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 바친 노병의 아리랑 “72년 전으로 돌아가도 주저 없이 달려올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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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 70주년
대한민국 명예보훈장관 된 유엔군 참전용사 콜린 태커리 씨
6·25전쟁 정전 70주년 기념식이 7월 27일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에서 열렸다. 이날 은빛 단추 9개가 달린 주홍색 코트를 차려입고 가슴 왼편에 빛나는 훈장을 걸친 유엔군 소속 영국군 참전용사인 콜린 태커리(Collin. A. Thackery, 93세) 씨가 무대에 올라 참전용사, 학생, 시민 등 4000명 앞에서 ‘아리랑’을 열창했다.
태커리 씨는 2019년 영국 가요 경연 프로그램인 ‘브리튼스 갓 탤런트(Britain's Got Talent·BTG)’에 출연해 ‘최고령(89) 참가, 최고령 우승’이라는 기네스 세계기록을 세운 영국의 유명인사다.
그는 정전 70주년을 맞아 7월 24일부터 29일까지 우리나라를 다시 찾았다. 태커리 씨는 1946년 영국군에 입대했고 19세였던 1950년 한국으로 파병됐다. 파병 당시 결혼 2주 차였던 그는 영국군 45야전포병연대 소속으로 1950년 11월 한국 땅을 밟았다. 그가 속한 포병부대는 주로 임진강에 주둔하며 공산군의 남하를 포격으로 저지하고 고지전을 벌이는 아군을 돕기 위해 지원 사격을 폈다. 태커리 씨는 327고지전투 등 여러 전투에서 중공군과 치열하게 싸웠다.
태커리 씨는 퇴역 군인을 위한 보훈요양시설인 첼시왕립병원(Royal Hospital Chelsea·RH)에서 지내고 있다. 그가 입은 주홍색 코트는 RH를 상징하는 유니폼이다. 이곳에는 부양자가 없는 65세 이상 참전용사 약 300명이 생활한다. 태커리 씨는 6년 전 아내 조안과 사별한 뒤 입소했다. 현재 태커리 씨를 포함해 한국전 참전용사는 5명이 있다.
앞서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2023년 2월 RH를 찾았다. 박 장관은 정부를 대표해 영국군 참전용사 7명에게 감사를 표하고 ‘정전 70주년 기념식’ 공식 초청장을 전달했다. 이 자리에서 태커리 씨는 즉석에서 ‘아리랑’을 불러 박 장관을 놀라게 했다. 이에 박 장관은 “한국에 초청할 테니 6·25전쟁 정전 70주년 기념식에서 ‘아리랑’을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이렇게 해서 정전 70주년 기념식에서 영국군 참전용사가 부르는 ‘아리랑’이 울려퍼지게 됐다.
7월 28일 태커리 씨를 만났다. 유명세를 치르느라 밤잠을 줄여가며 일정을 소화하는 중이었다. 숙소가 있는 서울 송파구 잠실에서 용산 전쟁기념관으로 이동하는 버스에서 대화를 나눴다. 1952년 3월 한국을 떠난 이후 처음으로 재방한한 그는 “어메이징(Amazing, 놀라운)”, “인크레더블(Incredible, 믿을 수 없는)”이란 감탄사를 연발하며 대한민국의 발전상에 놀라워했다.
71년 전과 비교해 한국이 얼마나 많이 변했나?
어메이징! 인크레더블!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해 수많은 고층빌딩을 봤다. 믿을 수 없었다. 한국인들이 정말로 열심히 일하며 세계 10위 경제대국을 만들었다. 축하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파병 소식을 듣고 두렵지 않았나?
처음에는 무서웠지만 한국에 도착해 적응한 뒤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결혼한 지 2주 만에 아내를 떠나야 했다. 헤어지며 무슨 말을 했나?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고…. 배에서 아내를 내려봤는데 아내 머리에 큰 흉터가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웃음). 17개월간의 한국 파병을 마친 후 1952년 홍콩에서 근무하며 아내와 재회했다.
한국 땅을 처음 밟았던 순간을 기억하나?
배를 타고 1950년 11월 부산항에 도착했다. 당시 미군 군악대가 우리를 환영했다.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경기 수원으로 이동했는데 철로 상태가 나빠 기차가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당시 한국은 어땠나?
여성과 아이들이 많이 희생됐다. 한국인들은 철조망에 기대어 손짓과 발짓을 해가며 도움을 청했다. 한국어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굶주리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너무 마음이 아파 눈물을 많이 흘렸다. 통조림과 비스킷을 나눠주곤 했다. 그때 음식을 나눠줬던 꼬마들이 지금은 할머니·할아버지가 됐을 텐데 어떻게 지냈는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언제 처음으로 적과 마주했나?
1950년 11월 수원에서였다. 당시 포병부대 병력이 먼저 도착했고 무기는 배에 실어 오는 중이었다. 공산군은 여자로 위장해 치마 속에 총과 칼을 숨기고 우리 주둔지를 공격했다.
기억에 남는 한국 지명이 있나?
‘임진 리버(Imjin River)’, 임진강이 기억난다. 임진에서 많은 전우를 잃었기 때문이다. 아주 추운 날씨에 중공군에 포위된 적도 있다.
한국전에서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이었나?
날이 몹시 추웠다(very cold). 다리가 꽁꽁 얼 정도였다. 당시 후유증으로 지금도 다리가 좋지 않다.
태커리 씨가 속한 포병부대는 최전방에서 싸우는 보병을 포격으로 지원했다. 포병은 보통 포의 사정거리 3분의 2쯤 되는 지점에서 포격을 한다.
하루에 가장 많은 포탄을 쏜 게 어느 정도인지 기억하나?
셀 수 없다. 수천 발을 쐈을 거다. 그때 후유증으로 청력을 많이 잃었다.(그는 양쪽에 보청기를 끼고 있었다.)
참전 이후 트라우마는 겪지 않았나?
청력을 일부 잃고 다리가 약해진 것 말고는 없다.
한국전 참전 이후에는 어떻게 지냈나?
28년 동안 군 생활을 했다. 한국전 파병을 마친 후에는 홍콩과 독일에서 대부분을 근무했다. 퇴역 후에는 건물이나 시설물 안전에 대해 자문하는 컨설턴트로 지냈다.
가족 관계는 어떻게 되나?
딸과 아들이 한 명씩 있고 손자는 4명이나 있다. 딸은 69세인데 할머니가 되진 못했다(웃음).
아내는 어떤 사람이었나?
‘군인의 아내(army wife)’로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살아야 했지만 긍정적이고 항상 밝았다. 덕분에 내 삶도 풍요로웠다. 이런 아내를 만난 나는 행운아다.
RH에서의 생활은 어떤가?
아주 좋다. 다양한 여가활동을 즐길 수 있다. 이곳에서 만난 친구 덕분에 BGT에도 참가할 수 있었다.
BGT에서 우승한 과정을 자세히 말해달라.
병원에서 함께 지내는 친구가 내게 ‘목소리가 참 좋다. 목소리를 쓰지 않으면 나중에는 목소리가 퇴화한다. 힘을 잃지 않도록 목을 계속 사용하라’고 말해줬다. 어떻게 하면 목소리를 쓸 수 있는지를 되물었고 친구는 ‘BGT에 나가보라’고 했다. 나는 ‘89세인 노인을 누가 좋아하겠느냐’고 했다. 친구의 권유로 BGT 누리집에 들어가 서류를 내려받아 참가 신청을 직접 했다.
참가해보니 어땠나?
앞에 앉은 심사위원 네 명뿐만 아니라 현장 방청객, 전 세계 수많은 이들이 나를 지켜본다는 생각에 긴장이 됐다.
BGT 참가 이후 알아보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한국에서도 뉴질랜드·캐나다 참전용사와 그 후손들이 나를 BGT에서 봤다고들 이야기해줬다. 굉장히 뿌듯했다.
부산 유엔기념공원에도 다녀왔다. 기분이 어땠나?
어제(7월 27일) 기념공원에서 먼저 간 전우 5명을 만났다. 굉장히 슬퍼 많이 울었다. 곁에 꽃을 놓아줬다. 우리 부대 전우 6명 중 4명이 전사했다.
유엔기념공원에는 유엔군 전사자·사망자 2320명이 안장돼 있다. 이 중 영국군이 890명으로 가장 많다. 이는 전사한 곳에 시신을 매장하는 영연방국가(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의 풍습 때문이다.
7월 27일 정전 70주년 기념식은 어땠나?
너무나도 멋진 행사였다. 아이들이 노래 부르는 게 참 인상적이었다. 제복을 입은 수많은 참전용사와 함께 할 수 있어 기뻤고 특히 윤석열 대통령이 참석해서 좋았다. 한국정부에 감사드린다.(태커리 씨는 “한국전 당시 미군이 사용한 비행장에 멋진 고층빌딩이 들어선 것이 신기하다”고도 했다.)
윤 대통령이 악수하며 감사하다고 했다.
아주 자랑스러웠다.
나이에 비해 굉장히 젊고 건강해 보인다.
활동적으로 지내려고 노력한다. 노래하며 호흡을 계속해서 연습한다. 힘들더라도 계속 몸을 움직여야 한다.
한국으로 오는 여정이 힘들진 않았나?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매우 즐거웠다. 항상 한국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렇게까지 발전했다는 사실은 와서야 알게 됐다.
참전을 후회한 적은 없나?
단 한 번도 없다. 72년 전으로 시간을 되돌려도 같은 결정을 할 것이다. 주저 없이 올 것이다.
한국에서 보낸 시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인가?
웃으며 인터뷰하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기억에 남을 것 같다(웃음).
한국에는 다시 올 것인가?
언제든지.
태커리 씨는 위트와 여유가 넘치는 전형적인 ‘영국신사’였다. 스마트폰을 들고 인터뷰가 언제, 어디에 실리는지, 영국에서 기사를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을 물었다.
전쟁기념관으로 이동한 그는 전사자 명부가 새겨진 동판에서 옛 전우를 찾았다. 그리곤 동판 아래 놓인 제단에 국화 한 송이를 올려놓았다. 전쟁기념관을 둘러보고는 “원더풀(Wonderful, 멋지다)” 이라고 했다.
이날 저녁에는 영국대사관이 환영 만찬을 열었다. 그는 ‘아리랑’을 포함해 노래 3곡을 열창했다. 숙소로 이동해서는 밤 12시 30분까지 다큐멘터리 촬영에 응했는데 국가보훈부가 참전용사를 위해 만든 ‘영웅의 제복’을 입었다.
다음 날인 7월 29일 새벽같이 일어나 오전 6시 20분 숙소를 떠난 그는 인천국제공항으로 이동해 오전 10시 55분 비행기를 타고 영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참전용사를 인솔한 한국인 가이드 윤혜민 씨와 휠체어를 밀어주며 활동을 도운 스태프의 친절함에도 감동했다며 “감사하고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경훈 기자
박스기사
명예보훈장관 임명된 콜린 태커리 씨
“30년은 더 활동해달라”에 “빨리 다시 불러달라”
7월 28일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태커리 씨를 대한민국 명예보훈장관으로 위촉했다. 명예보훈장관은 유엔참전국의 명망 높은 인사들을 위촉해 유엔 참전용사들의 명예선양과 권익증진을 위해 만든 제도다. 태커리 씨는 2호 명예보훈장관이다. 위촉식에 앞서 박 장관과 태커리 씨는 환담을 나눴다.
박민식(이하 박) 많은 사람들이 부산에서 열린 정전 70주년 기념식에서 부른 ‘아리랑’에 감동했다. 많은 참전용사와 국민에게 감동과 희망을 선물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통령 전용기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며 ‘참전용사들에게 감사하다. 너무 감격했다’고 말했다.
태커리(이하 태) 감사하다. 기념식에서 제복을 입은 많은 영웅을 보니 아주 좋았다.
박 한국에 오신 참전용사 중에 제일 바쁘시다.
태 리허설도 해야 하고 여기저기 초대도 받고 장관님도 만나느라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다(웃음). 곧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너무 슬프다.
박 너무 일찍 가신다. 또 초청하겠다. 대학생들에게 강연도 하시고 노래도 불러달라. 한국이 제2의 고향 아닌가. 명예보훈장관이 되셨으니 많이 활동해달라.
태 93세니까 초대하실 거면 좀 빨리해달라(웃음).
박 30년은 더 건강하게 지내실 거다. 하실 일이 아주 많다. 앞으로도 건강하고 바쁜 30년이 될 것이다.
태 이 나이까지 살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박 이제는 영국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바쁜 일정을 보내야 한다. 건강을 더 잘 챙기셔야 한다.
태 버스에 오르내리는 것부터 휠체어를 밀어주는 것까지 스태프가 많은 도움을 줬다. 항상 “Are you ok?(괜찮으세요?)”라고 물었다. 친절하게 보살펴줘서 영광이다.
박 우리의 의무다. 대우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당신은 명예보훈장관이시다.
태 감사하다. 매우 영광이다.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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