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역사 속 꽃피운 예술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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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펠리에 파브르 미술관 ©Björn S
프랑스 남부 옥시타니 레지옹에는 천년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유서 깊은 도시가 하나 있다. 인구 46만여 명으로 에로 주의 주도(州都)이기도 한 이 도시는 서구 문명의 요람 지중해에서 불과 10여km 떨어진 비옥한 평야 지대에 자리 잡은 데다 날씨마저 쾌적해 살기 좋은 곳으로 소문나 있다.
지중해가 가깝고 1년에 두 달 정도를 빼고는 늘 맑은 하늘을 볼 수 있는 천혜의 기후 조건 때문에 프랑스는 물론 스페인과 이탈리아 등 인근 유럽 국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 도시가 바로 고색창연한 몽펠리에다. 몽펠리에는 중세 때부터 시작된 도시의 역사성에 어울리게 외지인들의 눈길을 사로잡고도 남을 매력적인 콘텐츠를 풍부하게 보유하고 있다.
▶프랑수아 자비에 파브르 자화상. 캔버스에 유화, 72.5×59cm, 1835
고색창연하고 학구적인 도시 분위기
몽펠리에의 역사적 뿌리는 10세기 당시 귀중품으로 대우받던 향신료 무역을 위해 건설된 도시라는 데에서 시작된다. 동방의 아랍 상인들이 가져온 향신료와 약재 거래가 성행하면서 몽펠리에의 지역 경제도 번창했는데 이는 약학 분야의 발달로 이어지면서 12세기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의학을 가르치는 의학교가 세워지는 성과를 낳았다. 1220년 몽펠리에대학교가 설립되고 1년 만인 1221년 이 대학에 의학부가 생긴 것도 우연이 아니다.
전체 인구의 절반가량이 30대 이하인데 그중 4분의 1이 젊은 학생일 정도로 도시 전체가 학구적인 분위기로 넘쳐난다. 오늘날 학문의 도시, 대학의 도시라는 영예로운 호칭으로 불리는 몽펠리에 시민들의 자긍심 면면에는 800년이라는 역사의 나이테가 새겨져 있다.
몽펠리에의 역사성을 음미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존재는 몽펠리에 식물원이다. 1593년 프랑스 국왕 앙리 4세(1553~1610, 재위 1589~1610)가 의대생들의 실습용 정원으로 만든 데서 출발했으며 400년의 역사를 훌쩍 뛰어넘는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식물원이다.
4만 5000㎡(약 1만 3600평)의 광활한 구역에 관리 식물만 약 2700종이다. 구시가지 곳곳에 중세 분위기가 만연한 몽펠리에의 또 다른 유적지는 1364년 수도원의 별채로 건립됐다가 약 200년 뒤 성당으로 재단장한 몽펠리에 생피에르 대성당이다. 지름 4m가 넘는 원뿔 모양의 기둥 두 개와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건축미에서 고성 분위기가 완연하다. 16세기 신·구교 간에 벌어진 종교전쟁 당시 파괴됐다가 17세기에 복원됐다.
▶파브르 미술관 실내 전경 ©Thomon
▶생 피에르 대성당 ©Demeester│©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15~20세기 유럽 회화 등 5000여 점 소장
몽펠리에는 여러모로 파리와 닮았다. 개선문과 오페라 하우스, 샹젤리제 거리 등 파리를 대표하는 상징물들을 몽펠리에에서도 볼 수 있다. 몽펠리에 도심은 유럽에서 가장 넓은 코메디 광장이 출발지다. 1755년에 건축된 코메디 광장은 몽펠리에역에서 걸어서 5~6분 거리에 있다. 광장이 달걀처럼 타원형으로 생겨 달걀 광장이란 별칭으로 불린다.
코메디 광장에서 남서 방향 끝자락에는 1888년에 지은 오페라 하우스가 있다. 1875년 신바로크 양식으로 건립한 파리 오페라 하우스를 모방해 만들었다. 오페라 하우스 앞에 눈길을 끄는 분수대가 보이는데 그리스 신화 속 세 미녀신 조각상으로 꾸며진 명물이다.
광장은 구시가지인 에쿠송으로 연결되는데 그곳에 1692년에 건설된 개선문이 있다. 1836년에 완공된 파리의 개선문보다는 규모가 작지만 몽펠리에의 관문이나 다름없다. 개선문 앞으로 확 트인 큰길이 나 있는데 파리 샹젤리제 거리를 벤치마킹해 만든 포슈 거리다.
개선문 뒤로 태양왕 루이 14세(1638~1715, 재위 1643~1715)를 기념하기 위해 1689년에 완공한 페이루 왕실 광장이 나온다. 광장 중앙에 루이 14세의 기마상이 세워져 있다.
코메디 광장 인근에는 몽펠리에를 넘어 프랑스가 자랑하는 문화명소가 하나 있는데 바로 몽펠리에 파브르 미술관이다. 미술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몽펠리에 출신으로 18~19세기에 활동한 화가 프랑수아 자비에 파브르(1766~1837)를 기리기 위해 설립된 200년 전통의 미술관이다. 15~20세기 유럽의 회화, 조각, 공예품 등 50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는데 컬렉션의 규모나 질적 가치에서 프랑스에서도 손꼽히는 국보급 미술관으로 인정받고 있다.
▶몽펠리에 구시가지의 명소 코메디 광장 ©Fritz Geller-Grimm
소장품의 백미 ‘안녕하십니까, 쿠르베씨’
1766년 몽펠리에에서 태어난 파브르는 열여덟 살 연상으로 신고전주의의 선구자 자크 루이 다비드(1748~1825)에게 사사(師事)했다. 파브르의 화풍이 신고전주의의 계보를 잇는다는 평가는 그런 점에서 자연스럽다. 20대 초반 화가로서 역량을 인정받은 파브르는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오랫동안 그림 공부에 매진했다. 그가 고향 몽펠리에로 다시 돌아온 것은 환갑이 돼서였다.
고향 땅을 밟기 1년 전인 1825년, 파브르는 중대 결심을 한다. 태어난 곳이자 묻힐 곳이기도 한 몽펠리에에도 번듯한 미술관이 하나쯤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작품들을 고향에 기증하기로 한 것이다. 몽펠리에시는 파브르의 미술품 기증을 컬렉션 삼아 1828년 12월 시내 한 호텔 건물에 미술관을 설립하고 일반인들에게 공개했다.
미술관 설립에 필요한 핵심 자산인 소장품을 공공재로 인식한 파브르는 미리 작성한 유언장에 따라 1837년 사망 후 100여 점이 넘는 유작들을 추가로 기증했다. 미술관 설립을 주도하고 컬렉션 확장을 도모한 파브르의 행동은 몽펠리에 출신 동료 작가들과 지역 컬렉터들이 자발적으로 미술품을 기증하는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컬렉터 중에서 19세기 사실주의 화풍의 대명사 구스타브 쿠르베(1819~1877)의 경제적 후원자이자 미술 애호가였던 알프레드 브뤼야스(1821~1877)가 가장 유명하다.
브뤼야스는 유대인 출신의 부유한 은행가 집안의 후손으로 몽펠리에의 지역 유지이자 미술계의 큰손으로 소문난 수집가이면서 화가들과의 친분이 두터웠다. 특히 두 살 위인 쿠르베의 열렬한 팬이었는데 쿠르베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재정적인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브뤼야스는 1877년 쿠르베와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나면서 쿠르베의 작품을 포함해 200여 점의 방대한 개인 컬렉션을 파브르 미술관에 기증하는 통 큰 예술적 안목으로 주목을 받았다. 브뤼야스가 기증한 쿠르베의 작품 중 ‘안녕하십니까, 쿠르베씨’(1854)는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쿠르베의 간판 작품이자 파브르 미술관 컬렉션의 백미로 꼽히고 있다. 쿠르베가 자신의 후원자인 브뤼야스가 의자에 앉아 사색에 잠긴 모습을 그린 초상화도 파브르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루이 14세 시대의 영광을 기리기 위해 페이루 왕실 광장 입구에 세워진 개선문. 파리의 개선문을 모방한 것으로 몽펠리에 시가지의 관문이다. ©Empoor
▶구스타브 쿠르베, ‘안녕하십니까, 쿠르베 씨’, 캔버스에 유화, 132×150.5cm, 1854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다양한 지역·양식에 걸친 광범위한 컬렉션
파브르가 기증한 미술품을 기반으로 문을 연 파브르 미술관은 개관 당시 소장품이 신고전주의 그림에 한정됐으나 몽펠리에 출신 화가들과 후원자들이 주도한 미술품 기증 및 기부 운동에 힘입어 컬렉션의 범위와 규모를 빠른 속도로 확장해 나갔다.
대표적인 인물이 몽펠리에 출신으로 나폴레옹 3세(1808~1873)의 총애를 받은 역사화 및 초상화가 알렉상드르 카바넬(1823~1889)과 인상파 화가들의 친구로 인상파 운동을 이끈 프레데리크 바지유(1841~1870)다.
파브르 미술관의 컬렉션은 플랑드르 회화와 유럽 회화 및 조각, 낭만주의, 사실주의, 표현주의 작품은 물론 18~19세기 유럽 가구와 도자기, 장식미술 등 15세기~19세기에 이르는 다양한 지역과 양식에 걸쳐 광범위하게 구성돼 있다.
18세기에 지어진 미술관 건물은 2003년부터 4년간 대대적인 리모델링 작업을 거쳐 2007년 1월 총 9200㎡(2783평) 규모로 재개장했다. 파브르와 쿠르베 외에 푸생(1594~1665), 앵그르(1780~1867), 들라크루아(1798~1863), 드가(1834~1917), 모네(1840~1926) 등 대가들의 그림이 망라돼 있다.
‘안녕하십니까, 쿠르베씨’는 원제가 ‘만남’인 쿠르베의 대표작이자 19세기 사실주의의 상징으로 평가받는 걸작이다. ‘보이는 대로 그리고 본 것만 그린다’라는 쿠르베의 예술철학을 대변하는 그림이다. 직업 화가로서 무한한 자긍심과 예술의 위대성을 만천하에 일깨우는 도발성으로 인해 발표 당시 숱한 얘깃거리를 낳은 화제작이다.
자신의 생계를 쥐락펴락할 수도 있는 경제적 후원자(가운데 모자든 이) 앞에서 후줄근한 차림새와 달리 고개를 빳빳이 쳐든 당당한 기세(오른쪽 인물)가 오만방자하게 느껴질 정도로 돈보다 예술의 힘이 우월하다는 자부심을 공개적으로 선언한 쿠르베의 배포가 놀랍다.
박인권 문화 칼럼니스트_ PIK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전 문화레저부 부장과 한국사립미술관협회 팀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 미술 연구용역 보고서 ‘미술관 건립·운영 매뉴얼’ ‘미술관 마케팅 백서’ 등이 있다.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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