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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조각 하나라도… 격전의 현장이 땀의 현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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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사자 유해발굴 현장에 가다
강원 홍천군 화촌면 주음치리. 수도권과 강원 양양을 잇는 서울양양고속도로에서 북쪽으로 약 2㎞ 떨어진 곳이다. 서울 광화문에서 차를 타고 2시간을 가야 한다.
72년 전 홍천에서는 국군 5사단과 미 육군 2사단이 중공군의 춘계공세(1951년 4~5월)를 저지하기 위해 ‘홍천 북방전투(1951년 5월 16~18일)’를 치렀다. 당시 중공군은 유엔군을 한반도에서 철수시키겠다는 목표로 서부 전선인 경기 파주에서부터 동부 전선인 양양·고성까지 모든 전선에 걸쳐 총공세를 폈다. 이 과정에서 국군과 미군은 홍천 북서쪽(춘천 남동향) 가리산 부근에서 싸우다가 약 10㎞ 떨어진 주음치리까지 후퇴해 방어선을 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을 지낸 남정옥 박사는 “홍천 북방전투는 중공군의 막대한 인해전술에 맞서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 남진을 저지한 전투”라고 말했다.
홍천 북방전투를 치른 72년이 흐른 4월 28일. 주음치리 일대에선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MAKRI·이하 국유단, 단장 이근원)과 육군 11기동사단(홍천 주둔) 예하 돌격대대(대대장 이정구 중령) 장병들이 땅을 파고 있었다. 6·25전사자 유해발굴 현장이었다. 72년 전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으나 가족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선배 전우를 찾기 위해서다.
발굴 현장은 찾아가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거친 숨을 내쉬며 산을 탄 끝에 유해발굴 현장인 ‘무명 560고지’에 올랐다. 고지로 향하는 길목에는 태극기를 배경으로 한 현수막에 아래와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은 70여 년 전 선배 전우들이 목숨을 걸고 오르내린 전투 현장입니다.’
6·25전사자 유해발굴은 산 정상이나 고지, 능선 등 격전이 벌어졌던 곳에서 이뤄진다. 주로 아군(국군·유엔군)이 패전해 아군 전사자 시신을 미처 수습하지 못한 곳들이다. 본격적인 발굴에 앞서 6·25전쟁사, 참전용사 증언, 주민 제보 등을 바탕으로 사전조사를 한다. 이후 현장탐사를 거쳐 발굴 지역을 선정하고 발굴에 나선다.





4월 3일부터 6주간 유해발굴
국유단과 돌격대대 장병(약 130명)은 4월 3일(6주간 실시)부터 주음치리 일대에서 ‘6·25전사자 유해발굴작전(이하 작전)’을 하고 있다. 매년 작전이 시작되면 작전 관할 지역 부대와 국유단이 협력해 유해를 발굴한다.
현장에는 야전지휘소 역할을 하는 얼룩무늬 야전텐트 주변으로 노란색 통제선이 곳곳에 처져 있었다. 유해가 발견됐다는 표시다.
국유단 한정희 발굴팀장은 이렇게 말했다.
“오늘까지 유해 총 17건을 발견했다. 이 중 12건을 수습했고 완전 유해는 1건이다. 5건은 확장 노출 조사 중이다. 유해발굴은 백사장에서 바늘 찾기와 같다.”
완전 유해는 머리뼈부터 갈비뼈, 양팔·양다리뼈가 온전히 행태를 보존한 유해를 말한다. 발굴 현장마다 차이는 있지만 유해는 ‘부분 유해’ 형태로 더 많이 발견된다.
부분 유해로 발견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폭발로 인해 신체 일부가 사라지거나 산짐승이 유해를 훼손한 경우다. 전쟁사를 바탕으로 당시 상황을 추정해봤을 때 화력전이 벌어진 곳은 포격 등으로 인해 신체 일부가 찢겨나갔을 가능성이 크다.
노란색 통제선 안쪽으로 길이 40㎝쯤 돼보이는 뼛조각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허벅지뼈였다.
70여 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백골을 마주하고 든 생각은 공포감이나 혐오감이 아닌 존경심이었다. 소중한 생명을 조국에 바쳤다는 생각에 숙연해졌다.
허벅지 뼛조각이 발견된 곳에서 대각선 방향으로 약 5m 떨어진 곳에선 국유단 소속 유해발굴기록병 3명이 붓을 들고 추가 발견된 유해와 흙을 분리하며 ‘확장 노출’을 하고 있었다. 유해가 발견되면 최초 발견 지점을 중심으로 위·아래 2m, 좌·우 2m 구역을 추가로 파내는 ‘확장 조사’를 한다. 유해를 발견하면 형태 확인을 위해 유해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최대한 노출한다.

확장 조사로 추가 유해 발견
“최초 유해 발견 후 확장 조사를 시작했다. 지형을 고려해 평소보다 발굴 범위를 더 넓혔다. 덕분에 머리뼈 일부와 오른팔 뼈 일부, 다리뼈가 추가로 발견됐다. 최초 발견된 허벅지뼈는 경사면을 타고 흘러내린 것으로 보인다.” 한 팀장의 설명이다.
최초 허벅지뼈가 발견된 후 추가 유해를 발견하기까지 3일이 걸렸다. 국유단 관계자는 “앞으로 유해를 모두 수습하기까지는 이틀 정도 시간이 더 걸릴 것 같다”고 말했다.
유해발굴은 훼손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최대한 신중하게 진행된다. 통상 유해 수습에는 부분 유해 3~5일, 완전 유해 7~10일이 걸린다. 유해를 모두 수습하기 전까지는 노출된 유해를 한지로 감싸고 유해 발견 구역을 방수포로 덮는다.
100m쯤 떨어진 경사면에서는 유해발굴감식병들이 체를 이용해 흙을 거르고 있었다. 노출된 유해를 수습한 뒤 혹시 남아 있을지 모를 유해를 찾기 위해 주변 흙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과정이다. 손가락·발가락뼈는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아 미처 챙기지 못한 채 유해 수습을 끝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50m쯤 떨어진 고지에서는 돌격대대 장병 약 30명이 가로로 줄지어 늘어선 뒤 경사면을 따라 기초 발굴을 하고 있었다. 기초 발굴은 삽을 들고 땅을 뒤엎으며 유품이나 유해 흔적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돌격대대 장병들이 무언가를 발견하면 전문지식을 갖춘 국유단 장병이 투입된다.



흙먼지 들이마시며 선배 전우 찾아
돌격대대 장병들이 지나간 곳은 낙엽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뿌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나무와 흙, 돌무더기뿐이었다. 돌격대대 장병들은 흙먼지를 들이마시며 선배 전우를 가족 품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6주간 땅을 파헤치고 발굴작전을 편다. 작전이 종료될 때쯤이면 다시 발굴 이전 모습으로 현장을 복원해놓는다.
발굴 현장에 투입되는 현지 부대 장병들은 대부분 자원한 이들이다. 대대 병력(400명) 중 100여 명 규모로 선발해 작전에 투입된다. 오전 9시부터 시작해 오후 4시 30분까지 작전을 편다. 식사는 도시락으로 대신한다. 장병 13명이 10㎏이 넘는 도시락 가방을 들고 산을 오르내린다. 유해를 찾는다고 해서 휴가나 외출 같은 포상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신 기초 발굴로 유해를 발견한 장병에게는 전사자 유해가 모두 수습된 후 봉송할 기회를 준다. 주둔지 생활관에서 평범하고도 편한 일과를 보내는 대신 선배 전우를 찾겠다는 전우애와 사명감으로 고생을 자처하는 셈이다.
돌격대대 김도훈 상병은 “무엇이든 하나라도 발견했을 때 가장 보람 있다”고 말했다. 탄피나 군화 밑창, 인식표(군번줄) 등이 발견되면 근처에 유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김 상병은 “작전 활동 중 다치는 일도 있지만 부대 장병들은 하나라도 찾으려고 노력한다”며 “의미 있는 일을 한다는 사명감 하나로 작전에 임한다”고 밝혔다.
아군인지 적군인지는 어떻게 판단할까? 국유단 관계자는 “피아 구분도 쉽지 않다”며 “국군으로 추정되는 유해에서 적군 유품이 발견되고 적군 추정 유해에서 국군 유품이 발견되기도 한다. 영화 <고지전>에 나온 것처럼 피아 간 물품을 서로 뺏고 빼앗기기 때문이다. 피아판정위원회 등 3~4단계를 거쳐야만 아군인지 적군인지 알 수 있다”고 밝혔다.
수습된 유해는 현장에서 임시 감식을 마친 후 한지로 감싼다. 한지로 감싼 유해는 오동나무관에 입관하는데 신체 위치에 맞게 유해도 배치한다. 입관을 마치면 6·25전사자의 관을 의미하는 빨간 천으로 관을 덮는다. 여기에 태극기를 감싼다. 이를 ‘태극기 관포’라고 한다.

최초 발견 장병이 봉송
태극기로 감싼 오동나무관은 현장에서 약식제례를 한다. 약식제례를 마친 후 유해발굴작전에 참여한 병사가 전투복을 단정히 차려입고 유해를 봉송했다. 후배 전우 품에 안겨 72년 만에 고지를 떠나는 선배 전우를 향해 돌격대대 부대원들과 국유단 장병들은 좌우로 도열해 경례를 했다. 유해는 군사경찰(헌병)의 호위를 받아 11기동사단 임시봉안소로 옮겨졌다. 임시봉안소에 안치된 관은 이후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는 국유단 중앙감식소에서 정밀감식을 받을 예정이다.
중앙감식소로 이동한 유해는 정밀 감식과 함께 신원 확인을 위해 DNA 검사를 시행한다. 유해의 DNA 분석에는 1~2개월이 소요된다.
신원 확인된 유해를 전사자 유가족(8촌 이내)에게 전하기 위해선 유가족 DNA 시료 확보도 중요하다. 유해발굴 당시 인식표처럼 식별 유품을 남기지 않는 한 DNA를 통한 신원 확인이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국유단은 유가족 DNA 시료 채취를 늘리기 위해 ‘신속 기동탐문반’을 운영하고 있다. 기동탐문반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직접 유가족을 찾아가 DNA 시료 채취를 한다. 2022년 국유단이 확보한 전사자 유가족 DNA 시료(1만1279명) 중 탐문에 의한 시료 채취가 74.9%(8455명)를 차지했다. 유가족 DNA 정보가 쌓인 덕분에 2018년 4건, 2019년 7건에 불과했던 전사자 신원 확인 건수는 2020년 19건, 2021년 24건, 2022년 23건으로 늘었다. 1만여 국군 전사자 유해 중 신원이 확인돼 가족 품으로 돌아간 유해는 209구(2023년 4월 기준)에 불과하다. 6·25전쟁을 겪은 세대들이 점점 줄어드는 것도 국유단에겐 큰 부담이다. 국유단 계획과장 김인수 소령은 “전사자 유해발굴과 신원 확인은 시간과 싸움”이라며 “선배 전우들이 하루빨리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최선의 방안을 계속해서 마련해나가겠다”고 밝혔다.
이근원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장은 “정전 70주년을 맞아 6·25전사자 유가족들이 DNA 시료 채취에 더 많이 동참할 수 있도록 적극 알리겠다”며 “국민 여러분 모두의 참여가 절실하다”고 말했다.

이경훈 기자



박스기사
유가족 DNA 시료 채취 참여 (전사자 신원 확인 시 포상금 1000만 원)
채취대상
전사자 유해를 찾지 못한 친·외가 8촌 이내 유가족
참여방법보건소, 군병원, 예비군부대, 병무청, 적십자병원,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전화신청(1577-5625)시 방문 채취
준비서류제적등본, 유족증 사본, 전사통지서 사본, 병적증명서 중 택일

전사자 유해 소재 제보 (제보 시 최고 포상금 70만 원)
제보대상
6·25전쟁 당시 전사한 국군, 경찰, 학도병, 유엔군 유해
제보내용6·25전쟁 당시 전사자 직접 매장, 목격 또는 들은 내용과 생활 및 각종 공사 중
전사자 추정 유해나 유품에 대해 발견하거나 들은 경우
전화 1577-5625(오! 6·25)


[자료제공 :icon_logo.gif(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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