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마다 선배 전우의 피와 땀이 “군복의 의미 새삼 깨달았다”
작성자 정보
- 공감 작성
- 작성일
본문
육군사관학교 생도 6·25 격전지를 가다
대한민국 육군을 이끌어갈 육군사관학교(육사) 생도들이 6·25전쟁 73주년, 정전 70주년을 맞아 선배 전우들이 목숨 바쳐 싸웠던 격전지 현장을 찾았다.
6월 9~10일 육사 군사사학과(학과장 심호섭 소령) 교수진(8명)과 전공 생도 29명(2~4학년, 80~82기)은 6·25전쟁 당시 선배들이 피와 땀을 흘렸던 ▲펀치볼전투 ▲피의능선 ▲단장의능선 ▲고성지구전투 ▲저격능선 ▲금성지구전투 ▲백마고지전투 현장을 찾았다. 생도들은 각자 역할을 분담해 답사록을 만들고 현장에서는 전술 토의까지 이어갔다.
“군사사학과는 진짜들만 모였다”
6월 9일 오전 6시 30분 육사 제2정문에서 교수진과 생도들이 탄 버스에 올랐다. 생도를 가르치는 민간인 신분 교수 2명과 기자를 제외하곤 모두 전투복 차림이었다. 강원 홍천을 지날 때쯤 생도들은 마이크를 잡고 각자 자신이 어떻게 군사사학과에 오게 됐는지를 밝혔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선배들이 군사사학과에 지원하는 것을 만류했다”고 했다. 학과 공부가 힘들기 때문이다. 군사사학과에서는 전쟁사와 군사전략을 배운다. 육사에서도 가장 어려운 전공으로 꼽힌다. 장군을 많이 배출하는 전공 중 하나다. 국방부 장관과 육군참모총장이 동시에 군사사학과 출신인 적도 있었다.
신승민 생도(4학년)는 “군사사학과는 군대밖에 모르는, 싸워 이기는 방법만 관심을 두는 ‘진짜’들만 모인 학과”라고 설명했다.
강원 인제군청을 지날 때쯤 류의연 교수가 마이크를 잡고 ‘리빙스턴교’에 대해 설명했다.
“중공군 5월 총 공세(1951년 5월) 당시 인제지구 전투에서 리빙스턴 소위(미 10군단)는 적에게 기습을 받아 작전상 후퇴하려 했으나 폭우로 강물이 범람해 강을 건너지 못했다. 리빙스턴 소위는 많은 부대원을 잃었고 본인도 전투에서 중상을 입었다. 임종 직전 부인에게 ‘사재를 털어서라도 인북천에 다리를 놓아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그렇게 탄생한 다리가 리빙스턴교(1957년 설치)다.”
군사사학과 나종남 교수(육군 대령)는 중요 지점을 지날 때마다 역사·전술적 의미를 설명하며 “산과 강이 많은 우리 지형상 다리가 중요하다”고 했다.
민간인통제선(민통선)을 지나 펀치볼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을지전망대(해발 1000m)에 도착했다. 이곳은 군사분계선(MDL)에서 남쪽으로 1㎞ 떨어진 곳이다. 날이 맑으면 전망대에서 2시 30분 방향으로 10㎞ 떨어진 금강산을 볼 수 있다.
12사단 작전과장인 공문식 소령은 “펀치볼전투에서 승리한 덕분에 국군이 고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며 “이곳은 북한 지역을 내려다볼 수 있어 우리에게 유리한 지형”이라고 했다. 이어 “이곳에서 1㎞ 떨어진 곳에 북한군 GP(감시초소)가 있다”고 했다. 교수들은 지형을 설명하며 유사시 적 전차가 어떻게 기동할 수 있는지를 설명했다.
〈태극기 휘날리며〉에도 등장한 피의능선전투
을지전망대에서 내려온 생도들은 피의능선전투 전적비로 이동, 전술 토의를 시작했다. 피의능선전투는 가장 대표적인 고지쟁탈전이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마지막에 나오는 전투 장면이 피의능선전투다.
정인찬 생도(3학년)는 피의능선전투에 대해 “방어자는 고지를 요새화하고 공격자는 요새화를 극복하기 위해 백병전을 벌였다”며 “고지를 뺏고 빼앗기는 과정에서 쌍방의 병력 손실이 매우 컸다”고 말했다. 심호섭 교수는 “피의능선을 지키지 못했으면 양구가 위험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허천 생도(4학년)는 단장(斷腸)의능선전투에 대해 설명했다. 피의능선전투에서 패하자 북한군은 북방 6㎞ 떨어진 단장의능선으로 후퇴했다. 당시 전투에서 북한군·중공군에 맞서 미군·프랑스군이 많은 사상자를 냈다. 당시 신문기사에서 이 전투를 두고 ‘심장이 찢어질 것 같다(heartbreak)’는 표현을 썼고 이곳을 ‘단장의능선’이라고 불렀다.
나 교수는 “단장의능선전투를 계기로 미군의 전투 교리가 바뀐다”며 “육군과 공군이 합동 작전을 펴 목표물을 정확히 타격하는 CAS(근접항공지원)가 발달하게 됐다”고 했다. CAS는 영화에 자주 등장한다. 지상군이 무전을 통해 공격 목표(좌표)를 알려주면 항공기가 이를 바탕으로 목표 지점을 정밀 타격하는 방식이다.
단장의능선전투는 단일 전투로는 최다 규모의 포탄이 사용됐다. 전차 포탄 6만 2000발, 박격포 12만 발, 항공탄 250톤이 사용됐고 CAS는 840회나 이뤄졌다.
강원 양양 기사문리로 이동했다. 이곳은 1950년 10월 1일 국군 3사단이 최초로 38선을 돌파해 북진을 시작한 지점이다. 나 교수는 ‘국군의 날’이 제정된 배경을 설명했다.
“38도선을 최초로 돌파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국군의 날을 10월 1일로 정했다는 것은 오해다. 광복 이후 해방병단(해군)이 1945년 11월 11일, 국방경비대(육군의 전신)는 1946년 1월 15일, 해병대는 1949년 4월 15일, 공군은 1949년 10월 1일에 창설됐다. 1953년 6·25전쟁이 끝난 후 군별로 기념일을 따로 치렀다. 기념일이 너무 많다보니 날짜를 한 날로 정하자는 의견이 1956년 국무회의에서 나왔다. 이에 육군 항공대에서 분리돼 창설된 공군(10월 1일) 기념일을 국군의 날로 삼게 됐다.”
이튿날(6월 10일)은 강원 철원 15사단 승리전망대(해발 459m)에서 일정을 시작했다. 승리전망대에서 11시 방향에는 북한 지역인 오성산(1062m)이 있다. 오성산에서 남쪽 아래로 길게 늘어진 능선이 ‘저격능선(Sniper ridge)’이다. 미군이 적에게 저격을 자주 당해 그 이름이 붙었다.
42일 동안 12번이나 고지 주인이 바뀐 전투
저격능선전투를 발표한 최부건 생도(4학년)는 “당시 42일 동안 1㎞가 채 되지 않는 능선을 두고 고지의 주인이 12번이나 바뀌었다. 아군의 CAS는 2200회나 이뤄졌다”며 치열했던 당시 전투를 설명했다. 중공군과 인민군은 오성산을 지키고자 개미집을 연상케 하는 지하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1953년 7월 13일을 전후해 중공군이 최후 공세(금성전투)에 나서자 결국 국군과 유엔군은 저격능선 일대(상감령)를 빼앗기고 만다. 이 때문에 오성산은 휴전선 북방 비무장지대로 들어가고 말았다.
심호섭 교수는 “오성산을 확보했다면 우리 영토를 더 많이 넓혔을 것”이라며 “전쟁사를 통해 당시 상황과 지형을 함께 이해하며 교훈을 얻어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고 했다.
생도들은 마지막 일정으로 강원 철원 북서쪽 12㎞ 지점에 있는 백마고지전투 현장을 찾았다. 12차례 쟁탈전이 벌어져 7번이나 주인이 바뀌었지만 끝내 국군 9사단이 확보한 곳이다. 이 전투에서 아군은 포탄 21만 9954발, 중공군은 5만 5000발을 쐈다. 포격으로 고지가 깎여나가 정상이 하얗게 변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백마가 누워 있는 것 같다고 해 ‘백마고지’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9사단의 별칭이 백마부대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백마고지는 전략적 요충지다. 철원 평야는 곡창지대면서 북한군이 남침을 위한 기동로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심 교수는 “국군이 백마고지를 지키지 못했다면 대한민국 영토는 10㎞가량 후퇴해야 했다”며 “지금 대한민국의 영토는 선배 전우의 헌신으로 지켜낸 땅”이라고 했다.
백마고지전투가 국군에게 의미 있는 이유는 야전훈련사령부(FTC)의 효과를 입증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당시 미군은 국군이 훈련 부족으로 인해 전투 수행 능력이 떨어진다고 판단했다. 이에 미 8군사령관인 밴 플리트 장군은 FTC를 설치해 국군을 재교육했다.
가장 먼저 국군 9사단이 훈련을 받았다. 국군 9사단은 미 3사단을 대신해 백마고지 전선에 투입됐는데 최초 전투에서부터 중공군의 공격을 완벽하게 저지했다.
전적지 답사로 안보 현실 체감
육사 생도들은 백마고지를 끝으로 전적지 답사·전술 토의를 모두 마쳤다. 1년 뒤에 최전방에서 소대장으로 복무할 4학년 생도들은 “이번 답사로 적의 실체를 직접 확인하고 안보 현실을 체감할 수 있었다”며 “위국헌신의 각오로 전략·전술을 고민하는 군인이 되겠다”고 밝혔다.
군사사학과 교수진은 “대한민국 안보를 책임질 리더를 길러낸다는 사명감으로 생도들을 가르치겠다”며 “이번 답사가 생도들에게 좋은 경험이 됐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우리의 적과 지형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한국전쟁사는 중요하다”며 전쟁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박준서 생도(4학년)는 “군사사학과에서 배운 전략·전술을 바탕으로 보병 병과로 진출해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싶다”고 말했다.
보병 장교를 희망하는 김진용 생도(3학년)는 “이번 답사를 통해 사료와 현장을 비교하며 ‘내가 전투에 임한다면 어떻게 지휘할 것인가’를 상상했다”며 “실력을 키워 적과 싸우면 부하들과 함께 반드시 승리하겠다”고 밝혔다.
신승민 생도는 보병이나 포병 병과로 진출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는 “전적지 답사를 통해 지금 입고 있는 군복의 의미를 다시금 깨닫게 됐다”며 “국가를 위해 목숨 바친 선배 전우들의 노고를 기억하며 대한민국의 생존을 책임지는 장교가 되겠다”고 했다.
정인찬 생도는 “전쟁사와 이번 격전지 답사를 통해 포병 화력의 중요성을 다시금 알게 됐다”며 “향후 포병장교가 돼 미사일사령부와 같은 전략 부대에 근무하며 아군의 승리를 강력한 화력으로 뒷받침하고 싶다”고 말했다.
최부건 생도는 “군사·국가 전략을 열심히 공부해 대한민국 번영에 기여하는 전략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생도들은 모두 “선배 전우들이 흘린 피와 땀을 잊지 않겠다”며 “더욱 전문성을 갖춘 군인이 되도록 노력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이경훈 기자
[자료제공 :(www.korea.kr)]
관련자료
-
링크
-
이전
-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