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강국의 원동력은 한글 자모 조합 원리 컴퓨터 이진법과 비슷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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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지킴이 40년 외길 세종국어문화원 김슬옹 원장
‘슈룹’, ‘져비’, ‘쥬련’, ‘그력’, ‘싣’…. 외국어 같기도 혹은 인터넷 신조어나 줄임말 같기도 한 이 낱말들의 정체는 뭘까? 정답은 ‘한글 최초의 낱말’이다. 세종대왕이 1446년 한글을 반포하면서 펴낸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이 같은 한글 표기 낱말이 124개(조사 포함 126개) 나온다. 앞에서 예시한 낱말들의 뜻은 우산(슈룹), 제비(져비), 수건(쥬련), 기러기(그력), 단풍나무(싣)이다. 이 외에도 별, 달, 힘, 땅, 사람 등 최초의 한글 낱말 중 80%가량은 지금도 쓰는 일상어다. 이 말들은 오랜 세월 우리 조상들이 써왔음에도 한자 시대에는 글로 적을 수 없었다. 바꿔 말하면 한글이 창제되면서 비로소 지식과 정보를 일상의 쉬운 말로 나눌 수 있게 됐다는 의미다.
훈민정음 해례본 복간 작업을 한 세종국어문화원 김슬옹 원장은 한글을 제대로 알기 위해선 우리나라 국민 모두 훈민정음 해례본을 공부해야 한다고 말한다. “해례본은 문자학뿐 아니라 철학, 과학, 수학, 음악 등이 녹아 있는 인류 최고의 고전”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해례본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 창제 사실을 알린 뒤 정인지 등의 학자들과 함께 한글의 창제 목적과 글자 원리, 사용법 등을 설명한 한문 해설서다. 문자를 만든 이가 직접 해설을 달아놓은 세계 유일의 문자해설서이기도 하다. 해례본은 국보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도 등재돼 있다. 김 원장은 “이 같은 높은 가치에도 해례본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 없다. 세종이 볼일을 보던 중 창살을 보고 한글을 우연히 창제했다는 일제의 주장이 받아들여지거나 훈민정음이 중국을 섬기기 위해 만든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라고 설명했다.
2023년은 훈민정음 창제 580주년, 해례본 반포 577주년을 맞는 해다. 해례본의 원본을 소장하고 있는 간송미술문화재단은 문화재청의 후원으로 가온누리출판과 함께 10월 9일 한글날에 맞춰 해례본 복간본(원본을 복제한 책)을 발간했다. 고서의 촉감까지 살리는 등 최대한 원본과 가깝게 만드는 현상복제 방식을 채택했을 뿐 아니라 최초로 <훈민정음 언해본>을 함께 복간해 의미를 더했다. 김 원장은 직접 집필한 ‘훈민정음 해례본과 언해본의 탄생과 역사’를 덧붙여 많은 이들이 두 책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도록 도왔다.
훈민정음 해례본이 중요한 이유가 뭔가?
한글의 창제원리를 기술해 놓은 유일한 책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해례본은 단순한 문자 해설서가 아니다. 해례본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보면 한글에 담긴 융합적 사상, 과학, 음악, 수학을 모두 배울 수 있다. 시대를 막론하고 읽는 이들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영감을 준다는 의미에서 해례본은 일류 최고의 고전이다. 더욱이 여기엔 휴머니즘이 강하게 배어 있다. 한자시대에 누구나 평등하게 지식과 정보를 나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든 게 한글이다. 영어를 예로 들면 알파벳을 안다고 해서 당장 어린아이가 신문을 읽을 순 없다. 그러나 한글은 자모만 알아도 소리를 내고 글을 읽을 수 있다. 그러니 한글은 문명사의 패러다임을 바꾼 것이고 훈민정음 해설서인 해례본은 문명사의 패러다임을 바꾼 책이라 할 만하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읽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한글에 어떤 과학, 철학, 음악, 수학적 원리가 들어 있나?
해례본은 한글이 만물의 원리인 음양오행에 따라 만들어졌음을 설명한다. 모음은 하늘( · ), 땅(ㅡ), 사람(ㅣ) 등의 삼태극을 음양의 기운에 따라 ‘ㅗ ㅏ ㅜ ㅓ ㅛ ㅑ ㅠ ㅕ’ 등의 글자를 만든 것이다. 이에 대해 해례본은 ‘우주(하늘과 땅)의 작용은 사물에서 나지만 사람을 기다려 이루어지는 뜻을 취한다’고 설명한다. 자음 기본 5자(ㄱ, ㄴ, ㅁ, ㅂ, ㅅ)는 인체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떠 만들었으니 5음(궁상각치우)에도 대응한다.
여기 책을 보면 글씨가 붓으로 쓴 건데도 컴퓨터 글꼴같이 반듯하지 않나. 그건 한글 자모가 직선과 원으로만 돼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요소만으로 합선 원리를 통해 글자를 만드는 것은 위상수학 원리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한글은 음양오행의 원리로 만들었기에 이것을 쓰는 이들은 하늘의 백성이라고 강조한 셈이다. 사람이 하늘이고 만물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2015년 해례본 복간본이 처음 발간됐다. 다시 복간 작업을 한 이유는?
교보문고에서 발간한 2015년 복간본은 1년 만에 3000질이 다 팔려나갔다. 구할 수 없으니 헌책방에서 400만 원에 거래됐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해례본의 가치를 더 많은 이들이 누릴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번 작업을 하게 됐다.
앞선 복간본과 다른 점은 뭔가?
해례본과 언해본을 동시에 복간했다는 점이 대단히 중요하다. <훈민정음 언해본>은 해례본 가운데 세종대왕이 직접 쓴 서문 8쪽과 예의 부분을 한글로 간행한 것이다. 현재 언해본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자료는 세조가 펴낸 <세종어제훈민정음>이다. 세조 5년(1459)에 나온 <월인석보>라는 불경 책 앞머리에 실려 있다. 하지만 세종 때 이미 언해본이 있었을 거라는 것이 학계의 공통 의견이다. 즉 세종이 한문 해설서인 해례본을 통해 양반이 한글을 쓰도록 설득하고, 한글 해설서인 언해본으로는 백성을 깨치려 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세종의 꿈이 무척 원대했다. 이번 복간 작업을 통해 언해본의 의미와 가치가 제대로 드러나게 된 건 물론 해례본으로 한글의 가치를 더 많은 이들이 알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한글날은 일제강점기(1926)에 제정됐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조선 말부터 한글날을 제정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시행되진 못했다. 그러다 조선어연구회가 민족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1926년 음력 9월 29일(양력 11월 4일)을 ‘가갸날’로 선포했다. 이때는 해례본이 발견되기 전이기 때문에 정확한 한글 반포일을 알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세종실록 28년에 ‘9월조에 훈민정음이 이뤄졌다’고 한 기록에 따라 9월의 마지막 날을 한글날로 정한 거다. 그러다 1940년 경북 안동에서 해례본이 발견되면서 정확한 한글 반포일이 밝혀졌다. 한글날을 양력 10월 9일로 확정한 건 1945년 광복 이후다.
한글이 주류 문자가 된 것도 해방 이후라던데.
조선시대엔 사대주의 탓에, 일제강점기엔 민족말살정책으로 한글이 널리 쓰이지 못했다. 해례본조차 500년 가까이 행방을 알 길이 없었다. 양반들이 일부러 책을 파기했을 가능성이 있다. 한문은 최소 10년, 20년은 배워야 하는데 한글 28자는 누구든 쉽게 익힐 수 있기 때문에 정보와 지식을 독점하기 위해 기득권층에서 이를 금서로 삼은 것이다. 당시 실학자조차 한글을 거부했다. 그럼에도 한글의 명맥이 끊기지 않았던 데에는 조선시대 여성의 역할이 컸다. 왕실 여성을 중심으로 <삼강행실도>, <향약구급방> 같은 실용서들이 한글로 쓰여 서서히 퍼져나갔다. 차별받는 여성들과 차별받는 언어가 만나 의도치 않은 효과를 낸 거다. 이 같은 배경을 바탕으로 나는 <조선시대 여성과 한글 발전>이라는 책도 썼다.
간송 전형필 선생이 500여 년 만에 발견된 해례본을 기와집 열 채 가격에 산 일화도 유명하다.
일찍 종적을 감춘 해례본은 어디엔가 있을 거라는 추측만 무성하다 1940년 안동 진성이씨 가문에서 발견됐다. 소장자가 싼 값에 넘기려던 걸 간송 선생이 1만 원을 주고 사들였다. 지금으로 치면 20억~30억 원에 달하는 액수다. 간송미술관은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이 시행되던 1938년에 지어졌다. 이후 2년 만에 해례본이 발견된 것은 마치 해례본을 지키기 위한 운명적 사건처럼 느껴진다.(간송 선생은 해례본을 입수한 직후 한글학자들을 도와 비밀리에 이를 필사하도록 했으며 조선총독부가 <조선일보>를 강제 폐간하기 전까지 그 해석을 연재했다. 광복 이후에는 해례본을 공개하고 훈민정음 영인본 출판을 적극 도왔다.)
문명의 발전은 문자와 깊은 관련이 있다. 한글은 우리나라가 발전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쳤나?
한글은 민주주의식 문자다. 한문 중심의 사대주의 문화를 억제하는 역할을 했고 동시에 지식이 모든 국민에게 평등하게 확산하는 데 미친 영향이 크다. 앞서 말했듯 조선시대에는 실용서들이 한글로 발행되기 시작했다. 일례로 허준이 1608년에 집필한 산부인과 계통 의서 <언해태산집요>는 한글로 쓰인 덕에 많은 산모와 아기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다.
현재 우리나라가 전 세계적인 디지털 강국이 된 것도 한글의 영향이 크다. 디지털 시대엔 누가 얼마나 빨리 지식을 습득하는지가 무척 중요하다. 한글은 이것을 가능하게 했다. 의무교육만 받으면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우리나라는 교육 저변이 상당히 넓고 국민 대다수는 대학에 진학한다. 0과 1만을 사용해 이진법으로 작동하는 컴퓨터의 원리도 한글 자모의 조합 원리와 비슷하다. 컴퓨터, 휴대전화로 글자를 입력할 때 한글만큼 편리하고 합리적인 문자가 드물다.
여전히 우리가 사용하는 한자어 중엔 ‘차별어’가 많다.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 중 하나가 파행인데 ‘절름발이 파(跛)’ 자를 쓴 것으로 장애 차별어다. 이밖에 한자어 중에는 특정 성별의 역할만 강조한 차별어가 많다. ‘유모차’, ‘학부형’, ‘보호자’ 같은 것들이다. 지금은 ‘비혼’이라는 말이 보편적으로 사용되지만 ‘미혼’이라는 말도 쓰지 않아야 한다.
외래어·외국어 표기도 보편화되고 있다. 한글보다 외국어가 더 멋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 보인다.
외래어는 안 쓸 수 없다. 다만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지하철 비상구에 ‘EMERGENCY’라고 쓰인 걸 보고 무척 놀랐다. 목숨이 달린 위급한 상황에서 누군가 저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쩔 것인가. 뉴스에선 기자가 도로 표면에 생긴 얇은 얼음막을 ‘블랙아이스’라고 표현하더라. 그건 외래어가 아니라 외국어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면 풀어서 설명해줘야 한다. 영어를 섞어 써야 멋있어 보인다는 생각 역시 일종의 사대주의일 수 있다. 무조건 한글만 써야 한다는 게 아니다. 한글에 담긴 모두를 배려하는 정신, 세종대왕의 평등정신을 지켜나가는 게 중요하다.
조윤 기자
박스기사
2023 한글주간
인공지능 말하기 대회·한글 글꼴 패션쇼…
577돌 한글날 맞아 다채로운 행사
문화체육관광부가 577돌 한글날을 기념해 10월 4~10일 ‘미래를 두드리는 한글의 힘!’을 주제로 ‘2023 한글주간’ 행사를 마련했다. 개막식이 열린 서울 서초구 한국농수산물유통공사(aT)센터에서는 10월 4일부터 사흘간 ‘한글문화산업전시회’를 통해 인공지능·챗봇·기계번역·출판 등 36개 관련 기업이 참여하는 한글 산업 아이디어 공모전 수상작을 전시하고 ‘제1회 한컴지니케이 인공지능 한국어 말하기 대회’를 진행했다.
서울 용산구 국립한글박물관에서는 제15회 집현전 학술대회(4~5일)를 시작으로 ▲한글 글꼴 패션쇼(7일) ▲뮤지컬 ‘한글의 빛, 정의의 노래’(8일) ▲‘ㄱ을 기록하다. 더 글 놀이’(9일) 등 다채로운 행사를 통해 한글주간을 축하한다. 특히 축제 기간 한글 빛 글씨 만들기, 한글 손톱 그림, 증강현실(AR) 기반 한글 체험 등 온 가족이 즐기기 좋은 체험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인천 연수구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은 ‘한글만남: 하나 된 글, 한글’을 주제로 7일부터 9일까지 박물관과 송도 센트럴파크 잔디광장에서 체험행사를 펼친다. 세종학당재단은 5일부터 11일까지 전 세계 세종학당에서 선발된 우수학습자 170여 명을 초청해 한국 전통 역사문화 체험, K-팝 콘서트 등 한류 체험 연수를 진행한다. 이밖에 한글주간 행사에 대한 정보는 공식 누리집(한글날.com)과 유튜브 채널 ‘한글주간’, 인스타그램(hangeulweek)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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