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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모나리자’ 품은 작지만 보석같은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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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Roman Boed 

거스 히딩크가 축구로 우리나라를 전 세계에 알렸다면 지금으로부터 350여 년 전 히딩크의 네덜란드인 조상 하멜(1630~1692)은 책을 통해 조선이라는 나라의 존재를 서방세계에 최초로 알린 인물이다. 하멜은 1653년 일본으로 향하던 무역선 스페르베르호가 제주도에 표류하는 바람에 13년 28일 동안 조선에 억류됐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선원 겸 서기였다.
우여곡절 끝에 1666년 조선을 탈출해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1668년 암스테르담으로 귀환한 하멜은 그 해에 서양인이 우리나라에 대해 처음으로 저술한 책 를 펴냈다. 조선의 풍속, 지리, 문화, 언어, 정치, 교육, 종교 등을 서양인의 눈으로 기술한 는 영국, 독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각국에서도 발간돼 우리나라가 서구에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네덜란드와 우리나라의 인연은 또 있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다. 헤이그에는 이준 열사의 애국심을 기리는 유럽 유일의 항일운동유적지 이준 열사기념관(Yi Jun Peace Museum)이 있다. 1907년 7월 14일 이준 열사가 순국한 숙소로 사용했던 호텔로 1995년 8월 5일 개관했다.
제2차 만국평화회의는 헤이그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로 고딕 양식의 13세기 고성인 비넨호프에 있는 ‘기사의 집’에서 열렸는데 현재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비넨호프 옆에는 네덜란드에서 손에 꼽히는 미술관이 하나 있는데 바로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이다. 암스테르담에 자리한 반 고흐 미술관과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과 함께 네덜란드 3대 미술관이다.

▶네덜란드 행정수도 헤이그의 정부청사 건물들이 밀집한 비넨호프 광장에 있는 기사의 집. 1907년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던 장소로 우리에게는 가슴 아픈 역사가 서린 곳이다. ©Richard Mortel


17세기 무역·문화의 첨병, 네덜란드 중심지 헤이그
인구 1700만여 명인 네덜란드는 국토 면적이 4만 1000여 ㎢로 남한의 절반도 안 되는 작은 나라다. 국토의 26%가 해수면보다 낮아 간척사업과 농지개량사업이 발달한 나라다. 국토 특성상 바닷물을 막기 위해 쌓아 올린 인공제방에 고인 물을 퍼내기 위한 시설인 풍차가 발달했는데 지금은 흔치가 않다.
감자와 양파, 토마토 등 세계적인 농산물 수출국인 네덜란드 경제의 전성기는 17세기였다. 당시 네덜란드가 해외 진출의 거점으로 설립한 주식회사 동인도회사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세계 최강의 무역국으로 질주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남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북아메리카 등 광범위한 지역에 식민지를 건설한 네덜란드는 이 시기에 문화적으로도 황금시대를 구가했다. 초상화가 프란츠 할스(1581~1666)와 빛의 연금술사 렘브란트(1606~1669), 실내 풍속화의 대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1632~1675) 등 바로크 미술의 거장과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고 설파한 철학자 스피노자(1632~1677)를 배출하며 네덜란드 문화의 선진화를 이끌었다.
입헌군주제 국가로 대의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네덜란드의 수도는 암스테르담이나 국회의사당 등 정부 기관이 운집해 있는 헤이그가 행정의 중심지이자 정치 1번지다. 우리나라 대사관과 각국의 주재 공관, 국제사법재판소도 헤이그에 있다.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은 원래 17세기 네덜란드령 브라질 총독을 지낸 요한 마우리츠 백작(1604~1679)이 저택으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1633년~1644년 사이에 네덜란드 최초의 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저택은 좌우대칭의 사이좋은 균형미가 돋보이는 벽기둥이 일품으로 건축학적으로도 의미가 남다른 곳이다.
1704년 화재로 저택 내부가 소실돼 1708년~1718년 10년 동안 복원공사를 통해 재단장했다. 1820년 네덜란드 정부에서 저택을 사들이면서 미술관 개관 준비에 들어갔다.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12전시실 내부 ©Txllxt TxllxT│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렘브란트 등 네덜란드 미술의 황금기 걸작 보유
저택에서 미술관으로 용도 변경된 것은 1822년부터로 렘브란트, 페르메이르 등 17세기 네덜란드 미술의 황금기 걸작을 포함해 독일, 플랑드르, 프랑스 미술 약 800점의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다. 개관 때부터 줄곧 국립미술관으로 운영되다가 1995년 민영화됐다.
컬렉션의 모태는 네덜란드 연합왕국의 초대 국왕 빌럼 1세(1772~1843, 재위 1815~1840)가 선대 왕인 빌럼 5세(1748~1806)에게서 물려받은 가문의 수집품이다.
빌럼 5세가 소장하던 컬렉션은 1795년 네덜란드를 침공한 프랑스 군대에 의해 한때 몰수되기도 했으나 1815년 네덜란드가 영국, 벨기에, 독일군과 동맹군으로 참가한 워털루 전쟁에서 승리한 뒤 돌려받았다.
이 해에 네덜란드 왕으로 즉위한 빌럼 1세는 우여곡절 끝에 되찾은 가문의 컬렉션을 국가에 기증함으로써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출범의 초석을 다졌다. 나아가 빌럼 1세는 페르메이르의 대표작 중 하나인 ‘델프트의 풍경’과 렘브란트의 집단 초상화 걸작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를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이 소장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등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소장품 중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페르메이르의 작품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1881년 네덜란드 육군 장교이자 계보학자 겸 수집가인 안드레스 톰베(1816~1902)가 미술관에 임대한 데 이어 1902년 기증한 것이다.
2층으로 지어진 미술관 건물은 1, 2층이 같은 형태로 설계됐으며 4개의 갤러리와 중앙 홀로 구성돼 있다. 중앙 홀을 기준으로 완벽한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특히 곁방과 화장실이 갤러리마다 딸려 있어 마우리츠 백작의 저택이었음을 알 수 있다. 미술관 건물 양쪽 옆으로 보이는 토대로부터 지붕 위를 뚫고 솟구친 4개의 벽기둥이 이색적이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캔버스에 유화, 44.5×39cm, 1665년경 

소장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소장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진주 귀걸이를 한 지극히 평범한 소녀를 그린 초상화지만 그림 속에는 신비롭고 매혹적인 요소로 가득하다.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다보는 모습과 촉촉하게 윤기가 감도는 살짝 벌어진 입술, 영롱한 눈망울에서 우리에게 뭔가 말을 걸어오는 듯한 소녀의 온화한 표정이 느껴진다.
소녀가 입고 있는 옷은 17세기 네덜란드풍이 아니고 머리에 두른 푸른 터번과 함께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의 ‘모나리자’(1503~1506)처럼 눈썹과 속눈썹이 없고 소녀의 신원은 현재까지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터번을 그리는 데에 사용된 코발트블루 물감은 당시 최고급 광석인 청금석에서 추출된 울트라마린인데 희귀할 뿐 아니라 빛깔 자체가 아름다워 소녀의 신비성을 한껏 부추기고 있다. 귀에 달린 듯, 달리지 않은 듯한 진주 귀걸이에 이르면 소녀의 표정에 대한 해석은 더욱 미궁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 그림이 ‘북유럽의 모나리자’로 불리는 까닭이다.
빛과 색채가 빚어낸 걸작으로 1999년 트레이시 슈발리에(1962~)를 세계적인 작가로 떠오르게 한 동명의 소설과 2004년과 2018년 두 차례 개봉한 영화 덕분에 더욱 유명해졌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델프트의 풍경’, 캔버스에 유화, 96.5×117.5cm, 1660년경~1661년경 

▶렘브란트,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캔버스에 유화, 169.5×216.5cm, 1632│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델프트의 풍경’과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델프트의 풍경’은 네덜란드 남부의 작은 도시로 페르메이르가 태어나고 자란 델프트의 평화롭고 한적한 풍경을 섬세하고 조화로운 필치로 담아낸 역작이다. 청명한 하늘 아래 붉은색 집들과 신, 구 교회의 첨탑, 바람 한 점 없는 잔잔한 수면, 강가에 정박한 배, 선착장에 옹기종기 모여 정담을 나누는 마을 사람들….
델프트의 아침 풍경을 정지된 시간처럼 고요한 모습으로 따뜻하게 묘사한 이 그림을 보고 첫눈에 반한 현대소설의 창시자인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1871~1922)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라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200명이 넘는 등장인물이 나오는 프루스트의 연작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913~1927)에 ‘델프트의 풍경’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된다.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는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유행한 단체초상화의 하나다. ‘야경’(1642)과 함께 렘브란트가 그린 단체초상화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빛의 마술사’답게 빛과 어둠이라는 대척점에 놓인 두 요소를 이용해 삶과 죽음이라는 또 다른 상반된 생명현상을 압도적인 사실 기법으로 표현한 걸작이다.
렘브란트가 26세 때 그린 그림의 내용은 제목 그대로다. 맨 오른쪽 모자 쓴 이가 니콜라스 튈프 박사로 암스테르담의 저명한 외과 의사이자 암스테르담 시 의원을 지낸 실제 인물이다. 수강생들은 외과 의사 조합 회원들로 튈프 박사가 렘브란트에게 직접 의뢰해 제작한 단체초상화의 모델들이다. 팔뚝과 손 근육을 해부학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튈프 박사가 시체의 팔을 절개하는 장면을 포착한 그림이다.
렘브란트 단체초상화의 특징은 모델들을 일렬횡대로 세워 묘사하는 고리타분한 방식을 배제했다는 데에 있다. 그림에서 보다시피 7명의 수강생은 각자 개성적인 자세와 표정을 지으면서도 전체적으로 튈프 박사의 강의에 집중하는 안정적이고 통일된 구도를 보여주고 있다.
튈프 박사와 수강생들의 몸짓과 얼굴에서 강의의 열기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빛이 수강생들의 얼굴과 핏기 하나 없는 창백한 시체에 쏠리게 함으로써 해부학 강의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데에 성공한 렘브란트의 재능이 놀랍다. 시체 배꼽 부분에 새겨진 ‘R’자는 렘브란트의 이름 첫 글자다. 시체 발치에 펼쳐진 책은 해부학 교재다.

박인권 문화 칼럼니스트_ PIK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전 문화레저부 부장과 한국사립미술관협회 팀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 미술 연구용역 보고서 ‘미술관 건립·운영 매뉴얼’ ‘미술관 마케팅 백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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