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는 내 정체성이 아니다 내 자신을 사랑하면 내 삶도 견고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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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스트리트의 시각장애인 애널리스트 신순규
그의 하루는 새벽 3시 기상으로 시작된다. 일어나 한두 시간 글을 쓰는 등 작업 후에 새벽 6시 출근길에 나선다. 미국 뉴저지에서 기차와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회사가 있는 뉴욕 맨해튼에 도착한다. 7시 20분이면 회사에 도착, 8시 45분이면 기업 분석 브리핑을 시작한다. 월스트리트에서 애널리스트로 30년째 일하고 있는 신순규(57) 씨의 일상이다.
오랜만에 한국을 찾은 그를 2월 16일 서울 CGV용산아이파크몰에서 만났다. 한 기업 행사에 참석해 서울맹학교 재학생과 졸업생들을 만난 참이었다. 그에게는 학교 후배들이기도 하다. 그 역시 시각장애인이다. 그는 아홉 살에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 녹내장과 망막 분리로 이미 헤아릴 수 없이 여러 번의 수술을 받은 후였다.
‘피아노 연주는 할 수 있겠지’, 부모님의 뜻으로 그는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를 연주했다. 맹학교에서 합창단 반주를 하며 미국 순회공연을 했다. 그의 연주를 본 미국 학교의 제안으로 그는 열다섯 살에 미국 유학을 떠났다. 미국에서 만난 수양부모는 그를 친자식처럼 대했다. 그는 특수학교가 아닌 일반 공립학교에 다니며 학생회장으로 활동했다. 하버드대학에 진학해 심리학을 공부한 후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경영학과 조직학을 전공했다. 1994년 JP모건에 입사하며 월스트리트 생활을 시작했다. 현재는 브라운 브라더스 해리먼(Brown Brothers Harriman)에서 이사로 재직하며 애널리스트 일을 계속하고 있다. 그는 시각장애인으로서는 세계 최초로 공인재무분석사(CFA) 자격을 획득했다.
세계 최초의 시각장애인 CFA이자 월스트리트 현역 애널리스트다. 월스트리트에 시각장애인 애널리스트들이 많나?
현재는 5명이다. 여전히 월스트리트에서 애널리스트로 일하는 시각장애인은 많지 않다. 그중 한 명은 완전히 시력을 상실한 전맹이 아니라 약시(弱視)라서 그에게 ‘당신은 0.5명으로 쳐야 한다’고 농담을 한다.
시각장애인이 애널리스트에 도전하는 것이 어려운가?
치열한 분야이다 보니 쉽게 도전을 못하는 것 같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방법을 찾아보자’가 내 신조다. 영어로 무언가 할 수 있는 걸 ‘어빌러티(ability)’라고 한다. 할 수 없는 건 ‘디서빌러티(disability)’다. ‘할 수 없다’를 ‘할 수 있다’로 바꾸려면 ‘D, I, S’ 이 세 가지가 중요하다.
‘D, I, S’가 뭔가?
D는 ‘Determination(결단)’, I는 ‘Identity(정체성)’, S는 ‘Skill(기술)’이다. 살다 보면 좌절하게 만드는 일을 자주 만난다. 나는 정신과 의사가 되기 위해 하버드대학에서 심리학을 공부했다. 그런데 미국의사협회에서 시각장애인은 의사가 될 수 없다고 지침을 만들었다. 의사의 꿈을 하루아침에 잃었다. JP모건 입사 후 4년 뒤엔 감원 대상에 올랐다. 그때마다 결단을 해야 했다. 의사의 꿈을 포기한 후 대학원에서 조직학을 공부하며 월스트리트에서 일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JP모건에서 감원당한 후 ‘내 길이 아닌가’ 고민했지만 결론은 ‘내가 즐기는 일이니 계속 가자’였다. 이직할 곳을 찾았고 결국 연봉을 70% 더 올려 받고 새 회사에 출근할 수 있었다.
‘Identity(정체성)’와 ‘Skill(기술)’의 의미도 궁금하다.
하버드 출신들은 자기소개할 때 출신 대학 얘기를 한다는 말이 있다. 자기소개를 하면서 하버드를 말하는 건 바보 같은 것이다. 출신 대학이 정체성이 될 수 없다. 장애도 마찬가지다. 나는 장애로 좀 불편한 삶을 사는 사람이지 장애가 나의 정체성이 되면 안 된다. 미국의 복지정책을 보면 한국에 비해 안 되는 게 많다. 미국엔 ‘복지콜’도 없고 지하철 스크린도어도 없다. 기차 탈 때 자리까지 안내해주는 사람도 없다. 장애를 나의 정체성의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감을 가지려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술(Skill)’을 익혀야 한다. 예를 들면 시각장애인의 경우 점자, 보행기술 같은 것이다.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고 혼자서 잘살 수 있어야 된다는 얘기로 들린다.
장애인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 교육이 중요하다. 맹학교의 학부모들을 만나면 이런 말을 해준다. ‘점자나 보행은 한 살이라도 어릴 때 가르치는 게 더 낫다. 그래야 몸에 밴다. 일반 초등학교에 보내 통합교육을 고집하면 점자도 보행도 제대로 못 배운다. 오히려 아이들을 고생시킨다.’
맹학교 후배들을 만나보니 어떤 생각이 들었나?
반갑기도 하고 걱정도 된다. 내 경험과 비교하면 한국에서 시각장애인으로 살기 상당히 편해지고 복지정책도 좋아졌다. 한 가지는 예외다. 진로 선택의 폭이 여전히 좁다. 좋은 대학에 가고 공무원 시험에도 합격하는 시각장애인이 있지만 여전히 침술·안마사로 일하는 시각장애인이 많다. 컴퓨터 화면을 읽어주는 등 업무를 보조해주는 컴퓨터 프로그램이 많다. 사무직 업무를 못할 이유가 없다.
시각장애인이 애널리스트가 되면 유리한 점이 있나?
세상엔 소음과 신호가 있다. 기업분석을 하려고 보면 정보들이 사방에서 쏟아진다. 그중엔 정확한 뉴스도 있지만 루머도 있고 오류도 많다. 사람이 습득하는 정보 중 80% 가까이는 시력을 통해서 들어온다고 한다. 나는 내가 필요한 것만 본다. 기업들의 보고서와 진짜 존경하는 애널리스트들의 분석을 본다. 뉴스도 월스트리트저널, 블룸버그 뉴스만 본다.
소음에서 자유로워지면 어떤 이점이 있나?
투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능이나 지식이 아니다. 투자에서 감정을 빼는 거다. 뭔가 많이 들으면 들을수록 감정적으로 흔들릴 수 있다. 정보를 받아들이는 채널이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좁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사고팔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자기방어가 되는 거다. 소음이 많은 세상에서 신호를 골라내기 더 쉽다고 할 수 있다.
코로나19 때문에 전 세계가 힘들었다. 월스트리트에서 그 시기를 통과하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기업 분석을 할 때 ‘스트레스 테스트’라는 것을 한다. 여러 시나리오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1918년의 스페인 독감 팬데믹이 온다면 이 회사는 어떻게 될까’였다. 그때 나온 테스트 결과와 비교하면 2020년에 왔던 글로벌 팬데믹을 우리는 잘 극복해냈다. 사실 1918년 같은 감염병 사태가 일어나면 의료 시스템 자체가 붕괴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실제 상황에서는 백신이 빨리 개발됐고 집단면역이 예상보다 훨씬 빨리 형성됐다. 스트레스 테스트도 결국 상상이다. 우리는 실제보다 훨씬 더 심한 고난을 상상하곤 한다는 얘기다.
‘금수저, 흙수저’라는 표현을 들어봤나? 우리는 자신의 문제에 대해 실제보다 더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나는 늘 한국을 그리워하기 때문에 한국과 끈을 유지하려 하고 한국에서 들려오는 소식과 뉴스에 귀를 기울인다. 자살 얘기가 들려오면 가장 안타깝다. 삶에서 도전과 풍파는 항상 닥쳐올 수 있다. 그런 어려움을 견뎌내는 게 삶의 ‘견고함’이다. 견고해지기 위해선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자기가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알면 자기 자신을 함부로 해할 수 없다. 한국사회엔 꼭 신체장애가 아니더라도 타고난 환경을 장애로 여기는 의식이 많은 것 같다. ‘흙수저’ 같은 표현이 생기면서 누구나 자신에게 어떤 장애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 부모에게 의존하는 금수저 출신들이 오히려 자신의 길을 가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
한국 금융계로 이직하고 싶은 생각은 없나?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어 알아본 적도 있다. 지금은 너무 늦은 것 같다. 미국에는 애널리스트로서 한 분야를 이삼십 년간 책임지며 일하다 퇴직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은 그게 불가능한 것 같다. 사실 증권분석 일은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들어주는 일이다. 만약 한국으로 돌아온다면 삶의 의미를 찾는 다른 일을 하고 싶다.
예를 들면 어떤 일인가?
기업의 장애인 고용과 관련해 지원하는 업무나 전자제품 디자인에 접근성을 가미하는 그런 업무다. 인간이 세상에 내동댕이쳐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에게는 여기에 와 있는 목적과 이유가 있다. 내가 글을 쓰고 강연을 하는 이유다. 살아오며 정말 많은 걸 받았다. 받은 것을 돌려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는 2008년부터 한국의 보육원 아이들을 돕고 있다. 아이들이 미국을 방문해 연수를 받고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 이를 위해 ‘야나(YANA, You Are Not Alone)’라는 자선단체도 설립했다.
보육원 아이들을 돕게 된 계기가 있나?
2007년, 2008년쯤 한국에 아직 보육원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큰 충격이었다. 한국은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가 됐는데도 2만여 명의 아이들이 보육원에 산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나에겐 낳아주고 사랑으로 키워준 한국의 부모님과 입양한 것도 아니고 돈을 받고 홈스테이를 한 것도 아닌데 책임지고 키워주신 미국의 부모님이 있다. 나는 부모님이 네 분이나 계신데 가족이 하나도 없는 아이들이 2만 명이나 된다니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순간은 언제인가?
맨 처음 미국으로 데려온 아이가 예진이다. 지금은 딸이 됐다. 예진이가 우리 아들과 같은 학교에 다녔는데 성이 다른 게 신경 쓰였는지 ‘학교에서만 성을 바꾸면 안 되냐’고 묻더라. ‘네가 너인 것을 절대 부끄러워하지 마라. 네가 보육원에서 성장한 데는 네 잘못은 전혀 없다. 어른들이 잘못한 거다’라고 말해줬다. 예진이가 대학교에 진학했는데 친구들에게 ‘한국 보육원에서 12년 살다 뉴저지에 사는 가족에 입양돼서 자랐다’는 말을 했다고 하더라. 그 얘기를 굳이 왜 했냐고 물었더니 예진이가 ‘그걸 감추면 친구들과의 사이에 거짓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친구를 진실되게 못 사귈 것 같았다’고 하더라. 그때 깨달았다. ‘내가 나인 게 부끄러운 게 아니라는 메시지가 예진이 마음속에 제대로 들어갔구나. 우리가 뭔가를 해냈구나.’ 아내와 함께 울었다.
하주희 기자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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