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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더라도 한국 지키겠다" 미군 179만 명 파병 3만 6940명 전사 유엔군 전사자의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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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 4만 670명, 부상 10만 4280명, 실종 4116명, 포로 5815명.
알지도 못하는 나라,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유엔군의 숫자다. 북한의 침략으로 1129일 동안 벌어진 6·25전쟁에 누적 인원 195만 명(의료지원국 포함)의 유엔군이 참전했다. 유엔 깃발 아래 6개 대륙, 22개국(전투부대 파병 16개국, 의료지원 6개국) 젊은이들이 한반도에 모였다.
미국은 유엔 참전국 중 가장 먼저 한국에 병력을 보냈다. 연인원 178만 9000명을 파병해 전사 3만 6940명, 부상 9만 2134명, 실종·포로 8176명이라는 인명 피해를 봤다. 유엔군 전사자의 91%, 부상자의 88%는 미군이었다.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북한의 남침 소식을 듣고는 이틀 뒤인 1950년 6월 27일 해·공군, 7월 1일 지상군 투입을 결정했다.
미군은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스미스 중령이 이끄는 ‘스미스 특수임무대(406명)’를 한국으로 급파했다. 미 24사단 소속으로 일본에 주둔하던 이 부대는 7월 1일 부산으로 날아와 경부선을 따라 북상했다.
7월 5일 스미스 부대와 미 제52포병대대(134명)는 경기 오산시 북방인 죽미령에서 북한군과 첫 교전(죽미령 전투)을 벌였다. 북한군을 과소평가했던 미군은 이 전투에서 150여 명이 전사하거나 행방불명되고 무기까지 잃었다. 미군과 북한군의 첫 교전은 미군의 패배였다.



최후의 방어선, 낙동강방어선
한미 양국 군대가 연합해 방어선을 폈지만 후퇴를 거듭해야 했다. 북한은 하루 10㎞씩 남하해 광복절인 8월 15일에는 한반도 전역을 점령한다는 계획이었다. 8월 1일에는 한미 양국군이 낙동강 일대까지 물러나야 했다. 국토의 92%가량을 북한군이 점령한 상황이었다(1950년 9월 초 기준).
제1·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했던 월턴 워커 장군(미 8군사령관, 육군 중장)은 미군 3개 사단과 국군 5개 사단을 마산~왜관~영덕(240㎞)에 이르는 낙동강방어선전투(1950년 8월 4일~9월 18일)에 투입했다. 육군 1사단장 백선엽 장군과 함께 낙동강을 지킨 워커 장군은 “Stand or Die!(죽음으로 사수)”를 외쳤다. 낙동강방어선, 일명 ‘워커 라인(walker line)’이 무너지면 대구는 물론 임시 수도 부산까지 위험해지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워커 라인이 무너지면 인천상륙작전은 시도조차 할 수 없게 된다는 점이었다. 워커 장군은 국군 장병들에게는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한국을 끝까지 지키겠다”고 말했다. 워커 장군의 아들 샘 워커 대위도 중대장으로 참전해 낙동강에서 싸웠다.
낙동강 전선이 튼튼하게 버틴 덕분에 인천상륙작전(1950년 9월 15일)은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의 계획대로 성공할 수 있었다. 맥아더 장군은 전황이 나빠질수록 북한군의 후방에 상륙작전을 할 필요를 느꼈다. 8월 28일 인천상륙을 결정하고 9월 15일을 작전 개시일로 확정했다.
상륙작전에 투입하기 위해 미 해병 1사단을 비롯해 국군 제1해병연대 등을 모아 미 10군단을 편성했다. 병력을 싣기 위해 미 해군 함정을 비롯해 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프랑스, 네덜란드 등에서 총 260여 척을 끌어모았다.
9월 15일 새벽 상륙이 개시됐다. 오전 8시 월미도를 점령했다. 16일 저녁 인천 외곽을 잇는 해안교두보를 확보함으로써 인천상륙작전은 성공리에 종료됐다.
유엔군과 국군이 상륙해 북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자 워커 장군도 낙동강에서부터 치고 올라갔다. 9월 28일에는 수도 서울을 탈환했다. 10월 1일 국군이 38도선을 돌파하고 10월 19일에는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탈환했다. 이어 압록강까지 진격해 통일이 눈앞에 보였다. 하지만 평양을 수복하는 날, 중국은 항미원조(미국에 대항해 북한을 돕는다)라는 명목으로 중공군을 보냈다. 또다시 국군과 미군은 후퇴해야만 했다. 1951년 초에는 중공군의 공세로 국군과 유엔군은 한강 이남 오산~영월선까지 밀려났다(1·4후퇴).
미군은 중공군 개입으로 후퇴하면서 강추위와도 싸워야 했다. 미 해병대는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장진호 일대에서 영하 30℃의 날씨에 자신보다 3~4배 많은 중공군과 맞섰다. 장진호전투(1950년 11월 26일~12월 13일)에서 미 해병 1000여 명이 전사하고 4894명이 실종, 4528명이 부상, 7338명이 동상을 입었다.
미 해병대는 후퇴하면서도 적의 진출을 지연시켰다. 장진호전투에서 보여준 미 해병대의 희생은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이어진 흥남철수작전(1950년 12월 14~24일)의 성공 바탕이 됐다.





크리스마스의 기적, 흥남철수작전
흥남철수작전은 미 10군단과 국군 1군단이 군함 193척과 민간 상선을 동원해 군인 10만 명, 민간인 10만 명을 부산·거제 지역으로 탈출시킨 작전이다. 철수가 완료된 다음 날 중공군은 흥남을 점령했다. 영화 〈국제시장〉에 등장하는 노래 ‘굳세어라 금순아’의 첫 소절(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 부두에…)은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노래한 것이다.
6·25전쟁에서 미군이 치른 주요 전투는 ▲창녕 박진지구전투 ▲숙천·순천 공수작전 ▲피의능선전투 ▲단장의능선전투 ▲지평리전투 등이 있다. 피의능선전투와 단장의능선전투는 대표적인 고지쟁탈전이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마지막에 나오는 전투 장면이 피의능선전투다.
피의능선전투는 미 2사단과 국군 5사단이 강원 양구 북방의 피의능선(983고지~940고지~773고지)을 공격해 북한군 12·27사단을 격퇴한 전투다. 계곡과 산등성이마다 피로 얼룩진 장면을 본 종군기자들은 이 능선을 ‘피의능선(Bloody Ridge)’이라고 보도했고 ‘피의능선전투’라는 이름이 붙었다.
피의능선전투에서 패퇴한 북한군은 피의능선에서 북방 6㎞ 떨어진 단장의능선(894고지~941고지~851고지)으로 퇴각했다. 단장의능선전투에서 미군·프랑스군은 북한군·중공군에 맞서 많은 사상자를 냈다. 당시 신문은 이 전투를 두고 ‘심장이 찢어질 것 같다(heartbreak)’는 표현을 썼고 그때부터 ‘단장의능선’이라 불렸다.
전쟁 당시 미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은 서부 전선을, 국군은 동부 전선을 주로 맡아 싸웠다. 경기 파주시 임진각에는 미군 참전을 기리는 참전비가 있다. 382㎡(115평) 규모 부지에 삼각형 조형물 네 개가 놓여 있는데 육·해·공군과 해병대의 참전을 의미한다. 미군 참전비 바로 앞에는 미군 참전을 결단한 트루먼 미국 대통령의 동상이 서 있다. 이외에도 ▲숙천·순천 공수작전 참가 장병을 기리는 ‘미 육군 187 공수전투단 참전기념비’ ▲6·25전쟁 참전 후 계속해서 대한민국에 주둔 중인 미 2보병사단의 전사자를 기리는 비석 등이 주변에 있다.

이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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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운 사람들







워커·밴 플리트 부자 등 2代 참전 142건
서울 은평구 녹번동 은평평화공원에는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한 젊은 미국인을 기리는 동상이 있다. 동상의 주인공은 윌리엄 해밀턴 쇼, 한국명 서위렴 2세. 그는 1922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모두 선교사였다. 쇼는 1943년 미 해군에 입대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격전이었던 노르망디상륙작전에도 참전했다. 1947년에는 한국 해군사관학교에서 사관생도를 가르쳤다. 그는 미국 하버드대에서 박사 과정을 공부하던 중 6·25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대한민국을 지키겠다는 결의로 미 해군에 자원해 재입대했다. 유창한 한국어에 수도권 지리를 잘 아는 그는 정보 장교로 인천상륙작전에서 공을 세웠으나 1950년 9월 22일 서울탈환작전 중 녹번리전투에서 28세로 전사했다.
낙동강방어선을 사수한 월턴 워커 장군은 안타까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1950년 12월 23일 아들 샘 워커 대위의 무공훈장 수훈을 축하하기 위해 이동하던 중 서울 도봉구 인근에서 한국군 차량과 추돌하고 말았다. 워커 장군은 중장 계급에서 대장으로 추서됐다. 한국 정부는 사고를 낸 한국인을 사형시키려 했으나 워커 장군 가족이 선처해달라고 호소해 사형을 면했다.
샘 워커는 아버지에 이어 군 최고 계급인 대장에 올랐고 미국 육군 역사상 첫 부자(父子) 대장이 됐다. 워커 장군의 손자인 샘 워커 2세는 주한미군에서 헬기조종사로 복무했다. 워커 장군 일가는 3대가 대한민국을 지켰다. 워커힐 호텔(Walker Hill·서울 광진구)과 워커힐 아파트, 캠프 워커(Camp Walker·대구)는 워커 장군을 기리기 위해 이름 붙여진 곳이다.
워커 부자의 사례처럼 장군을 부모로 둔 이가 아버지와 함께 6·25전쟁에 참전한 사례는 142명이다. 이들은 아버지의 지위를 앞세워 위험 지역 복무를 기피하지 않았다. 142명 중 35명이 전사하거나 부상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아들 존 아이젠하워도 소령 계급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다.
미 8군사령관을 지낸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예비역 육군 대장)의 아들 밴 플리트 주니어(1925~1952) 공군 대위도 그중 한 명이었다. 외아들인 밴 플리트 주니어는 B-26B 폭격기 조종사로 참전했다. 신혼인 그는 이미 해외 근무를 마쳤기에 한국에서 복무할 필요가 없었지만 한국 근무를 자원했다. 1952년 4월 4일 새벽 1시, 밴 플리트 주니어는 중공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야간 출격 작전에 나간 뒤 돌아오지 못했다.
밴 플리트 장군은 한국군 현대화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는 미 육군사관학교(육사)의 교육체계와 문화를 한국 육사에 전수했다. 밴 플리트 장군의 도움으로 1952년 첫 4년제 육사가 개교했다. 육사교정에는 밴 플리트 장군의 동상이 서 있다. 밴 플리트 장군은 고국에서 한미교류재단인 ‘코리아 소사이어티(The Korea Society)’를 만들어 평생 한미관계 발전에 헌신했다. 코리아 소사이어티는 매년 한미관계 발전에 기여한 이들에게 ‘밴플리트상’을 준다. 2012년에는 한덕수 국무총리가, 2020년에는 방탄소년단(BTS)이 이 상을 받았다.


[자료제공 :icon_logo.gif(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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