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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정읍의 청기와가 왜 청와대 지붕에 올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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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와대 개방 1년을 말하다 ②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와대로 1.
청와대 주소다. 일제강점기이던 1911년 12월 20일 얻은 첫 주소는 ‘광화문 1번지’였다. 광복 뒤인 1946년 1월 1일부터는 ‘세종로 1번지’였다. 자칫하면 ‘1’을 놓칠 뻔했다. 2007년 도로명 주소체계를 도입할 때 ‘청와대앞길 50번’을 받았다. 이건 아니지 하며 청와대에서 정정신청을 했다.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공간인데 50번이 뭐냐는 얘기였다. 지금의 주소를 얻게 된 배경이다. 변함없는 ‘대한민국 1번’ 청와대에는 어떤 내력이 있을까?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가 들어섰다. 그로부터 2022년 5월 9일까지 청와대는 대통령의 공간이었다. 이 땅의 역사를 생각하면 74년은 그리 오랜 기간이 아니다. 하지만 통념과 달리 이 땅이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고려시대부터다. 이 일대는 고려 문종 때인 1067년 개경 밖에 3경을 설치하며 역사에 발을 들여놓는다. 경주가 동경, 서울이 남경, 평양이 서경이다. 천도를 계획한 숙종은 1104년 남경을 완공한다. 지금의 경복궁 서북쪽 태원전과 신무문 일대로 추정한다. 남경은 왕들이 남행할 때 머무는 공간이었다. 후대 왕들도 남경천도를 꿈꿨으나 이뤄지지 않았다. 국운이 기울며 동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1392년 조선을 세운 이성계는 지금의 서울인 한양을 도읍으로 정했다. 새로운 왕조의 근거지로 남경은 비좁아 그 앞쪽 너른 땅에 경복궁을 세웠다. 왕궁 근처는 당연히 백성의 접근을 막았다. 세종에서 선조 때까지는 백악산 일대에서 돌도 캐지 못하게 했다. 조선을 세운 지 딱 200년 뒤인 1592년 임진왜란이 터졌다. 경복궁은 몽땅 불에 타버리고 그 뒤 270여 년 동안 폐허가 됐다. 신무문 밖 지금의 청와대 일대도 관리를 못해 어지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왕은 경복궁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창덕궁에서 정사를 봤다. 조선 왕조 519년 동안 경복궁이 제1궁 역할을 한 시기는 절반이 못된다.
고종 때 중건된 경복궁은 34년 동안 다시 제1궁 역할을 한다. 이 시절 전각들이 가득 들어차며 공간이 부족하자 신무문 북쪽에 후원을 만들었다. 지금의 청와대 일대인데 20만㎡가 넘는 땅에 32개 동의 건물이 들어섰다.
후원 한가운데를 백악산에서 흘러내려온 능선 하나가 지나간다. 풍광이 빼어난 능선 끄트머리 일대에 경무대(景武臺)라는 이름이 붙었다. 경무대 동쪽, 그러니까 지금의 녹지원 일대에는 융문당과 융무당이 있었다. 융문당에서는 과거시험을 치르고 융무당 앞에서는 병사들이 훈련을 했다. 경무대 뒤쪽 계곡, 지금의 관저 자리에는 한옥 침류각과 오운각이 있었다. 이들은 관저에 자리를 내주고 현재 자리로 이사했다. 영빈관 부근에는 임금이 신하들과 농사를 지으며 한 해 풍흉을 살피는 경농재와 내농포가 있었다.





‘역사바로세우기’ 명분 속 사라진 건물들
일제강점기이던 1939년 경무대 자리에 조선총독 관저가 들어선다. 이전 총독 관저인 왜성대는 남산에 있었다. 퇴계로2가 교차로에서 남산1호터널로 들어가는 길 오른쪽, 지금은 공원이 된 자리다. 총독 관저 건물은 청와대의 출발점이다. 일제는 눈엣가시로 여기던 민족종교 보천교(증산교가 모태)를 강압으로 무너뜨렸다. 전북 정읍에 있던 보천교 전각들은 해체돼 서울 조계사 대웅전, 내장사 대웅전, 전주 기차 역사 등 전국으로 흩어졌다. 이때 보천교 본당인 십일전의 청기와를 가져와 경무대에 새로 짓는 조선총독 관저 지붕에 올렸다.
일본이 패망한 뒤 미군이 한반도 남쪽에 진주했다. 총독관저는 미 군정 사령관 존 리드 하지 중장의 관저가 됐다. 1948년 대한민국정부를 수립하며 이승만 대통령이 이를 이어받았다. 가난한 신생국이니 관저를 새로 지을 여력이 없었을 테다. 관저 이름은 이곳의 지명인 ‘경무대’를 그대로 가져다 썼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며 대통령은 남쪽으로 피난을 가고 경무대는 북한군이 점령했다. 전쟁 뒤 대통령은 다시 경무대로 돌아왔다.
1960년 4·19혁명으로 대통령이 된 윤보선은 이승만정부를 손절하며 독재의 대명사가 된 경무대 이름을 바꾸고자 했다. 화령대(和寧臺)와 청와대(靑瓦臺)가 후보에 올랐다. 화령은 이성계 고향 함경도 영흥의 옛 이름이다. 조선을 건국하며 명나라에 요청한 두 가지 국호 중 하나다. 윤보선은 쉬운 이름인 청와대를 택했다.
‘Blue House’가 청와대의 첫 영어 이름이다. 미국 백악관(White House)을 염두에 둔 작명이다. 지금은 소리를 따라 ‘Cheongwadae’로 쓴다. 경내에는 한자로 청와대라고 쓴 윤보선 대통령의 글씨를 새긴 큼지막한 바위가 있었다. 그런데 이 바위가 감쪽같이 사라져 지금까지 행방을 알 수 없다.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이 취임한 뒤 청와대 이름을 황와대(黃瓦臺)로 바꾸자는 말이 나왔다. 중국 쯔진청(자금성)의 기와 색깔처럼 황금빛은 황제를 상징한다. 절대 권력자에게 ‘한 상 올리려는’ 속셈이었을 테다. 박 대통령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름을 바꿔서 되겠느냐며 물리쳤다.
청와대는 집무실과 살림집을 겸했다. 1층과 2층 사이에 셔터문이 둘 있다. 노태우 대통령이 청와대에 들어간 첫날 1층 집무실에서 2층 살림집으로 올라가다가 문 사이 계단에 갇혔다. 문 사용법을 몰라 일어난 해프닝이었다. 어쨌거나 같은 건물에서 업무를 보다가 퇴근했으니 대통령은 공무원 재택근무의 원조였던 셈이다.
현재 청와대 영역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확정됐다. 4·19혁명 뒤 경무대 정문 앞에서 발포 현장 검증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정문 옆, 그러니까 지금의 경호처 건물이 있던 자리에는 민가가 여러 채 있었다. 1978년 완공한 영빈관 자리는 일제강점기 일본인 관사와 민가들이 있었다. 4·19혁명 뒤인 4월 28일 관사 36호에서 이기붕 부통령 가족 넷이 목숨을 끊었다.
경내 건물들은 노태우 대통령 때 지금 모습을 갖췄다. 살림집은 1990년 새로 지은 관저로 이사하고 집무실은 1991년 본관을 완공해 옮겨갔다. 임무를 다한 옛 청와대 건물은 1993년 김영삼 대통령 때 사라졌다. 식민 잔재 청소와 역사 바로 세우기가 명분이었다. ‘치욕도 역사인데 굳이 철거할 필요가 있나’, ‘대통령 기념관이나 박물관으로 쓰면 어떤가’ 같은 얘기는 묻혀버렸다. 1995년에는 광화문과 근정전 사이에 있던 조선총독부 건물도 해체했다.



정원 절병통에 숨은 역사
대만 타이베이에는 일제강점기 대만 총독이 쓰던 청사가 있다. 이 건물은 현재 대만 총통청사다. 2차 대전 말기에 미군의 폭격으로 크게 부서진 것을 수리하고 리모델링해 쓰고 있다. 대만은 1998년 이를 국가사적으로 지정해 관리한다. 대만의 200달러짜리 지폐 뒷면에 그려진 건물이다. 베트남 하노이에 있는 베트남 주석 관저도 식민지 시절에 지었다. 프랑스가 총독부로 쓰던 건물이다. 일본이 인도차이나를 지배하던 시절에는 일본 대사 공관이었다. 호찌민은 국가 주석으로 있을 때 가까이 있는 작은 집에 살며 이 건물에서 귀빈을 맞았다.
청와대 옛 본관을 철거한 자리는 흙을 돋워 정원을 만들었다. 정원 안에 놓여 있는 절병통(남쪽 현관 지붕 꼭대기에 있던 항아리 모양의 석조 장식)만이 옛 흔적을 말해준다.
청와대는 이 땅의 역사를 압축한 공간이다. 고려, 조선,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미 군정기를 거쳐 오늘까지 흘러온 얘기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1948년 초대 이승만 대통령 때 대한민국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67달러였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다. 2022년에는 3만 2000달러로 세계 10위 경제대국이 됐다. 한국 여권은 세계에서 가장 편리한 여권 중 2위다. 비자 없이 갈 수 있는 나라가 192개국이다. 74년 동안 12명의 대통령이 청와대를 거쳐가는 동안 이뤄진 변화다.

안충기 중앙일보 기자·<처음 만나는 청와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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