사용하지 않았던 새로운 감각을 깨워보자는 취지다. 300여 권의 점자책은 실제 교과서로 쓰였던 것을 기증받았다. 관람은 순서가 없지만 감각의 벽을 먼저 체험해보길 권한다.
개막작 제목부터 독특하다. ‘감각의 차이’가 아니라 ‘감각한 차이’라니.
개막작에 참여한 작가들은 손발이 불편하거나 앞이 잘 안 보이고 듣는 데 어려움을 겪는 등의 장애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장애는 비장애인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감각하게 한다. 그런데 사회에선 그 차이를 부정적으로만 바라본다. 예술은 장애가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분야다. 세상을 새로운 관점, 남들과는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감각한 차이라는 제목은 장애예술인을 감각의 주체의 자리에 놓음으로써 그들의 관점에서 세상을 다른 해상도로 바라보자는 의미다.
대표적으로 박찬별 작가는 기존에 없던 ‘0호 캔버스’에 그림을 그렸다.
시각장애는 전맹부터 저시력까지 무척 다양하다. 박 작가는 시야가 전방 5㎝로 매우 좁게 보이는 경우다. 그는 자신이 보는 세상을 0호 캔버스에 그린다. 0호 캔버스는 가장 작은 1호 캔버스보다도 작은, 규격에 없는 사이즈다. 때문에 공방에 캔버스를 직접 주문해야 하는 데다 크기도 제각각이다. 또한 작가는 너무 강하거나 밝은 빛을 볼 수 없다. 새벽이나 노을이 지는 시간의 풍경을 주로 그리는 이유다. 누군가는 약점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을 예술세계로 적극적으로 끌어와 오히려 자신만의 개성으로 삼은 거다.
그럼에도 장애예술인이 겪는 어려움이 많을 텐데.
물론이다. 박 작가의 경우 시야가 좁으니 잘 다치기도 하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는다. 게다가 멀리, 크게 보고 싶은 욕망이 왜 없겠나. 그러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0호 캔버스 그림 111개를 모아 거대한 눈의 형태로 만든 것이 ‘나, 그리고 백 개의 망원경’이다. 비장애인에게도 결핍은 삶의 동력이 되기도 하지 않나. 장애예술인은 어려움도 많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새로운 것들이 나온다.
작품을 관람하는 데에도 다른 시선이 필요할까?
장애예술인은 표준화된 삶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특별히 작가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가지면 좋다. 가령 강승탁 작가는 강렬한 색감의 호랑이 그림을 많이 그리는데 어떤 이유일까? 강 작가는 발달장애를 지녔는데 어려서부터 주위의 불편한 시선이나 괴롭힘으로 힘들어했다. 그런 상처를 약한 이들을 지켜주는 맹수를 그림으로써 회복했다고 한다. 전시장에선 강 작가의 일상을 촬영한 영상도 함께 상영하고 있는데 영상 속 그는 평소 중절모를 쓰고 다닌다. 역시 강해 보이고 싶다는 욕망과 관련이 있다. 모두미술공간은 쉬운말 해설로 미술이 어렵게 느껴지지 않도록 하는 데도 공을 들였다. 리플릿을 꼼꼼히 읽어보면 작가와 작품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앞서 엄 작가는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로 큰 주목을 받았다. 매년 시각장애 학생들과 함께 직접 코끼리를 찾아가 만져보고 자신이 느낀 대로 그것을 그려보는 정기 프로젝트다. 코가 없는 코끼리, 납작한 코끼리, 기둥처럼 우뚝 선 코끼리…. 아이들의 그림은 통념을 깡그리 부수는 것이었다. 이후 엄 작가는 대형 설치작 ‘코 없는 코끼리’를 선보이는 등 독특한 예술 영토를 구축해나갔다. 우리가 코끼리에게서 봐야 할 것은 코에만 있지 않다는 깨달음과 함께였다.
오랫동안 장애 학생들과 함께한 것이 어떤 영향을 미쳤나?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를 통해 본다는 것의 개념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들은 코끼리를 감각하기 위해 수없이 어루만지고 킁킁 냄새를 맡고 코끼리가 내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등 온몸을 사용한다. 내가 눈으로만 스윽 보고 지나쳐온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렇게 온몸의 감각으로 느끼고 그린 코끼리는 눈으로만 본 코끼리와는 딴판이었다. 어쩌면 코끼리의 본질에 더 가까워보였다. 그동안 책에서 본 것, 관념적으로 아는 것을 본 것이라고 착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싶더라. 그때부터 예술한다며 폼 잡던 버릇도 싹 고쳤다(웃음).
그들에게서 오히려 미술을 배운 셈이다.
그간 장애인들과 같이 다닌다는 이유로 무시도 당하고 그들을 이용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도 샀다. 봉사의 개념 또한 아니다. 그들과 나는 함께 작업을 하는 파트너다. 이전까지 난 하루 10시간 아틀리에에 머물며 내 안에만 골몰하던 작가였다. 그런데 학생들을 만나 비로소 관념이 아닌 몸으로 감각하는 방법을 배운 거다.
이번 개막작에선 장애인 간에 연대한 작업도 눈에 띈다.
휠체어 사용자인 영국 작가 라일라 카심은 어떻게 하면 장애인을 집밖으로 끌어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했다. 그러다 일본 시부야 지역의 장애인에게 글씨를 쓰게 하고 그것을 62종의 폰트로 개발한 것이 ‘시부야폰트’다. 시부야폰트는 지역사회는 물론 구글 같은 세계적 기업에서도 사용할 만큼 상업화에 성공했다. 장애인들이 쓴 글씨는 거칠고 비뚤비뚤하지만 그것을 부족한 것이 아닌 독특함으로 봤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시장 초입에서 본 ‘예술은 장애를 무거워하지 않는다’는 문구를 떠오르게 한다.
사실 장애를 편견 없이 대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장애인을 보면 일단 피하게 되고 반대로 도와줘야 할 것 같고 장애에 대해선 이야기하면 안될 것으로 느낀다. 그런데 예술이라는 우회로를 통해 우리는 훨씬 자유로워진다. 예술엔 경계가 없기 때문이다. 장애예술가들도 마찬가지다. 살면서 얼마나 상처가 많겠나. 그것을 예술을 통해 치유하고 세상에 이야기할 수 있다. 예술은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를 허무는 가장 좋은 처방이다.
모두미술공간이 어떤 곳이길 바라나?
어떤 사회나 소수자들은 자신들만의 문화를 만들어낸다. ‘퀴어문화’가 대표적이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많은 소수자가 바로 장애인이다. 그런데 장애문화라는 건 없지 않나. 모두미술공간이 장애예술의 플랫폼으로서 장애문화를 꽃피울 수 있길 바란다. 관객들에게 말하고 싶은 건 자신이 살아온 울타리를 벗어나 한 번쯤 다른 세계에 들어가보라는 거다. 내가 그랬듯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될 것이다. 모두미술공간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조윤 기자
국내 최초 장애예술인 표준전시장
‘모두미술공간’
문화체육관광부는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과 함께 2024년 12월 12일 장애예술인 표준전시장 ‘모두미술공간’을 개관했다. 이곳은 장애인과 비장애인 누구나 예술을 통해 소통할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 2023년 10월 장애예술인 표준공연장 ‘모두예술극장’ 개관에 이어 조성한 것이다. 전시장에서는 장애유형별로 콘텐츠 접근성을 강화한 기획전시를 제공하며 소통공간에서는 장애예술인의 작업과 교류를 뒷받침할 계획이다.
개관작 ‘감각한 차이’에는 장애예술인 작가 네 명과 비장애예술인 두 명이 참여했다. ▲박찬별 작가가 0호 캔버스에 그린 작품 100여 점을 모은 ‘나, 그리고 백 개의 망원경’ ▲강승탁 작가가 자신을 괴롭히는 이들에 대한 복수를 꿈꾸며 그린 ’무지개 호랑이‘ ▲사운드 아티스트 원우리가 청각장애 무용수와 협업한 영상작 ’96BPM’ ▲김령문·백승현 부부 작가가 함께한 참여형 설치작 ‘언덕 위의 파도’ ▲디자인 디렉터 라일라 카심이 장애인들의 글씨를 폰트로 생산해낸 ‘시부야폰트’ 등이다.
개관작은 2월 7일까지 펼쳐지며 누구나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쉬운말 해설, 색약보정 안경, 점자 해설서, 휠체어, 전동 휠체어 충전기 등이 제공돼 무장애 관람 환경을 제공한다.
주소 서울 중구 한강대로 416 서울스퀘어 별관 5층
관람 시간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매주 월요일 휴관)
관람료 무료
문의 (02)760-9797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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