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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푸드는 K-식칼로! 쇠를 녹이는 장인정신으로 세계를 녹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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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간과 협업하는 청년 스타트업 ‘자이너’ 조혁빈 대표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단어 중에는 대장간 문화에서 온 것들이 꽤 많다. ‘담금질’, ‘연마’, ‘단련’, ‘부질(불질)없다’와 같은 말들이다. 이처럼 일상 언어까지 깊숙이 파고든 것만 봐도 대장간이 전통 농경사회에서 얼마나 중요했는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산업사회로 넘어오면서 대장간은 그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더는 일상에서 농기구를 사용할 일이 없기 때문만은 아니다. 현대인들이 값싼 공산품을 사서 쓰고 버리는 데 너무나 익숙해진 탓이다. 아무리 오랜 시간 대장장이가 정성을 들여 손으로 벼린 칼일지언정 편리함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기름칠해가며 써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할 생각도 여유도 없다.
한 20대 청년은 이 같은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창업을 결심했다. 주방용·캠핑용 칼을 비롯해 각종 생활용품을 제작·판매하는 디자인제품 브랜드 ‘자이너’의 조혁빈 대표다. 대학에서 금속공예를 전공한 조 대표는 군 복무를 마치자마자 무작정 전국의 대장간을 찾아나섰다. 대장장이의 단조(금속을 두들겨 원하는 형태를 만드는 일) 기술을 접목한 금속공예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기술’을 배우러 간 곳에서 그는 작품 하나를 위해 수백 번 쇠를 두드리고 또 두드리는 대장장이의 ‘장인정신’, 쇠를 녹여 무엇이든 만들어내는 ‘창조정신’에 깊이 매료됐다. 하지만 정작 이렇게 만들어진 작품은 신문지 몇 장에 대충 말린 채로 단돈 몇 천 원에 팔려나갔다. 그는 ‘자이너’를 설립하면서 대장장이를 바라보는 사회의 인식도 바로 서길 바랐다. 2018년 그가 스물두 살이었을 때다. 자이너는 독일어로 대장장이를 뜻한다.
자이너는 대장장이와 협업하는 국내 유일의 스타트업이다. 그가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디자인을 제시하면 대장장이가 이를 실물로 구현해낸다. 자이너 제품의 가장 큰 특징은 장인정신으로 만든 전통 제품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했다는 것이다. 대표 상품인 ‘대령숙수의 칼’은 국내 유명 셰프들도 인정하는 최고급 프리미엄 전통 식칼이다. 대령숙수라 불린 조선시대 궁중 요리사가 쓰던 칼을 전통 방식을 그대로 적용해 만들되 디자인에는 현대적 감각을 덧댔다. 농경사회의 필수품이었던 쇠스랑과 낫, 호미, 도끼는 인테리어 소품용 ‘농기구 미니어처 4종’으로 개발해 소비자가 일상에서도 대장간의 문화를 친숙하게 느낄 수 있도록 했다. 40년 경력의 이광원 대장장이와 협력해 만든 전통 무쇠 식칼 ‘K-나이프’는 전문 셰프뿐 아니라 일반 가정에서도 편리하게 쓸 수 있도록 만들어 큰 호응을 얻었다.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자이너는 창업 2년 만인 2020년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KCDF)이 인증한 전통문화 분야 청년창업기업에 이름을 올렸다.
경기 화성시에 자리한 대장간, 1400℃에 이르는 불가마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 조 대표와 마주했다. 그는 김용근 대장장이와 함께 캠핑용 칼을 만들고 있었다. 김 대장장이는 불로 벌겋게 달궈진 쇳덩이를 내리치고 또 쳤다. 그렇게 단련하기를 반복한 칼은 단단해질수록 둔탁한 소리를 냈다. 칼 하나가 완성되기까지는 최소 한 달, 그 시간 동안 대장장이는 수없이 쇠붙이를 두드리고 연마한다. 대장간 한 편엔 ‘일도(一道)’라고 쓰인 현판이 걸려 있었다.



대장간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
금속공예를 전공하면서 주얼리같이 작은 소재를 다루는 세공보다는 큰 소재를 다루는 대공이 잘 맞았다. 철 단조를 기반으로 한 작품을 만들면서 대장장이에 관심이 생겼다. 전국 대장간 리스트를 조사해 10여 곳 넘게 직접 찾아갔다. 그때 경남 의령군의 이광원 대장장이를 만났다. 대장간 일이 쉽지 않기 때문에 요즘 젊은이들은 그저 생계수단으로만 배우려고 한다. 그런데 젊은 학생이 기술을 배우고 싶어 왔다고 하니 무척 예쁘게 봐주셨다. 그 덕에 1년 넘게 직접 기술을 전수받았다.

‘공예가’가 되려다 ‘창업가’가 됐다.
기술을 배우다보니 대장장이라는 직업에 애정이 생겼다. 대장장이는 칼 하나를 만들기까지 철을 망치로 내려치는 단조 작업을 수백 번씩 한다. 이후 뜨겁게 달궈진 쇳덩이를 급속 냉각하는 담금질을 하고 또다시 칼날을 세우고 형태를 다듬는 연마 작업을 수차례 반복한다. 칼이 쉽게 깨지지 않도록 칼등부터 칼날까지 철의 강도를 다르게 하는 세밀한 과정도 거쳐야 한다. 그야말로 장인정신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만들어진 칼이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엔 무형문화재로 등록된 대장장이도 있고, 대장장이를 명인으로 지정하는 제도도 있지만 그들의 처지 역시 다르지 않다. 독일이나 일본에서는 대장장이가 만든 칼이 프리미엄 제품으로 우대받는데 국내 상황은 너무 달랐다. 우리 대장장이들의 작품도 기획과 포장만 잘하면 얼마든지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역할을 내가 할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다. 현재 약 10곳의 대장간과 함께 작업하고 있다. 이제는 김용근 대장장이처럼 주변의 소개로 협업하거나 먼저 기획을 의뢰해오는 경우도 있다.

젊은 세대에겐 대장간 개념조차 낯설 듯하다. 첫 상품 출시 후 소비자의 반응은 어땠나?
‘K-나이프’를 크라우드펀딩 사이트에 24만 원에 내놓으려 했더니 담당자가 6만 원으로 낮추라고 했다. 요즘에 누가 전통 식칼을 사겠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일이 수작업으로 만드는 탓에 인건비를 낮추는 게 불가능했다. 결국 원래 가격으로 밀고 나갔는데 한 달 만에 펀딩금액 3000만 원이 모였다. 이는 자이너가 장인이 만든 프리미엄 식칼 브랜드로 자리잡는 계기가 됐다. 대장간이나 대장장이는 젊은이들에겐 낯선 만큼 희소가치가 있다. 거기에 현대식 디자인을 결합하니 전통이 신선함으로 다가온 게 아닌가 싶다. 요즘 식품업계에서 약과가 다시 유행하는 것과 비슷하다. 컬렉터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는 건 물론 실제로 칼을 사용하기 위해 구매하는 이들도 많다.

공장에서 대량 생산한 칼과는 어떻게 다른가?
나름의 장단점이 있어 뭐가 더 좋고 나쁘다고 단정할 수 없다. 다만 공장제품은 주로 스테인리스로 만드는데, 스테인리스는 크롬 함량이 높다. 크롬은 열처리를 하더라도 금방 무뎌지는 게 단점이다. 오래 사용한 칼로 고기를 썰면 칼이 같이 밀리는 이유다. 대장간에서 만드는 칼은 여러 번 쇠를 두드려 금속을 응축시킨다. 그러면 크롬보다 탄소 함량이 높아진다. 거기에 열처리까지 하면 칼을 오래 써도 무뎌지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만든 칼은 강도가 세다 보니 깨질 수 있고 사용하면서 기름칠을 해가며 계속 관리해줘야 한다. 이 때문에 칼을 다룰 줄 아는 전문 셰프들이 많이 사용한다.

‘대령숙수의 칼’은 유명 셰프들도 극찬했다.
440c고탄소강이라는 소재로 만드는 데 구하는 것조차 어렵다. 스테인리스임에도 크롬과 탄소 함량이 모두 높은 게 특징이다. 그만큼 단단하지만 가공하기가 까다롭다. 손이 얼얼할 정도로 두드려도 단조가 잘 안 된다. 그럼에도 전통 방식대로 쇠를 직접 두드려 판재로 만들고 불에 달군 작두로 잘라내 성형한다. 칼끝 모양도 조선시대 형태 그대로 버선코 모양으로 빚는다. 마지막으로 칼의 슴베(날의 뒷 부분)를 칼자루에 꽂는 것까지 수작업으로 하고 나면 완성이다. 장인들도 작업하기 쉽지 않아 제품 개발에만 1년 4개월이 걸렸다. 반응은 무척 좋았다. 6개월 만에 크라우드펀딩으로 1억 원어치를 팔았다. 유명 요리 유튜버 ‘승우아빠’는 펀딩 당시 직접 구매했다며 방송에서 소개하기도 했다. 사단법인 국제조리산업협회 김동현 회장도 극찬했다. 이후 김 회장의 의뢰로 새로운 프리미엄 식칼을 개발 중이다.

워낙 이른 나이에 창업했다. 어려움도 많았을 것 같다.
크라우드펀딩을 진행하면서 칼 500자루 전량이 오배송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소비자 180명으로부터 항의전화를 받았다. 제품 하나를 만드는 데 3개월 정도 걸리기 때문에 이미 오래 기다린 소비자들에게 또다시 양해를 구해야 했다. 이후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뒤에는 카피브랜드가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했다. 실제로는 공장에서 생산하면서 대장장이가 만든 제품으로 둔갑해 판매하는 업체들도 있다. 너무 힘이 들어 지난해엔 사업을 그만두려고까지 했다. 그때 장인들이 ‘이 일을 할 수 있는 건 너밖에 없다’며 위로해줬다. 고집 센 장인들과 협력하면서 어려움도 있었지만 힘들 때 나를 다시 일으켜세워 준 것도 장인들이었다.

2021년 한국무역협회 글로벌 스타트업으로 인증받았다. 세계 시장에서 무엇을 보여줄 건가?
김동현 회장이 국제 마스터셰프 요리대회에 나가 창피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전 세계에서 온 셰프들에게 요리 장비를 소개해달라고 하니 저마다 자국의 칼을 자신있게 내보이는데 김 회장 손에는 일제 칼이 들려 있었다는 거다. 그가 우리나라의 전통 식칼 제작을 의뢰한 이유다. K-푸드가 해외에서 크게 각광받고 있는 만큼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 식칼이 나온다면 함께 주목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이를 위해 곧 새 브랜드 ‘모루(MORU)’를 론칭할 계획이다. 모루는 쇠를 단조할 때 쓰는 무쇠 받침대를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모루를 대한민국 대표 식칼 브랜드로 키우는 것이 목표다. 우선 말레이시아에 진출한 후 미국 ‘아마존’ 입점도 염두에 두고 있다. 몇 해 전 포스코와 협업해 폐철을 활용한 캠핑칼을 제작했는데 홍콩 등에서 이 같은 사업을 다시 해보자는 제안도 받고 있다.

대장장이 문화가 언제까지 명맥을 이어갈 수 있을 것으로 보나?
인공지능(AI)이 소설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시대에 인간이 직접 망치를 두드려 칼을 만드는 것은 오히려 독창적일 수 있다. 그렇다고 과거를 재현하는 데만 머무르진 않을 거다. 전통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걸 넘어 미래적인 제품 개발도 구상하고 있다. 자이너는 단순히 칼을 만드는 제조기업이 아니다. 대장장이의 장인정신과 창조정신을 계승하는 것이 진짜 목표다. 그 가치는 미래에도 언제고 유효하다.

박스기사
김용근 대장장이의 작업과정








조윤 기자


[자료제공 :icon_logo.gif(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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