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 나만 볼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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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감정이 관계로 발전하는 상호작용이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그렇게 되지 못하는 사랑이 있다. 혼자만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걸 ‘짝사랑’이라고 부른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랑은 짝사랑이고, 가장 무서운 병은 상사병이라고 한다. 상대도 날 봐주고, 생각해 주고, 사랑해 주길 바라지만 상대는 내 마음을 모르니 슬픔은 차오르고 마음은 열병을 앓는다.
짝사랑은 이별만큼은 아니어도 자주 대중가요 소재가 되어 우리를 울리고 위로했다.
바비 킴은 “늘 혼자 사랑하고 혼자 이별하고/늘 혼자 추억하고 혼자 무너지고/사랑이란 놈 그놈 앞에서/언제나 난 늘 빈털터리일 뿐/언제나 난 웃음거릴 뿐/목이 메어 불러도 너는 듣지 못할 그 한 마디”라고 탄식했다.(‘사랑 그놈’ 발췌)
조성모는 너무 힘겨워서 죽겠다고 했다. “아시나요 얼마나 힘겨웠는지/끝내 모르셔도 난 괜찮아요/그댈 향한 그리움의 힘으로 살아왔던 거죠/그대가 없으면 나도 없죠/오늘 이 같은 하늘 아래 그대와 내가 함께 서 있는 마지막 날인 걸 그대 아시나요”(‘아시나요’ 발췌)
조관우는 가려진 커튼 사이로 남의 여인을 훔쳐보며 애태우는 불온한 노래 ‘늪’에서 “진정한 사랑은 언제나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법”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주현미의 히트곡 중 하나는 제목이 ‘짝사랑’이다. “해 질 무렵이면 창가에 앉아/나는요 어느샌가 그대 모습 그려요/사랑한다고 좋아한다고 말해주세요/눈물만큼 고운 별이 될래요 그대 가슴에”
먼 시절에는 짝사랑이 없었을까. 레코드사 전속으로 전업가수가 비로소 등장하기 시작한 1930년대 고복수 선생은 ‘타향살이’(1934년)와 ‘짝사랑’(1936년)으로 식민 치하 국민을 울리고 위로했다. 우리 아버지 세대가 술이 거나하면 부르던 노래다. 이루지 못한 사랑을 돌아보며 자신을 ‘여울에 아롱 젖은 이즈러진 조각달’이요, ‘들녘에 떨고 섰는 임자 없는 들국화’라고 했다.
이은미의 ‘애인 있어요’를 듣는다.
아직도 넌 혼잔 거니 물어보네요
난 그저 웃어요
사랑하고 있죠
사랑하는 사람 있어요
그대는 내가 안쓰러운 건가 봐
좋은 사람 있다며 한번 만나보라 말하죠
그댄 모르죠, 내게도 멋진 애인이 있다는 걸
너무 소중해 꼭 숨겨두었죠
그 사람 나만 볼 수 있어요
내 눈에만 보여요
내 입술에 영원히 담아둘 거야
가끔씩 차오르는 눈물만 알고 있죠
그 사람 그대라는 걸
나는 그 사람 갖고 싶지 않아요
욕심나지 않아요
그냥 사랑하고 싶어요
(일부 반복)
알겠죠 나 혼자 아닌 걸요
안쓰러워 말아요
언젠가는 그 사람 소개할게요
이렇게 차오르는 눈물이 말하나요
그 사람 그대라는 걸
(2005년, 작곡 윤일상·작사 최은하)
짝사랑하던 그를 어느 날 우연히 마주쳤다. 그는 불쑥 “아직도 넌 혼자니”라고 돌직구를 날린다. 당황한 나는 웃음으로 대신한다. 그런 내가 안쓰러운지 그는 남의 속도 모르고 “좋은 사람 있으니 한번 만나 보지”라고 말한다. 천상 바보다. 너무 밉고 야속하다.
하지만 나는 짐짓 내색하지 않는다. 마음속으로만 대답한다.
“아니에요, 나 사랑하는 사람 있거든요. 참 멋진 애인이죠. 너무 소중해 꼭 숨겨두었다고요. 그 사람은 내 눈에만 보이거든요. 가끔씩 차오르는 내 눈물만 알고 있죠.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는 사실을.”
이 세상에서 내 눈물만이 내 사랑을 알고 있다는 가사에 가슴이 시리다. 체념일까, 아니면 성숙함일까. 이어지는 다짐은 더 절절하다.
“하지만 당신이 바로 그 사랑이라고 고백하지 않을래요. 내 입술에만 영원히 담아두고 말하지 않을게요. 욕심내지 않을게요. 당신을 갖지 않을래요. 그냥 혼자 사랑만 할래요.”
당신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랑을 사랑하겠노라, 당신을 욕심내지도 소유하려 하지도 않겠노라, 결연히 마음을 다그치는 것이다.
사랑의 본질이 ‘주는’ 것이라면 짝사랑이야말로 가장 그 본질에 가까운 사랑이다. 짝사랑에는 밀당이 없다. 뜨거운 입맞춤조차 없었으니 차가운 이별도 없다. 돈도 들지 않는다. 가슴앓이만 있다. 어느 날 그 짝사랑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사랑에 한 발짝 성숙해진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래서 짝사랑은 사멸한 사랑이 아니다. 더 위대하게 부활한다.
문학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짝사랑은 베아트리체를 향한 단테의 평생 연모다. 여덟 살의 베아트리체를 파티에서 처음 만나 죽을 때까지 마음속으로만 혼자 사랑했다. 그 사랑이 인류사의 위대한 명작 ‘신곡’을 낳았다. 작품 속에서 베아트리체는 단테에게 천국의 구원자로 환생했다.
‘애인 있어요’는 2005년 ‘맨발의 디바’ 이은미의 6번째 앨범 ‘Ma Non Tanto’에 수록됐다.
발표 당시에는 별 관심을 끌지 못했으나 2008년 최진실-정준호 주연의 MBC 16부작 드라마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 OST로 삽입되면서 폭발적 인기를 얻었다. 최진실의 유작이 되고 만 드라마다. 그해 10월 전 국민을 슬픔에 빠뜨린 그의 영결식에서 추모곡으로 울려 퍼졌다.
당대의 작곡가 윤일상이 만들었고, 노랫말은 시나리오 작가 최은하가 썼다. 최은하는 중앙대학교에서 광고홍보학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으로 널리 알려진 전문 작사가는 아니었다.
애틋하고 호소력 있는 이 노래는 젊은 여성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아 2005~2010년 6년간이나 노래방 1위를 기록했고, 이은미는 제2의 전성기를 열었다. 2009년 한국갤럽이 조사한 ‘한국인의 애창곡’ 1위에 뽑혔다. 2위는 노사연의 ‘만남’이었다.
이은미는 2019년 데뷔 30주년 기자 간담회에서 “제게는 가장 인상에 남는 음악이에요. 가장 힘들었을 때, 가장 어려웠을 때 제게 찾아왔고 이 노래 덕분에 무대에 다시 설 수 있게 되었죠. 당시 저는 번아웃 증후군을 앓고 있었습니다”라고 했다.
폭발적 가창력과 맨발의 무대 매너, 깊은 감수성으로 TV보다 라이브 공연에 애착을 가진 그는 데뷔 35년간 무려 1200회가 넘는 콘서트를 가졌다. 58세가 된 요즘에는 가요계의 큰언니 디바 3명과 함께 ‘골든걸스’로 새로운 면모를 보이고 있다.
2010년에 발표한 또 하나의 히트곡 ‘녹턴’(작곡 윤일상, 작사 최선영·윤일상)은 사랑했지만 헤어진다는 노래다. 이은미의 노래들은 우울을 바탕에 깔고 있는 아름다운 ‘블루’다.
“그동안 잘 지냈나요/먼저 와 기다렸어요/이미 나는 알고 있어요/어떤 말을 하려 하는지/미안해하지 말아요/그대가 잘못한 게 아녜요/사랑 하나로 그 모든 비난을 이길 순 없겠죠/꿈은 여기까지죠/그동안 행복했어요/꽃잎이 흩날리네요/헤어지기엔 아름답죠, 그렇죠”(가사 발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치명적 매혹이다. 로테를 얻지 못한 베르테르는 머리에 권총을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왠지 진정한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아야 맞는 것 같다. 남녀의 사랑은 언젠가는 시들고 서로를 원망하고 때가 묻는다. 보답이 없을수록, 힘들수록, 기약이 없을수록 더욱 순수하고 아름다워지는 것이 짝사랑의 기이한 패러독스다.
◆ 한기봉 전 언론중재위원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로 언론과 글쓰기를 강의했고, 언론중재위원과 신문윤리위원을 지냈다. hkb821072@naver.com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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