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패션아이템 봉황장식 옥비녀의 주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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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딸을 시집보낼 때 혼수품 리스트에 빠지지 않는 것이 비녀였다. 조선의 마지막 공주 덕온공주(1822~1844)의 5m가 넘는 혼수 리스트에도 비녀가 들어 있다. 비녀는 한복의 우아함을 한층 돋보이게 하는 여인들의 필수품이자 사치품이었다. 비녀는 ‘부녀자’가 쪽을 진 머리를 고정할 때 사용하는 도구다. 비녀를 ‘부녀자’가 사용한 도구라고 정의한 이유는 결혼한 여인들이 혼인했음을 드러내는 표식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결혼을 하지 않은 처녀는 머리를 올리지 않고 땋아 내려 댕기로 묶는다. 댕기가 처녀의 상징이라면 비녀는 부녀자의 상징이다. 남자가 혼인 후에 상투를 튼 것과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비녀가 비록 실용적인 목적으로 제작됐다고 하더라도 몸에 착용하는 도구인 만큼 기왕이면 더 예쁘고 멋진 장식품이 되기를 원한다. 이것이 금비녀, 옥비녀, 은비녀 등 다양한 재료의 비녀가 제작된 이유다. 비녀는 나이를 불문하고 여인들에게 최고의 패션아이템이었다.
또 비녀의 장식물은 비녀를 꽂는 사람의 사회적 지위와 신분을 과시하는 수단이었다. ‘영친왕비 봉황장식 옥비녀’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의 부인 이방자 여사가 1922년 순종 황제를 알현할 때 대례복인 적의(翟衣)와 함께 착용한 장식품이다. 옥으로 만든 봉황에 금속으로 장식하고 진주, 비취, 산호, 유리구슬 등을 더해 격조 있고 품격 있는 문양의 비녀를 만들었다.
‘백옥영락잠’도 마찬가지다. 긴 백옥의 비녀에 머리 부분을 투각한 다음 겉면에 매화, 모란, 국화, 박쥐, 나비, 영지 등을 꾸몄으며 사이사이에 진주 떨새를 장식했다. 그 화려한 색깔도 볼 만하거니와 정교한 세공기술이 저절로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런 봉황장식은 왕비나 대비 등 왕실여성만 사용할 수 있었으니 비녀만으로도 사회적 신분을 드러냈다고 하겠다. 영친왕비 비녀세트는 우리 전통문화의 화려함을 확인할 수 있는 공예품이다. 한민족은 검소한 것을 좋아해 흰옷만 입는 백의민족이라는 고정관념이 대단한 편견임을 보여주는 증거다.
처음 영친왕비의 비녀를 보던 날 돌아가신 어머니가 떠올랐다. 유년시절에 내가 본 어머니는 생전에 항상 쪽머리에 은비녀를 하고 계셨다. 아무런 장식도 들어 있지 않고 길이도 짧은 비녀였다. 쪽머리가 풀어내리지 않도록 하는 실용적인 용도에 충실한 민비녀(용무늬를 새기지 않고 법랑도 칠하지 않은 비녀)였다. 그래서 비녀라면 당연히 은비녀가 전부인 줄 알았다. 나중에 커서 수많은 종류의 화려한 비녀를 보고 나서야 옥비녀도 아니고 칠보비녀도 아닌 어머니의 은비녀가 떠올라 애달픈 적이 있었다. 8남매를 낳아 기르느라 거울 한 번 제대로 볼 여력이 없으셨던 어머니의 삶이 바로 그 민비녀 같았기 때문이다.
봉황장식을 올린 영친왕비의 비녀는 한국의 공예기술을 알릴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다. 그러나 장식성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수많은 은비녀들 또한 그 비녀를 꽂았던 여인들의 삶을 가늠해볼 수 있는 귀한 작품이다. 그래서 둘 다 소중하다. 중국의 치파오도, 베트남의 아오자이도 그 옷을 입은 여인들의 끈질긴 삶을 의미하기에 아름다울 것이다.
조정육 미술평론가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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