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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뜻을 전하는 마음 전달자 쓸 때마다 붓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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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다섯 번째 필경사 유기원 인사혁신처 주무관
필경사는 대통령 명의 임명장을 붓글씨로 쓰고 대한민국 국새를 날인하는 공무원이다. 대한민국 공무원 가운데 가장 희귀한 직군으로 꼽힌다. 1962년 필경사가 생긴 이후 72년 동안 우리나라에는 모두 네 명의 필경사가 있었다.
지난 7월 다섯 번째 필경사가 임용되기까지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인사혁신처는 지난해 초 퇴직한 3대 필경사의 후임을 찾기 위해 채용공고를 냈지만 적격자를 찾지 못했다. 4대 필경사 김동훈 주무관 혼자 근무했고 올해 다시 채용이 진행됐다. 지난 7월 56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최종 임용된 주인공은 유기원 주무관이다.
대전대 서예학과를 졸업하고 석사와 박사학위까지 받은 유 주무관은 필경사가 되기 전 활동이 활발한 서예 작가였다. 제34회 대한민국 미술대전(국전) 서예부문에서 대상을 받는 등 두각을 나타낸 그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기도 하고 미술대회에서 심사를 맡는 등 굵직한 행보를 보였다. ‘노량’, ‘경성크리처’, ‘재벌집 막내아들’ 등 영화와 드라마에 등장하는 글씨를 대필하기도 했다.
임명장에 글씨를 쓸 때마다 붓의 무거움을 느낀다는 유 주무관을 11월 4일 세종시 소재 인사처에서 만났다. 최근 인기 예능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게스트로 출연해 눈길을 끌었던 그는 다섯 번째 필경사로서의 책임감과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인기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화제성이 있었다. 방송 출연 이후 필경사에 대한 관심과 노출을 실감하나?
방송 출연으로 달라진 일상은 없지만 즐거운 경험이었다. 다섯 번째 필경사로서 출연하게 된 것이 영광이었다. 필경사는 사실 나도 잘 모르는 직업군이었다. 대학교수로 30여 년 근속한 아버지가 옥조근정훈장을 받으셨는데 상을 가만히 보니 손으로 쓴 글씨인 것 같더라. ‘이런 건 누가 쓰는 건가’ 생각하던 중 필경사로 근무한 김이중 전 사무관이 출연한 ‘유 퀴즈 온 더 블럭’ 프로그램을 보게 됐다. TV를 보면서 나와 상관없는 세계의 직업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출연하게 돼서 신기한 마음이었다.

방송에서 먹을 갈며 시작하는 필경사의 하루가 소개됐다. 업무 적응은 잘하고 있나?
이제 임용된 지 석 달이 조금 지났다. 아직 모르는 것도 있지만 업무 시스템을 파악하며 배워가는 중이다. 필경사 업무가 단순히 글씨만 쓰는 건 아니다. 공문이 접수되면 해당자가 맞는지 확인하고 시스템에 입력한 다음 특수 제작된 용지에 글씨를 쓴다. 완성된 임명장에 국새 날인을 받고 교부까지 받아야 업무가 끝난다.

임용 당시 ‘대통령과 손을 잡고 글씨를 쓰는 마음으로 임하겠다’는 소감을 남겼다. 그 마음은 잘 지켜지고 있는 것 같나?
임용장에는 진급하는 공무원을 격려하는 대통령의 마음이 담겨 있지 않나. 내 손이 대통령의 손을 대신해 글씨를 쓰니까 그 마음을 기억하며 쓰겠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쓸 때마다 붓이 무겁다.

서예가로 활동하다가 필경사가 되면서 달라진 것도 많을 것 같다. 제일 먼저 서체가 달라졌을 텐데 구체적으로 어떤가?
새로운 서체를 배운다고 생각하며 공부하고 있다. 임명장의 글씨는 일반 서예와 개념이 다르다. 쓰는 의도 또한 명확하다는 점에서 다르다.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서예라면 임명장은 일정하고 단정하게 무게감 있게 써야 한다.

글씨를 잘 써서 필경사로 임용된 건데도 공부가 필요한가?
어느 정도 쓸 줄은 알지만 임명장에 들어가는 글씨는 나도 처음 써본 글씨다. 물론 시험에 응시한 분들 중에 괜찮아서 뽑아주셨겠지만 선배 필경사처럼 되려면 더 열심히 서체를 개발하고 공부해야 한다.

글씨에는 사람의 성격, 습관, 기질 등이 반영되지 않나. 임명장의 글씨에 대통령의 스타일이 반영되기도 하나?
그런 건 없다. 다만 선배 필경사께서 내 글씨체를 검토해줄 때 ‘지금 쓴 글씨체가 튼튼하고 힘 있고 무게감이 있어서 좋다’고 하셨다. 그런 말씀 안에 임명장 글씨가 추구하는 스타일이 반영돼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서예가로서의 스펙을 두고 온 데 대한 아쉬움은 없나?
원래 대전대에서 교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학부에서 서예 전공이 사라지고 대학원만 남은 상황에서 여러모로 힘들어졌다. 국전 대상 수상을 비롯해 심사, 강의 등 서예 관련 활동을 활발하게 한 것이 교수가 되기 위한 준비과정이었지만 이것이 필경사가 되는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 그 덕에 필경사가 됐다고 생각한다. 잘된 것 같다.

새로 임용된 필경사로서 본인만의 차별점을 꼽는다면?
아직은 부족하다. 굳이 꼽는다면 서예계에서 활동을 활발하게 한 것이 아닐까. 역대 필경사 중에 서예 전공자가 있었지만 나는 서단에서 활동하다가 늦게 들어와서 조금 다른 케이스다. 지금은 필경사 업무에 집중해서 적응하는 시간을 갖고 앞으로 서예가로서의 행보는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서예는 어떻게 처음 시작했나?
어릴 때 동양철학을 공부하신 아버지께서 ‘사자소학’을 작은 붓으로 써보라고 했다. 그땐 ‘사자소학’이 뭔지도 모르고 그냥 썼다. 그러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한글 서예를 2년 정도 배웠다. 당시 담임선생님이 서예가였다. 고등학교 때는 서예반이 있어서 가입해서 활동했다. 대회에도 나가보고 하니 다른 글씨도 잘 쓰고 싶은 마음이 들었고 이걸 평생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서예를 배우고 전공으로 선택하게 됐다.

본인이 생각하는 서예의 매력은 뭔가?
원래 조용한 성격이라서 잘 맞았는지 모르겠는데 서예를 쓰는 공간이 좋았다. 글씨를 쓰는 동안에는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막 안에 있는 것 같다. 안정감이 든다. 서예 붓은 미술 붓과 달라서 세지 않다. 붓이 화선지에 닿을 때 먹이 번지는 느낌도 좋다.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필체가 고민인 사람도 많다. 서체는 노력하면 좋아지나?
물론이다. 노력해서 안되는 건 없다. 기본적으로 손재주가 있는 사람이 붓글씨를 습득하는 속도가 빠르긴 하지만 서예의 자형만 알면 누구나 잘 쓸 수 있다. 다만 붓으로 쓰는 것과 펜으로 쓰는 것이 같지 않다. 따로 연습을 해야 한다.

앞으로 필경사로서 어떤 역할을 하고 싶나?
심사임용과에서 진행하는 팀 업무가 있다. 팀의 일원으로서 전체적인 업무의 흐름을 잘 파악하고 싶다. 내 업무는 특수하게 정해져 있어서 정년 때까지 부서를 옮길 일이 없다. 기존 필경사께서는 10년 전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도 다 알고 계신다. 나도 지금부터 차근차근 팀의 업무 대해서 더 잘 알고 싶다. 또 한 가지 더 꼭 지키고 싶은 것은 임명장만 쓰는 필경사가 아니라 서예가로 활동하는 필경사가 되고 싶다.

서예가로 활동하는 필경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나?
나는 한국 서단에서 활동을 많이 했다. 필경사가 됐다고 축하해주는 분도 있었고 서예가로서 활동에 제약이 있을 것이라고 염려해주는 분도 있었다. 나는 둘 다 소홀하게 하고 싶지 않다. 지금은 필경사 업무에 집중해야 하는 시기다.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업무에 지장이 없는 선에서 서예 활동의 비중도 늘릴 생각이다. 필경사는 서예를 공부한 사람이 아니면 못하는 어려운 자리라는 것을 나를 통해 꼭 알리고 싶다.

필경사로서 이루고 싶은 꿈이나 목표는 뭔가?
일을 할수록 나는 ‘마음 전달자’라는 생각이 든다. 대통령의 마음을 임명장에 담아서 전달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마음 전달자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좋은 글씨를 담는 게 기본이다. 그러기 위해서 글씨 연습을 열심히 할 것이다. 임명장은 우리나라를 움직이는 조직에서 일하고 있는 5급 이상 공무원들에게 전하는 것이다. 각자의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는 마음을 전하는 것도 내가 할 일이다.

임언영 기자 


[자료제공 :icon_logo.gif(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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