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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타임캡슐 서촌 골목마다 사연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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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걸어 2시간이면 청와대 구석구석을 돌아볼 수 있다. 다들 큰맘 먹고 나설 텐데 어딘지 아쉬운 시간이다. 내친김에 주변 동네를 구경하면 부족한 2%가 차고 넘친다.
청와대가 있는 서울 종로구는 17개 행정동과 87개 법정동이 있다. 청와대 경복궁 인근만 살펴보면 이렇다. ▲청운효자동(청운동, 신교동, 궁정동, 효자동, 창성동, 통인동, 누상동, 누하동, 옥인동) ▲사직동(사직동, 체부동, 필운동, 내자동, 통의동, 적선동, 도렴동, 당주동, 내수동, 신문로1가, 신문로2가, 세종로) ▲삼청동(삼청동, 팔판동, 안국동, 소격동, 화동, 사간동, 송현동) ▲부암동(부암동, 신영동, 홍지동) ▲가회동(가회동, 재동, 계동, 원서동). 괄호 밖이 행정동, 안이 법정동이다. 주민센터는 법정동 몇을 묶은 행정동에 있다. 땅덩이에 비해 동네가 꽤 많다. 서울이 지금처럼 크지 않던 시절 인구수 기준으로 동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번 호에선 경복궁과 청와대 서쪽, 그러니까 흔히 서촌이라고 부르는 동네를 살펴보자. 역사가 오래된 만큼 일대는 대개 문화재 시굴 조사 대상지다. 건물을 지으려면 땅의 10% 정도를 사방 1~2m 정도 파서 살핀다. 옛 기와 쪼가리라도 나오면 정밀 발굴조사에 들어간다. 가치 있는 문화재가 나오면 공사는 일단 정지다. 살고 있는 집을 마음대로 고치지도 못한다. 서울시 한옥 수선지원금은 까다로운 조건이 붙는다. 창틀, 대문, 외벽, 담장의 모양과 형태 재질까지 시시콜콜 정해져 있다. 집이 무너질 지경인데도 새로 짓거나 수리를 하지 않고 사는 이들이 많은 이유다. 역설적으로 이 덕분에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공간이 많다.
경복궁 서문인 영추문 앞 아트스페이스3 갤러리(효자로7길 23)가 들어 있는 3층 건물은 지하가 16m다. 공사 때 땅을 파니 조선시대 집터가 넷이나 나왔다. 고심하던 건축주는 계획보다 땅을 더 깊이 파고 집터를 그만큼 내려 보존했다. 덕분에 방문객은 강화유리 위를 걸어 다니며 조선시대 유적을 구경하게 됐다.



청와대 영빈관 옆에는 칠궁이 있다. 조선시대 왕비가 되지 못한 왕의 어머니들의 신위를 모신 곳이다. 칠궁 입구 길 건너가 무궁화동산이다. 그 안에 김상헌 집터가 있다. 김상헌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항복을 거부한 척화파 대표다. 무궁화동산 자리인 궁정동에는 옛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안가가 있었다. 1979년 10월 26일 여기서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총을 맞고 생을 마감했다. 김상헌 집터 바로 옆인데 현장에는 그날의 비극을 말해주는 어떤 표식도 없다. 1993년 2월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 안가를 모두 헐고 공원으로 만들었다. 분수대 옆 광장 바닥에는 삼각형 동판 하나가 누워 있다. 1960년 4월 19일 화요일 오후 1시 40분경, 이승만 독재에 항거하는 시위대에게 경찰이 처음 발포한 자리다. 이날 21명이 죽고 172명이 부상을 입었다.
경복궁 서쪽 담장에 붙어 있는 효자로 땅속에는 지금도 일제강점기에 만든 전찻길이 있다. 분수대 근처가 종점인 효자역이었다. 1923년 전찻길을 내며 서십자각이 헐려나갔다. 동남쪽 모서리에 있는 동십자각도 본래는 경복궁 담장 일부였다. 1929년 박람회를 열며 도로를 내 지금처럼 섬이 됐다. 서울 인구가 늘어나며 전차 노선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숭례문~효자동 구간은 콘크리트로 궤도 위를 덧씌워버렸다. 1966년 10월 31일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이 서울에 오기 직전이었다. 이번 봄 광화문 앞 월대 복원공사 과정에서 드러난 전차 궤도가 이 노선이다.
통인동에는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독립운동가 이회영 선생 일가의 흔적이 있고 이상(시인)·변동림·김환기(화가)가 얽히고설킨 애잔한 사랑 이야기가 있다. 창성동엔 서정주가 장기 투숙하며 김동리·김달진·오장환 등과 동인지 ‘시인부락’을 만든 보안여관이 있다. 청운동은 송강 정철과 겸재 정선이 나고 자란 동네다. 옥인동에는 친일파 윤덕영의 ‘아방궁’ 벽수산장이, 통인동에는 이완용의 널따란 저택이 있었다. 화가 이상범·천경자·구본웅이 누하동에, 체부동에 노천명이 살았으니 우리 근현대사의 명암과 예술의 향기가 골목마다 배어 있다.
서촌 어디서나 길을 걷다가 고개를 들면 인왕산이 보인다. 정상 아래 널찍하게 펼쳐진 치마바위(병풍바위)는 일제강점기 때 수모를 당했다. 1940년 조선총독부가 도성 안 어디서나 볼 수 있도록 큼지막한 글자들을 새겨 넣었다.



東亞靑年團結 동아청년단결
皇紀二千五百九十九年九月十六日
황기 이천오백구십구년 구월 십육일
朝鮮總督 南次郞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
大日本靑年團大會 대일본청년단대회

조선 청년들을 전쟁에 밀어넣기 위한 밑 작업이었다. 당시 1만 1454원을 들여서 7개월 동안 작업했다. 광복 뒤 서울시가 이를 삭제했지만 매끈하던 바위에는 지금도 어지러운 흉터가 남았다. 서촌을 한 바퀴 돌아보고 통인시장이나 금천교시장에서 허기를 채우면 근사한 한나절이 간다.

안충기 중앙일보 기자·<처음 만나는 청와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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