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저녁, 나의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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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얼굴 보지 마! 빨리 시집가! 얼른 애 낳아! 부모는 자식을 위해 잔소리를 한다. 하지만 앞뒤 다 자르고 결론만 말하는 그 화법을, 연륜이 부족한 우리 자식들은 미처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자식을 위해 부모는 잔소리를 구체적으로 해야 할 필요가 있다. ‘남자가 잘생기면 세상이 그를 가만두지 않아. 가정의 평화를 유지하기 어려우니 결혼 상대로는 지조 있는 남자가 최고다’라든지 ‘늦은 나이에 남편감을 찾으려면 한 번 다녀온 남자를 고려할 수밖에 없는데 오죽하면 전 부인이 그 사람을 방생했겠니’라든지 ‘아이를 낳지 않는 것과 낳지 못하는 것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으니 가임기 동안 출산을 진지하게 고심해 보거라’ 하는 식으로 말이다.
부모와의 언어불통으로 나는 싱글의 삶을 살고 있다. 혼자가 나쁘진 않지만 가정을 이룬 친구를 만날 때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샘솟는 부러운 마음을 막을 길이 없다. 얼마 전 새집으로 이사한 기혼 친구의 집을 찾았을 때도 그랬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얼굴은 전에 없이 편안해 보였다. 은은한 미소의 원천은 ‘퇴사’에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지만 그마저도 남편의 지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친구는 저녁이 있는 삶을 보내는 지금이 너무나 행복하다고 말했다. 출출하면 아이와 함께 쿠키를 굽고, 배고프면 세 식구가 식탁에 둘러앉아 저녁밥을 먹고, 배부르면 다 같이 산책을 하는 밤이 너무나 편안하단다.
친구의 저녁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내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일터였다. 정말이지 놀고 싶었다. 간절하게 눕고 싶었다. 격렬하게 쉬고 싶었다. 하지만 일을 그만둬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남편이 나에게는 없기에 생활 전선에서의 사투는 불가피했다. 치질이 걸리기 전까지는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지 않으리. 배수진을 치고 업무에 돌입한 나는 자정이 다 돼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덜너덜해진 손으로 주섬주섬 짐을 챙기며 텅 빈 사무실을 휘 둘러봤다. 그때 내 머릿속을 스친 것은 괴롭다거나 외롭다거나 아무 남자하고나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이 아닌 ‘이게 내 저녁이구나!’ 하는 알아차림이었다.
누구에게나 저녁은 있다. 다만 사람마다 다른 얼굴과 다른 목소리와 다른 생각을 지니고 있듯 저녁의 형태 역시 다를 뿐이다. 가족과 함께하는 안락한 저녁도 좋지만 치열하게 일한 끝에 맞이하는 고요한 저녁이 나에게는 더욱 어울린다. 휘영청 밝은 달의 호위를 받으며 자정의 산책을 즐긴다. 타인의 저녁을 부러워하는 대신 나의 저녁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으니 맞이하는 이 없는 컴컴한 집에 들어서는 일도 두렵지 않다. 때마침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기쁜 마음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나는 반가운 손님을 와락 끌어안았다. 일인 보쌈의 따끈한 온기가 온몸에 스르르 퍼지자 하루의 피로가 사르르 녹아내렸다. 그래, 이게 바로 내 저녁이야.
이주윤
글을 쓰고 그림도 그린다. 어쩌다 보니 맞춤법을 주제로 한 책을 여러 권 출간했다. 국어사전 속에서 온종일 헤매는 일이 싫지 않은 걸 보면 아무래도 체질인 듯싶다.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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