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의 마지막 숨결을 담은 ‘레퀴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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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제적인 음악제라면 단연 평창대관령음악제이다. 2004년 개막 이후 강원도의 아름다운 대자연 속에서 매년 7~8월에 펼쳐지는 이 성대한 음악제는 미국 콜로라도 주 로키산맥 고지의 이름 없는 폐광촌을 세계적인 음악도시로 만든 아스펜음악제를 모델로 해서 만든 것이다.
2011년 평창대관령음악제의 개막곡은 모차르트의 ‘레퀴엠’이었다. 당시 나는 이 곡이 개막곡으로 선정된 것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아무리 음악적으로 아름답다고 해도 이 곡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진혼곡, 즉 ‘죽은 자를 위한 음악’이기 때문에 여름음악제를 진혼곡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주 부적절했던 것이다.
‘레퀴엠’은 14개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고 연주시간이 약 50분이 되는 대곡으로 모차르트의 생애 마지막 작품이다. 하지만 그가 모두 완성한 것은 아니다. 사실 그는 이 작품의 앞부분 일부만 직접 완성했다.
모차르트는 1791년 12월 5일 0시 55분에 영원히 숨을 거두었는데 병상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마지막 작품에서 연주될 마지막 음을 제자에게 지시해주면서 숨을 거두었다고 하니 그의 마지막 숨소리도 그의 음악이 되었던 셈이다.
한편 모차르트가 빈(wien)에서 마지막으로 살던 집은 슈태판 대성당 남쪽으로 약 200미터 떨어진 곳인데 당시의 건물은 1849년에 헐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상업건물이 들어섰다.
새 건물의 벽면에는 모차르트가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살았다는 문구를 담은 명판이 붙어있다.
그럼 ‘레퀴엠’이 무슨 뜻일까? 이것은 카톨릭 교회의 장례 미사에서 쓰는 라는 라틴어 미사 통상 기도문의 첫 단어로 ‘안식을’이란 뜻이다.
이 문장 전체를 번역하면 ‘안식을(Requiem) 영원한 (aeternam) 주소서(dona) 그들에게(eis), 주여(Domine)’ 즉, ‘주여,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이다.
그러고 보면 모차르트는 운명의 장난처럼 ‘레퀴엠’을 본의 아니게 자기 자신을 위해 쓴 셈이다. 그럼 어떻게 이런 작품을 쓰게 되었을까?
모차르트는 죽기 6개월 전부터 자기를 시기하는 누군가가 자기를 독살하려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던 1791년 어느 날 회색 옷을 입은 한 신사가 그를 찾아왔다. 이 신사는 어느 정체불명의 귀족이 보낸 사람이었는데 모차르트에게 파격적인 작곡료를 제시하면서 ‘레퀴엠’ 작곡을 의뢰했다. 그러고는 계약금조로 전체 액수의 50%을 선뜻 내놓았다.
모차르트는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들었지만 항상 돈에 쪼들려 있던 터라 이게 웬 굴러온 호박이냐 싶었을 거다. 또 한편으로 이 곡을 한번 심혈을 기울여 쓰고 싶은 욕망도 있었다. 왜냐면 슈테판 대성당의 음악감독 자리에 지원하려면 종교음악도 잘 쓴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그해 9월 8일에 프라하에서 오페라 ‘티투스 황제의 자비’ 초연 일정이 잡혀있었기 때문에 ‘레퀴엠’을 작곡할 시간적 여유가 전혀 없었다.
그러다가 9월 중순에 비로소 손을 대긴 했지만 그달 30일에는 ‘마술피리’ 초연 일정이 잡혀 있었기 때문에 이 오페라를 마무리하는 것이 더 급했다.
그러다가 비로소 10월에 ‘레퀴엠’ 작곡을 시작했는데 이때만 하더라도 그의 건강에는 크게 문제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이 곡이 자기 자신을 위한 진혼곡이 되지나 않을까하는 불길한 생각에 사로잡혔었다고 한다.
11월 20일 손발이 붓고 갑자기 토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는 더 이상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 상태로 2주일이 지난 12월 4일 그는 제자들을 불러놓고 어떻게 작곡할 것인지 지시할 정도로 의식이 있었다.
하지만 저녁이 되자 고열과 두통으로 괴로워하기 시작하더니 11시경이 되어서는 의식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그리고는 자정을 넘긴지 55분이 되었을 때 그만 영원한 안식의 길로 떠나고 말았다.
‘레퀴엠’에서 가장 감동적인 곡인 <라크리모사>에서 그의 손길은 8번째 마디에서 중단되었다. 라크리모사(Lacrimosa)는 ‘눈물에 젖은’이란 뜻이다.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는 것을 느낀 모차르트는 이 곡을 쓸 때 솟아오르는 눈물을 가누지 못했을 것이다.
한편 28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부인 콘스탄체는 이 작품을 완성하지 않으면 계약위반이 되기 때문에 남의 손을 빌려서라도 완성된 작품을 넘겨주고 잔금을 받아야 했다. 이리하여 모차르트의 임종순간을 끝까지 지켜봤던 제자 프란츠 쥐스마이어(Franz X. Süssmayr)가 이를 모두 완성했고 완성된 작품은 마침내 이름도 성도 얼굴도 모르는 귀족에게 넘겨졌다.
그런데 이 정체불명의 귀족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그의 정체는 약 10년이 흐른 다음에야 밝혀졌는데 그는 프란츠 폰 발젝 백작이었다. 아마추어 음악가였던 그는 1791년 2월에 세상을 떠난 자기 아내를 추도하기 위해 ‘레퀴엠’을 모차르트에게 의뢰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상습적으로 다른 사람이 쓴 곡을 자기 작품으로 도용하는 고약한 버릇이 있었다. ‘레퀴엠’도 자신이 작곡했다면서 1793년 12월 14일에 자신의 지휘로 연주도 했다고 한다.
◆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건축 분야 외에도 음악·미술·언어·역사 등 여러 분야에 박식하고, 유럽과 국내를 오가며 강연과 저술 활동도 하고 있다.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 산책> 외에도 여러 저서를 펴냈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culturebox@naver.com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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