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보도 없고 지휘자도 없지만 서로 채워주며 천상의 하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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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의 날’ 청와대 공연 하트시각장애인오케스트라
4월 20일 오후 4시 청와대 춘추관에서 특별한 공연이 열렸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제43회 ‘장애인의 날’을 맞아 하트시각장애인체임버오케스트라,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과 함께 개최한 특별공연 ‘함께 누리는 마음의 선율’이다. 이날 무대에 오른 하트시각장애인체임버오케스트라는 르로이 앤더슨의 ‘고장난 시계’를 시작으로 영화 <여인의 향기> <알라딘> <라이온 킹>,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애니>의 OST(오리지널 사운드트랙) 등을 연주했다.
대중에게 친숙하고 듣기 쉬운 음악이지만 이들이 이곡들을 연주하기까지는 어느 오케스트라보다 많은 시간과 연습,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 하트시각장애인체임버오케스트라는 시각장애예술인 연주자 15명과 비장애인 연주자 10명으로 구성됐다. 시각장애인 연주자들은 악보를 보지 못한다. 악보를 모두 외워 연주하는 수밖에 없다. 악보를 모두 외워도 지휘자를 볼 수 없으니 다른 악기와 리듬·박자를 맞추기 어렵다. 하모니를 만들려면 연습밖에 방법이 없다. 매주 토요일 연습실에 모여 연습을 반복하며 호흡을 맞춘다.
악보도 지휘자도 없이 시각장애인과 비장애인 연주자가 함께 만들어낸 화합과 감동과 하모니. 연주가 끝나자 하트시각장애인체임버오케스트라를 향한 박수와 환호가 쏟아졌다. 연주자들은 웃으며 관객에게 화답했다. 관객의 뜨거운 반응이 이들을 다시 무대에 오르게 하는 힘이다.
그러나 시각장애인이 오케스트라 단원이 되고 무대에서 이런 기쁨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 이상재(55) 단장이 2007년 하트시각장애인체임버오케스트라를 창단하고 지금까지 이들을 이끌고 있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이 단장은 7세 때 교통사고로 망막 손상을 입었다. 3년 동안 9번의 수술을 했지만 10세 때 완전히 실명했다. 빛은 잃었지만 희망은 잃지 않았다. 중학교 1학년 때 클라리넷을 시작해 중앙대 음대 관현악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미국 3대 음악대학으로 꼽히는 피바디음대에서 음악박사 학위를 받았다. 시각장애인이 음악박사 학위를 받은 건 음대 140년 역사상 최초였다. 귀국 후에는 나사렛대학교 관현악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클라리넷 연주와 강의를 다니며 이 단장은 재능 있는 시각장애인 연주자들이 음악을 포기하는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시각장애인 연주자가 꾸준히 연주하고 무대에 오를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기 위해 직접 단원들을 모집해 하트시각장애인체임버오케스트라를 꾸렸다. 시각장애인 피아니스트 출신 국민의힘 김예지 국회의원도 이 오케스트라의 단원이었다. 하트시각장애인체임버오케스트라는 2011년 시각장애인 오케스트라 최초로 미국 카네기홀 무대에 올랐고 매년 50회에 달하는 공연을 다닐 만큼 성장했지만 매번 무대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다.
4월 15일 오전 청와대 공연을 앞두고 연습이 한창인 서울 서초동 하트시각장애인체임버오케스트라 연습실에서 이 단장을 만났다. 무대가 아닌 연습실에서 이 단장은 연주자이자 지휘자이다. 곡 시작을 구령으로 알리고 드럼 스틱으로 의자를 두드려 박자를 맞춘다. 박자나 음이 맞지 않을 땐 “아니, 아니”, “다시, 다시”를 외치며 연습을 이끌었다. 점심식사를 위해 잠깐 쉬어간 30분을 제외하고 연습은 3시간 넘게 계속됐다.
매주 이렇게 단원 전원이 모여 연습하나?
토요일 오전 10시 20분부터 3~4시간 정도 다 같이 연습한다. 무대에 올라가면 악보도 지휘자도 없기 때문에 연습하는 동안 “이 마디는 이렇게 연주하자, 이렇게 맞추자” 식으로 단원끼리 약속한다. 그걸 반복하고 또 반복해가며 호흡을 맞추는 과정이 중요하다.
연습을 철저히 한다고 해도 무대에서 박자나 음이 안 맞을 때도 있을 텐데.
그럴 일은 없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힘들게 연습하는 거다. 한번은 무대에서 연주를 시작했는데 협연하는 성악가가 안 나왔다. 성악가가 나올 때까지 자연스럽게 계속 연주했다. 어떤 상황인지 보이지 않고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무대에서 대처 가능할 만큼 연습이 돼 있기에 가능하다.
연주 가능한 곡은 얼마나 되나?
250곡 정도. 처음에는 영화·뮤지컬 OST나 연주곡 위주였지만 지금은 슈만 교향곡 같은 어려운 곡도 충분히 연습해 무대에 오른다.
각자 연습도 많이 필요하겠다.
매일 4~5시간씩 연습한다. 1주일에 20~30시간은 악기 연습에 시간을 쓴다. 악보도 완벽하게 외워야 한다. 각자가 연습한 후 함께 모여 음악이 완성됐을 때 느끼는 기쁨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거다.
단원은 어떻게 선발하나?
시각장애인이라고 무조건 뽑는 건 아니다. 기본적으로 음악을 전공하고 음대를 졸업하더라도 일정 수준의 실력이 돼야 한다. 오디션도 본다. 비장애인 연주자들도 한국예술종합학교 출신이나 대학 강사 등 실력파로 구성됐다.
하트시각장애인체임버오케스트라는 공연 중 공연장의 불을 모두 끄고 암전(暗轉) 공연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2008년 4월 일본 공연을 시작으로 2011년 미국 카네기홀에서도 카네기홀 개관 역사상 처음으로 암전 공연을 했다. 이 단장은 “시각장애인이 악보를 보지 않고 연주하는 걸 눈으로 보고 들을 때와 어둠 속에서 보지 않고 듣는 건 다르다”며 “시각장애인은 이렇게 사는구나, 이렇게 연주하는구나 잠깐이나마 느껴보길 바라며 기획했다”고 말했다. 아울러 “어둠 속에서 자신의 삶을 반추해보는 시간, 그런 기회를 드리고 싶었다”며 “그건 우리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암전 공연 때는 비장애인 연주자들도 모든 악보를 외워서 연주해야 한다. 그 순간만큼은 오케스트라 안에서도 시각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가 사라진다. 바이올린 연주자 김담희(41) 씨는 “악보를 모두 외우고 지휘자 없이 연주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라며 “어둠 속에서 순간순간 위기가 온다”고 말했다. 그래서 엄청난 연습이 필요하지만 서로를 이해하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서 완성되는 음악은 그만큼 더 의미 있다며 웃었다.
일반적인 무대에선 이 단장이 비장애인 연주자를 위한 나침반이 돼 준다. 꼭 함께 들어가야 하는 부분이나, 박자가 맞지 않을 때가 있으면 이 단장이 어깨나 팔, 몸을 크게 움직여 신호를 주고 하모니를 맞춘다.
오케스트라를 15년 넘게 이끌어오고 있다. 이 일을 계속하는 원동력은?
7세에 교통사고가 나고 10세 때 실명된 내가, 클라리넷을 전공해 음대를 나오고 교수가 돼 사회적 역할을 하는 인간으로 성장하기까지 부모님, 동생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다. 내가 힘들 때 도와준 사람이 정말 많은데 일일이 인사를 드리고 고마움을 전하는 것보다 내가 잘하는 음악으로 보답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선공연을 많이 했다. 그런데 공연을 다니면서 음대를 졸업해도 시각장애인은 연주할 기회가 많이 없다는 걸 알게 됐다. 오케스트라를 만들면 그들과 함께 오랫동안 음악이라는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음악을 함께 연주할 때, 함께하는 힘은 어마어마하다. 혼자 할 때보다 100배, 1000배의 효과가 난다. 음악의 위대한 힘이다. 같이 하면서 실력도 늘었고 팀워크도 좋아졌다. 이제 딱 들으면 아는 경지랄까. 그게 좋아서 힘들어도 시간을 쪼개고 계속한다.
청와대에서 장애예술인을 대표해 공연한 소감은 어떤가?
장애인의 날, 장애인 예술단체로서 공연을 한다는 건 영광스러운 일이다. 이날 공연이 대한민국의 국가 위상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자기 능력을 발휘하기 어려운 장애인이 얼마만큼의 지위와 전문성을 살리며 사느냐가 그 나라의 위상을 판단하는 바로미터 아닌가. 장애가 있어도 클래식을 연주하고 꾸준히 무대에 서는 오케스트라가 있다는 건 대한민국 장애인의 위상을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한다.
환상의 하모니를 함께 만드는 다른 단원들의 이야기도 들어봤다. 오케스트라의 악장을 맡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 이보라(41) 씨는 덕원예고, 이화여대 음대를 나왔지만 막상 졸업 후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취업을 위해 찾아간 직업개발원에서 만난 시각장애인으로부터 이런 오케스트라가 창단했으니 도전해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그길로 오케스트라에 전화해 오디션을 보고 입단해 2007년부터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약시(弱視)인 이 씨는 확대경으로 악보를 본다. 그렇다고 해도 악보를 보며 연주하기는 어려워 다른 단원들처럼 악보를 통째로 외워야 한다. 이 씨는 “암기력이 좋지 않아 악보가 외워질 때까지 외우고 또 외운다”고 했다. 매일 3시간씩 개인 연습을 하며 외운 악보는 몸에 익힌다. 공연 때마다 이 곡들을 다시 암기하고 연습해 무대에 오른다.
“우리가 시각장애가 있다 보니 먼저 다가가서 누구와 인사하기 어렵잖아요. 그런데 연주를 통해 관객에게 먼저 다가갈 수 있다는 게 좋아요. 감동을 줄 수 있고요. 오케스트라를 하면서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게 정말 행복해요. 그래서 더 노력하게 됩니다.”
트럼펫 연주자인 강재현(31) 씨는 연습 내내 박자나 음이 맞지 않을 때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단원이었다. 마치 악보를 보고 있는 것처럼 틀린 부분을 쏙쏙 집어낸다고 하니 “남들보다 악보를 조금 더 잘 외우고 음감이 조금 더 좋을 뿐”이라며 “오케스트라에 애정이 있고 더 나은 음악을 만들려고 제안을 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1세 때 열병으로 시신경 손상을 입은 강 씨는 중학교 때부터 음악을 시작해 대학에서 트럼펫을 전공했다.
강 씨에겐 늘 함께하는 파트너가 있다. 안내견 푸름이다. 무대에도 같이 오른다. “공연 때는 제 다리 밑에 들어와 얌전히 기다려요. 저를 닮아 악기도 좋아하고 음악 듣는 걸 좋아해요.”
비올리스트 김경석(26) 씨는 선천적 시각장애인이다. 그는 약지(네 번째 손가락)와 소지(다섯 번째 손가락)가 붙은 손 기형도 가지고 태어났다. 어릴 적 분리 수술을 받았지만 소지가 두 마디로 짧아 일반인보다 손을 사용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연주자에게는 치명적 약점이다. 그만큼 부단히 노력해 무대에 오른다.
“음악 대신 안마사로 살까 생각도 했어요. 실제로 몇 년을 그렇게 살았고요. 하지만 무대에서 박수 받을 때 그 짜릿함, 연주자라는 직업이 주는 책임감은 남다릅니다. 자존감도 올라가고요. 그래서 악기를 놓지 않고 계속 연주자로 살며 함께 무대에 오르고 싶어요.”
강정미 기자
박스기사
“장애인 문화예술 환경이 좋아지면 모든 사람의 환경도 좋아진다”
제43회 장애인의 날을 맞아 청와대 춘추관에서 열린 하트시각장애인체임버오케스트라의 공연에는 특별한 손님들이 참석했다.
시각장애인으로 음악을 전공하고 있는 장애예술인 꿈나무들을 비롯해 웹툰 작가와 연극 연출 겸 배우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청년 장애예술인, 문화체육관광부의 청년정책을 이끌어나가는 MZ드리머스(2030자문단)다. 이 외에도 김영일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장, 배은주 한국장애인총연합회 상임대표, 방귀희 한국장애예술인협회장, 김형희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이사장 등이 참석했다. 공모를 통해 선정된 국민 관객 50명도 하트시각장애인체임버오케스트라가 들려주는 뜻깊은 연주를 감상했다.
박보균 문체부 장관은 ‘장애인 프렌들리’ 가치를 정책에 반영하기 위해 2022년 8월 청와대에서 장애예술인 특별전을 추진한 데 이어 장애인 오케스트라 특별공연도 마련했다. 박 장관은 “장애인의 문화예술·체육·관광의 환경이 좋아지면 모든 사람의 환경도 좋아진다”고 강조해왔다. 문체부는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장애예술인의 무대가 이어지도록 정책을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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