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연대의 국제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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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의 ‘자유’와 ‘연대’의 국정철학은 일관되게 대외정책에도 반영됐다. 윤 대통령은 자유와 인권의 보편적 가치를 존중하는 국제사회와의 연대를 강조해왔다. 대통령 취임사에서 “자유민주주의는 평화를 만들어내고 평화는 자유를 지켜준다”며 “자유와 번영을 꽃피우는 지속가능한 평화를 추구하겠다”고 다짐했다. 취임 후 채 한 달도 안돼 한미 정상회담을 열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진정한 유대와 신뢰’를 형성했다. 올 3월 1일 3·1절 기념사에서는 “일본은 과거의 군국주의 침략자에서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안보와 경제, 글로벌 어젠다에서 협력하는 파트너로 변했다”고 말했고 이어 3월 16일 12년 만에 한일 정상회담을 전격적으로 개최했다.
윤 대통령은 세계적 복합 위기와 북핵 위협을 비롯한 엄중한 상황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공유하는 국가와의 연대, 특히 한미동맹의 재건과 한일관계의 복원을 통해 한·미·일 3국의 협력이 어느 때보다 중요함을 역설해왔다. 윤 대통령은 지정학적 안보 위협과 지경학적 분리(decoupling) 현상을 극복하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 ‘보편적 가치를 기반으로 한 연대’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국제적 자유 연대는 4월 말 열리는 한미 정상회담에서 절정에 이를 전망이다.
인류가 국제관계에서 가치 연대를 처음 언급한 것은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기독교적 시각에서 선(the good)이 악(the evil)에 대항하지 않으면 부정한 악에 의한 지배를 받으므로 ‘정의로운 전쟁(just war)’이 불가피하다는 데서 유래한다. 전쟁에서의 도덕성을 체계적으로 처음 논의한 중세 정치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정의 전쟁’은 반드시 권위 있는 통치자에 의해 선언돼야 하고 부정의에 저항하는 정의로운 것이어야 하며 악을 피하고 선을 이루고 탐욕과 잔인성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했다. 근대 주권국가 국제체제가 형성된 17세기에는 정의전쟁론이 세속화돼 정당한 자기방어의 교리로 발전했다.
국제정치에서의 이상주의적 규범적 논의는 이마누엘 칸트의 ‘영구평화론’을 접하면서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당위성을 인정하게 됐다. 칸트는 도덕성과 이성이 합쳐지면 전쟁은 사라지고 인류의 미래는 ‘보편적이고 지속적인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라는 비전을 제시했다. 공화주의자인 칸트는 영구평화를 이루기 위한 조건으로 민주적 제도, 경제적 상호의존성, 자유국가 간의 국제조직을 내세웠다. 공화국 국민 다수는 합리적이므로 자기방어 외에는 전쟁을 원하지 않으며, ‘상업적 정신’은 평화의식을 고취하고, 보편적 우호 관계에 기초한 세계정부 건설을 제안했다.
민주평화론의 선구자인 칸트의 영향을 받은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제1차 세계대전은 전제적이고 군사적인 제국주의 ‘구 질서’가 팽창주의와 전쟁에 열중한 결과라고 믿고 민주적 국민국가의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 전쟁 방지를 위한 최선책이라고 주장했다. 민주적 국민국가들은 문화적·정치적 통합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공동이익 분야에서는 협력할 준비가 돼 있고 정복이나 약탈할 만한 동기가 없으므로 기본적으로 평화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족자결주의는 국민국가 내에 통합성을 증진시키고 각 국가의 권리와 특성을 상호존중하는 국가 간의 형제애를 고취한다는 것이다.
윌슨의 국제연맹 창설이라는 이상주의적 제안은 막상 미국에서는 수용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외교정책에 있어서 미국 특유의 자유주의 전통을 확립하는 데 커다란 공헌을 했다. 윌슨주의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국제연합(UN)의 탄생에 기여했음은 물론이다. 철학적 관점에서 미국 자유주의 외교정책은 두 가지 특징을 지닌다. 첫째, 개인주의에 천착하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인종, 민족, 신념, 사회 배경에 관계없이 평등한 도덕적 가치를 갖는다는 보편주의를 믿는다. 이는 오늘날 모든 인간은 동등한 지위와 권리를 갖는다는 인권의 개념으로 표현된다. 또 개인이 국가에 우선하므로 인권문제에 관해 국가 주권을 위반하게 돼 인권과 주권 간의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둘째,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광범위한 지지를 확보하고 특히 1990년대 탈냉전 시대에 접어들어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의 자유주의 질서가 정점에 이르렀지만 민주평화론에 입각한 전쟁 개입은 미국 내에서도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미국 단극체제의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민주주의를 위해서라기보다는 민주주의에 의한 세계 안전을 추구하게 만드는 이념의 경직화를 낳았다는 비판을 받는다. 조지 부시 대통령의 미국 일방주의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가 대표적 사례다.
자유주의 국제질서도 완벽할 수는 없다. 그 한계는 민주주의를 강제할 수 없으며 인류의 다수는 여전히 비민주적 체제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비민주적 또는 권위주의 현상은 사회문화적·심리적·구조적 배경에서 생성되는 것으로서 특정 엘리트의 제거 또는 전쟁과 같은 폭력에 의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어떻든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도전을 받고 있고 새로운 다극주의 국제질서에 대한 요구가 거세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는 20세기 파시스트주의, 군국주의, 공산주의의 도전에서 살아남은 것처럼 21세기 새로운 도전에도 살아남을 가장 보편적이고 유연한 대안임이 틀림없다.
한국에 자유민주주의가 이식돼 성공적으로 발전된 것은 세계사에서도 괄목할 만한 일이다. 국제적 자유 연대가 한국의 안보와 번영을 가장 잘 보장하는 선택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외교에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다는 현실주의 금언을 되새길 필요도 있다. 미국의 연성권력(soft power)론을 제시한 조지프 나이는 미국 외교정책의 도덕성을 강조하면서도 자유현실주의자(liberal realist)가 더 성공적이라고 설파했다. 가치 동맹도 감성에 치우치기보다는 국가이익에 충실한 신중성(prudence)에 기반해야 한다는 것이다.
양승함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한국정치학회장을 역임했으며 통일부 정책자문위원회 위원장, 연세대 행정대학원장, 국가관리연구원장을 거쳤다.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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