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함으로 화려하게 꽃피운 예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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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나폴레옹 군대의 침략은 유럽에 커다란 변화의 물결을 가져왔다. 오랜 세월 강성했던 신성로마제국은 몰락의 길을 걸었으며 중부유럽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다시 재탄생됐다.
지금의 동유럽국가 체코는 보헤미아 지방의 서슬라브계 민족이 모인 지역으로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 속해있었다.
유럽은 나폴레옹 이후 서서히 왕권이 약화되면서 시민혁명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는데, 시민의식이 높아지고 계몽주의가 만연하게 된 19세기 중반에 제국 내 여러 민족들의 자치권과 독립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특히 모라비아 왕국과 보헤미아 왕국, 신성로마제국을 거치며 자신들의 언어와 전통, 문화를 유지하고 있었던 슬라브인들에게도 민족주의는 마음 속 거대한 파도와도 같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통치 하에 보헤미아 지역에서 태어난 두 명의 예술가 안토닌 드보르작(Antonin Dvorak)과 알폰스 무하(Alphonse Mucha)에게도 민족주의는 숙명과 같이 그들 인생을 따라다녔다.
애국심이 가득했던 그들의 작품 밑바탕에 흐르고 있는 강한 서정성과 예술세계의 특징들은 무엇일까.
◆ 성실함(Diligent)
예술가에게 재능이란 토양과도 같다. 토양 속에 씨를 뿌려 열매를 맺기까지는 많은 정성과 노력, 운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우리가 그것을 성실함이라고 한다면, 성실함은 어쩌면 재능보다 휠씬 중요한 요소일수도 있다.
누군가는 쉽게 자신의 씨앗을 터뜨려 꽃피울 수 있지만 그 역시 성실함이 유지되지 못한다면 용두사미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드보르작과 무하에게 성실함은 잠자고 있던 그들 예술성을 꽃피우게 만드는 강력한 원동력이었다.
프라하 근교에서 도축업자의 아들로 태어난 드보르작은 어릴 적부터 수준급으로 치터(Zither,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에서 널리 애용됐던 목이 없는 납작한 현악기)를 다룰 줄 알았던 아버지의 연주를 보고 자랐다.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던 드보르작이었지만 가업을 잇길 바랬던 아버지의 반대로 인해 원하던 음악가의 길은 요원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피아노 실력이 뛰어난 독일어 선생님의 혜안으로 아버지를 설득할 수 있었고 이후 음악학교에서 진학하게 된 그는 프라하 국민극장 부속 관현악단의 비올라 연주자로 들어가게 된다.
박봉에 피아노 레슨까지 하며 생활고에 시달리던 드보르작이었지만 선배 스메타나의 제안으로 작곡에 입문하게 되었고, 시간적 여유가 있었던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이직하면서 작곡활동에 좀 더 매진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결혼하고 여전히 힘든 생활을 하던 드보르작에게도 행운이 찾아왔다. 유럽의 저명한 음악비평가인 한슬릭(Eduard Hanslick)을 만났는데, 당대 최고의 음악가 중 한 명인 브람스가 자신의 음악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고 알려준 것이다.
이후 드보르작은 한슬릭의 소개로 브람스를 만나게 되고 브람스는 후배 음악가에게 유명음악 출판사인 짐 로크사의 출판을 주선해주었다. 이후 약간의 부침은 있었지만,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그의 작품집은 여러 편의 오페라와 9개의 교향곡, 종교 미사곡, 가곡, 합창곡, 피아노곡, 여러 협주곡과 실내악곡 등으로 이루어져있다. 이는 드보르작의 근면함과 성실함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알폰스 무하 역시 성실함은 그의 예술세계에서 중요한 요소다. 어릴 적 어머니로부터 장난감 대신 목걸이 연필을 선물 받은 무하에게 회화는 어쩌면 숙명과도 같았다.
특히 유년기에 그린 십자가 그림은 그의 예술적 소질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다빈치나 미켈란젤로, 피카소가 어린 시절에 보여준 천재성과는 거리감이 있었다.
심지어 그는 18세에 프라하 아카데미에 낙방했는데 한 심사위원은 그에게 다른 일을 찾아보도록 권유까지 했다.
이후 비엔나로 건너간 그는 무대배경을 그리는 화방의 견습생을 거쳐 후원자인 쿠엔 벨라시 백작을 만났고 뮌헨과 파리에서 성실히 유학하며 자신의 성공시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결정적 명성을 떨치게 된 계기는 파리 최고의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Sarah Bernhardt)의 <지스몽다(Gismonda)> 연극포스터를 그리게 된 것으로, 사람들은 그의 포스터가 파리시내에 걸린 지 하루 만에 모두 가져가버렸다.
물론 그의 명성은 한 장의 포스터에서 시작되었을 수 있지만, 성실하고 꾸준했던 무하는 이미 프로 일러스트로써 출판사에 정기기고를 하고 있었고 파리살롱 전에도 입선했다.
어쨌든 그의 드로잉 수업은 상업적으로도 성공하고 있었다. 무하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운 곡선과 성실함을 통해 다져진 기본기는 언제든 그의 성공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였다.
◆ 아르누보-새로운 세계(Art Nouveau & New World)
아르누보(Art Nouveau)는 프랑스어로 ‘새로운 예술’ 또는 ‘새로운 스타일의 미술’을 뜻하는 단어로, 순수미술과 상업미술의 과도기에 나온 사조다.
단어자체가 생겨난 계기는 건축가 사무엘 빙(Samuel Bing)이 설계한 ‘장식적인 화랑건물(Maison de l'Art Nouveau)’에서 가져왔는데, 이후 무하 스타일을 일컫는 단어가 됐다.
무하의 소용돌이치는 곡선과 자연에서 얻은 모티브들은 모두 아름답게 묘사되고 있으며 여러 상징적 의미 또한 지니고 있는데, 그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신비로운 색채와 신화적이고 매혹적인 분위기에 압도 당하게 된다.
프랑스인들은 모든 기술과 문화예술이 번성했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를 ‘좋은 시절’이라 부르는 ‘벨 에포크(Belle Epoque)’ 시대라고 한다.
벨 에포크 시절 무하는 한 장의 포스터도 예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가난한 사람도 예술을 즐길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예술세계를 단순회화에서 공예와 각종 상업적인 디자인으로까지 넓혀갔다.
아르누보를 주도한 무하 스타일은 일본 애니메이션을 비롯해 디즈니, 팝 아트와 각종 상업디자인까지 현대문화 전반에 걸쳐 다양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드보르작 또한 19세기말 새로운 스타일과 변화의 물결을 자신의 작품에 녹여내고 있다. 1892년 미국 뉴욕에 내셔널음악원 원장으로 부임한 그는 미국의 광활한 자연과 에너지, 그리고 원주민과 흑인들의 음악에서 영감을 받아 대표적인 작품들을 남겼다.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와 현악사중주 <아메리카>, 첼로 협주곡 등은 그의 대표작인데, 모두 미국에서의 새로운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그는 인종차별과 우생학이 지배하던 시기에 클래식음악의 문호를 인종과 상관없이 흑인들과 원주민에게 열었으며 토속음악과 영가들을 전수받아 작품에 적용했고 그들의 문화적 잠재력을 높이 평가했다.
이처럼 드보르작의 새로운 스타일과 예술에 대한 열린 자세는 이후 미국적 색채를 지닌 아론 코플랜드(Aaron Copland)나 찰스 아이브스(Charles Ives) 등 미국의 여러 작곡가들에게 초석이 됐다고 볼 수 있다.
◆ 슬라브 무곡과 서사시
언어는 민족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단결시켜주는 강력한 수단이다. 슬라브의 어원은 원시 슬라브어 ‘Slovo’에서 유래했고, 슬라브 인은 슬라브어파를 쓰는 인도유럽인 민족을 지칭한다.
역사적으로 슬라브민족은 외세의 침략으로 많은 고통을 받아왔는데, 노예를 뜻하는 ‘Slave’가 슬라브족 ‘Slavs’에서 유래한 것만 보더라도 그들 민족의 질곡이 느껴진다.
그래서 그들 문화에는 ‘한(恨)’의 요소가 깊이 자리잡고 있는데, 드보르작의 <슬라브 무곡>과 무하의 <슬라브 서사시> 작품은 그들의 정서를 잘 반영하고 있다.
한편 드보르작은 보헤미아와 발칸반도 일대에 흩어져있는 민속 무곡을 수집해 1878년 1집과 1886년 2집을 출판했다.
모두 피아노곡으로 작곡되었다가 이후 관현악버전으로 편곡됐다. 1집은 체코 보헤미아 지방의 춤곡 느낌을, 2집은 체코를 벗어나 범 슬라브적인 멜로디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 중 작품번호 op.72의 2번은 그의 현악세레나데 2악장 템포 디 발세(Tempo di valse)나 가곡 <어머니가 가르쳐준 노래>처럼 서정적이고 매우 아름다운 멜로디의 곡으로, 크라이슬러가 편곡한 바이올린 곡으로도 종종 연주된다.
무하의 슬라브 서사시는 총 20개의 연작시리즈로 20여년에 걸쳐 완성된 가로 6미터 세로 8미터에 이르는 대작이다. 그는 이 작품을 위해 발칸반도를 여행하며 자신들의 관습과 역사를 연구했으며, 미국으로 건너가 직접 후원자를 찾았다.
20개의 작품 중 10개는 자신의 본향인 체코의 역사와 에피소드를, 나머지 10개는 범 슬라브적인 작품으로 구성돼있다. 특히 1926년에 마지막으로 완성된 <슬라브 민족의 역사 찬미>는 그동안 전쟁의 시련과 고통,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슬라브 민족의 자유를 상징하고 있다.
민족적 색채가 진한 드보르작의 무곡과 무하의 서사시는 어두웠던 그들의 지난 역사만을 표현하지 않는다. 그들 작품은 시련을 이겨내려는 강인함과 포기하지 않은 희망을 작품을 통해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 코다(Coda)
드보르작과 무하는 초창기를 제외하고는 예술가로써 풍족하고 존경 받는 삶을 살아왔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체코가 사회주의화 되면서 그들의 예술성이 도마 위에 올라 폄하되기도 하였지만, 지금은 민족과 나라를 대표하는 예술가로 평가 받고 있다.
민족의 자주성과 해방을 위해 헌신한 그들은 지금의 독립된 체코의 모습은 보지 못했지만 마음속의 애국심은 작품을 통해 영원히 살아있다.
사진이 생기면서 일자리를 잃은 동료와는 다르게 인물사진을 자신의 작품에 적용한 무하, 그리고 모두가 유색인종을 차별하며 그들을 평가절하할 때 그들의 문화적 잠재력을 인정한 드보르작은 진정 깨어있는 지성인이었다.
결국 그들의 성실함과 열린 사고는 평범함을 비범함으로 이끌어 주었다. 파울로 코엘료(Paulo Coelho)의 <순례자>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비범한 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길 위에 존재한다”고.
☞ 추천음반
드보르작의 교향곡은 바츨라프 노이만이 지휘하는 체코필의 연주를 추천한다.
개인적으로 교향곡 8번은 조지 셸의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연주를 좋아한다. 또한 대중적으로 알려진 카라얀과 베를린 필이 연주한 교향곡과 현악세레나데 음반도 훌륭하다.
현악사중주 곡 은 스메타나 사중주단과 클리블랜드 사중주단의 연주를, 첼로협주곡은 피에르 푸르니에와 로스트로포비치의 연주를 추천하겠다.
삶의 기쁨과 아픔을 해학적으로 표현한 유모레스크와 가곡 <어머니가 가르쳐 주신 노래(songs my mother taught me)>는 크라이슬러의 바이올린 편곡 연주로 들어보기를 권한다.
◆ 김상균 바이올리니스트
서울대 음대 재학 중 오스트리아로 건너가 비엔나 국립음대와 클리블랜드 음악원 최고연주자과정 최우수 졸업. 이 후 Memphis 심포니, Chicago civic오케스트라, Ohio필하모닉 악장 등을 역임하고 London 심포니, Royal Flemisch 심포니 오디션선발 및 국내외 악장, 솔리스트, 챔버연주자로도 활발히 활동 중이다. eigenartig@naver.com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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