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름돌? 씨름 스타보다 씨름이 더 빛나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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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름 부활 이끄는 ‘씨름계 아이돌’ 허선행 선수
“이 좋은 걸 할배들만 보고 있었네.” 한 누리꾼의 댓글에서 비롯돼 유행처럼 번진 이 말은 씨름을 바라보는 대중의 변화된 인식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의 말대로 일부 노년층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씨름이 몇 해 전부터 완전히 달라졌다. 썰렁했던 관중석은 2030 젊은 팬들로 채워지기 시작했고 인터넷에 올라온 경기 영상은 조회수 수만을 가뿐히 넘긴다. 씨름을 전문으로 하는 개인 방송이 등장하는가 하면 씨름을 생활스포츠로 즐기는 이들도 늘었다.
이 같은 ‘씨름 부활’의 서막을 연 것은 TV 예능 프로그램과 유튜브 영상이었다. 태백(80㎏ 이하)·금강(90㎏ 이하)급 씨름 선수 16명의 대결을 그린 KBS <씨름의 희열>(2019)은 ‘씨름=힘’이란 공식을 180도 뒤집으며 기술씨름의 매력을 제대로 보여줬다. 시청자들은 경량급 선수들의 조각 같은 몸매에 한 번, 뒤집기 등 화려한 기술로 상대를 모래판 위로 내던지는 박진감 넘치는 경기에 또 한 번 매료됐다. 때마침 제1회 학산배 전국장사 씨름대회 결승전 영상이 조회수 200만을 넘기며 인기에 제대로 불을 지폈고, 앞서 대한씨름협회에서 제작한 홍보영상이 덩달아 역주행하는 등 대중의 무관심 속에 잠자던 씨름은 다시 기지개를 켰다.
인기의 중심엔 허선행이 있다. <씨름의 희열> 출연 당시 국내 실업팀 소속 선수 중 막내였던 그는 수려한 외모와 넘치는 패기, 단 몇 초 만에 승부를 내는 화끈한 경기력으로 최고의 스타가 됐다. 이후 각종 방송에 출연해 예능 감각까지 뽐내며 ‘씨름돌(씨름계 아이돌)’이란 별명도 얻었다. 그가 출전하는 경기엔 이른바 대포카메라를 든 ‘행바(허선행만 바라보는 팬들)’가 늘 따라다닐 정도다. 그러나 그를 인기 스타로만 보면 서운하다. 허선행은 ‘2000년대 이후 최연소 태백장사’라는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다. 스무 살의 나이로 2019 천하장사씨름대축제에서 당당히 황소 트로피를 들어올린 결과다. 2020년엔 부상 등으로 부진했지만 2021년 설날장사씨름대회에서 또 한 번 정상에 올랐고 이어 2022년엔 추석장사씨름대회, 안산김홍도장사씨름대회를 연달아 제패했다. 개인 통산 네 번째 태백장사 꽃가마에 오른 순간이다.
경기대 광교씨름전용체육관에서 허선행을 만났다. 코로나19 등을 거치며 다소 인기가 주춤해진 씨름판에 다시 훈풍을 불러일으키겠다는 문화체육관광부의 ‘K-씨름 진흥방안’이 발표된 뒤다. 화려한 조명도, 대포카메라도 없었지만 체육관엔 훈련 중인 선수들의 기합소리가 쩌렁쩌렁했다. 허선행은 트레이드마크인 시원한 미소를 보이면서도 연신 진지했다. 막내 티를 벗은 그는 ‘씨름 스타’가 아닌 씨름이 더 빛나야 한다며 입술에 힘을 줬다.
새해부터 수원특례시청 소속이 됐다. 이적 후 첫 경기였던 설 대회 8강에서 탈락했는데 아직 적응이 덜 된 건가?
아직 완벽하게 적응이 되진 않았다. 팀을 옮기면 먹는 것부터 쉬는 것, 팀 분위기까지 정말 많은 게 바뀐다. 이런 것을 빨리 받아들여야 하는데 원래부터 해온 걸 쉽게 바꾸는 성격이 아니라 어려움이 있다. 설 경기에선 외려 자신감이 과해 일찍 탈락했다. 연습이 잘된 탓에 자만했다.
2022년 태백장사에 두 차례 오르기 전까지 1년 7개월의 공백이 있었다. 은퇴 생각까지 했다면서 승리 후 눈물을 보였는데 어떤 심정이었나?
부상 후 1년간 재활하느라 무척 힘들었다. 씨름을 사랑하지만 훈련은 너무 힘들다. 우승 후에도 기쁨보단 그간 열심히 해온 데 대한 보상을 받았단 느낌이었다. 두 번째 장사에 오를 때까진 우승하고도 만족하지 못했는데 2022년 두 경기 후 비로소 스스로를 ‘장사’라고 인정하게 됐다. 그땐 압도적으로 잘했다. 다만 씨름은 갈수록 더 힘들다. 남들보다 몇 배로 더 노력해야 장사 타이틀을 유지할 수 있으니 말이다. 당장 4월 9일부터 열리는 2023 평창장사씨름대회에 나간다. 목표는 첫째도 둘째도 부상을 안 입는 거다. 물론 우승도 할 거다.
2019년을 전후해 큰 인기를 누린 씨름은 코로나19를 지나며 부침을 겪었다. 인기 여부가 선수에게 영향이 있나?
그때보다 사그라들긴 했지만 여전히 인기는 있다. 경기 때마다 항상 와주는 팬들도 많다. 확실히 선수에겐 팬들의 영향이 크다. 특히 나는 분위기를 많이 탄다. 경기장에 관중이 많으면 씨름할 맛이 더 난다. 다만 몇몇 선수가 주목받고 있을 뿐 씨름 자체에 대한 관심은 아직도 부족하다고 느낀다. 과거 TV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것도 씨름을 알리기 위해서였는데 어느 순간 보니 사람들이 허선행은 아는데 씨름에 대해선 여전히 모르더라. 앞으로 예능 출연은 자제하고 방송이 아닌 경기를 통해 이름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씨름 스타보다 씨름이 더 주목받길 바란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 샅바를 잡았다. 당시엔 비인기 종목이었는데 어떤 마음으로 시작했나?
어렸을 때부터 승부욕이 강했다. 운동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보니 씨름이 가장 돈이 안 드는 종목이었다. 중학교 때까진 아무 생각 없이 했는데 고등학교에 가면서 자부심이 생겼다. 씨름 선수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고 전통 스포츠인 씨름을 일본 스모처럼 인기 종목으로 만들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런 목표가 있으니 내가 잘해 씨름을 알려야겠다는 마음을 계속 품고 지냈다.
씨름을 재밌게 볼 수 있는 포인트가 있나?
선수를 알면 된다. 내가 아는 선수를 응원하는 순간 경기가 재밌어진다. 무엇보다 경기장에 직접 오는 걸 추천한다. 이 선수가 어떤 기술을 주로 쓰는지 정도만 알면 된다. 잘하는 선수는 누가 봐도 눈에 띈다. 영상으로 씨름에 입문한다면 2022 천하장사씨름대축제 태백급 결승전을 보길 권한다. 범수 형(노범수·울주군청)한테 졌음에도 역대 경기 중 가장 만족스러웠다.(해설자가 ‘숙명의 라이벌전’이라 묘사한 이 대결에서 두 선수는 3선승제 경기를 3대2까지 끌고가는 접전을 펼치며 엄청난 육탄전을 벌인다. 기자도 이 영상을 본 뒤 씨름에 제대로 ‘입덕’했다.)
‘씨름’ 하면 과거엔 육중한 몸의 선수들을 먼저 떠올렸지만 요즘엔 ‘몸짱’ 선수들이 대세다.
어떤 스포츠건 중량급 선수가 귀하다. 예전부터 씨름판엔 경량급 선수가 더 많았다. 다만 체급순으로 경기가 열리다 보니 항상 명절 당일엔 중량급 선수들의 일정이 잡혀 시청자들은 한라(105㎏ 이하)·백두(140㎏ 이하)급 선수들의 모습에 익숙했던 거다. 일각에선 최근 씨름의 인기가 경량급 선수 위주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지만 가장 큰 경기는 체급 구분 없이 펼쳐지는 천하장사 대회인 만큼 중량급 선수들이 주인공일 수밖에 없다. 오히려 경량급 선수들이 지금보다 더 많이 알려져야 한다고 본다.
제2의 허선행을 꿈꾸는 이도 있을 텐데 선수 육성 인프라는 얼마나 잘 갖춰져 있나?
여자 씨름에 비해 남자 씨름은 인프라가 탄탄한 편이다. 씨름부가 있는 초·중·고등학교가 거의 모든 지역에 있다. 1980년대 씨름이 절정의 인기를 누렸을 때 기반을 잘 마련한 덕분이다. 아직은 하려는 이들이 많지 않을 뿐이다. 뒤집어 생각하면 지원자가 많지 않기 때문에 축구 같은 인기 종목에 비해 선수가 되기는 쉬울 수 있다.
2023년 MG새마을금고씨름단이 출범하면서 19개 팀 체제가 됐다. 여느 스포츠 종목에 비해서도 팀이 많은 것 아닌가?
팀은 많지만 신생팀을 제외한 18개 팀이 모두 실업팀이라는 게 아쉽다.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실업팀은 예산 문제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대여섯 개 팀을 제외한 나머지는 열악한 상황이다. 팀이 많다고 좋아할 수만은 없단 거다. 씨름도 프로리그로 전환해야 한다. 실업과 프로는 연봉은 물론 훈련 환경과 선수 관리 측면에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차이가 크다. 프로리그로 전환하면 선수 생명력도 길어지고 씨름 저변도 더욱 넓어질 거다. 그런 측면에서 기업에서 신생팀을 창단한 건 무척 감사한 일이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K-씨름 진흥방안’을 내놨다. 씨름이 인기 스포츠로 거듭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게 뭐라고 보나?
당장 인기를 얻는 것보다 중요한 건 선수들이 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거다. 씨름은 설·추석·단오 등 주요 명절을 중심으로 연중 내내 수십 개의 대회가 열린다. 비시즌이 없어 몸 관리하기가 무척 힘들다. 이런 선수들의 요구를 전달할 창구가 있어야 하는데 씨름선수협회가 없다. 프로리그로 전환하기 위해 첫 번째로 생겨야 할 게 선수협회다. 선수들이 진짜 원하는 걸 파악하는 것에서부터 씨름계의 변화가 시작돼야 한다.
씨름계 막내였던 예전과 많이 달라진 것 같다. 어떤 선수가 되고 싶나?
어렸을 땐 내가 최고라고 여겼다. ‘누가 날 이길까’ ‘아무한테도 안 져’라고 생각했다. 요즘은 ‘다치면 안된다’ ‘남보다 열심히 해야 한다’는 다짐을 많이 한다. 다치지 않고 장사를 많이 하는 게 목표다. 2022년 장사를 두 번 했으니 2023년엔 세 번, 2024년엔 네 번 하고 싶다. 화려한 수식어보다 열심히 하는 선수, 씨름을 사랑한 멋진 선수로 기억되고 싶다.
조윤 기자
박스기사
‘K-씨름 진흥방안’ 주요 내용은?
2023년을 씨름 부활의 원년으로 2년 내 프로팀 5개 창단 지원
정부가 2023년을 씨름 부활의 원년으로 삼고 씨름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K-스포츠가 되도록 지원하기로 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 1월 발표한 ‘K-씨름 진흥방안’에 따르면 우선 차별성 없는 대회가 난립하는 문제를 개선하고 시·군 단위 체육관에서 열려 주목도가 떨어지는 대회를 서울 등 대도시에서 개최한다. 현재 가장 경량급인 태백급보다 낮은 ‘소백급’을 신설해 기술씨름을 견인하고 예측 불가능한 경기가 되도록 토너먼트 외의 경기방식을 도입한다.
실업리그를 프로리그로 전환하기 위한 작업에도 착수한다. 실업팀과 프로팀이 혼합된 세미프로리그를 2023년 출범하고 2025년까지 프로팀 5개 창단을 지원하는 방식이다. 경기장은 멀티미디어 기술을 활용해 몰입감을 높이고 씨름 예능 콘텐츠를 제작해 씨름 부흥의 분위기를 사회 전반에 확산한다. 박보균 문체부 장관은 “대회와 경기방식, 경기장을 포함한 씨름의 모든 것을 혁신해 제2의 이만기, 강호동이 나오게 할 것”이라고 밝혔다.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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