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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년째 진료실 지키고 매주 수술 후임 의사 없어 10년 째 못 그만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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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세 현역, 박귀원 중앙대병원 소아외과 임상석좌교수
“아파, 싫어.” 아이가 칭얼댄다. 수술 부위를 접합한 의료용 스테이플러를 빼러온 소아환자다. “진짜 안 아프거든. 그냥 뺄 거야? 수술대 올라가서 마취하고 뺄 거야?” ‘할머니 의사’가 계속 달래자 버티던 아이가 하는 수 없이 침상에 눕는다. 막상 스테이플러를 빼자 아이는 안 아팠는지 금방 조용해진다. 소독을 마치자 아이는 일어서서 방긋대며 웃는다.
1월 8일 중앙대병원 소아외과 박귀원(76) 교수를 진료실에서 만났다. 박 교수는 소아외과의 세계적인 권위자다. 10년 전에 이미 수술 건수 3만 건을 넘었다. 요즘도 매주 수술을 한다. 임상 경험을 담아 집필한 논문은 300여 편이다.
박 교수의 삶은 최초의 연속이다. 서울대 의대 최초 여성 외과 전공의, 서울대 의대 최초 여성 교수, 최초의 여성 소아외과 전문의. 수술대를 지키는 76세 현역 외과의도 찾기 힘들 것이다. 1972년 의대를 졸업했으니 아픈 아이들의 건강을 책임진 것이 벌써 53년째다. 2014년 서울대병원에서 정년퇴직한 그는 중앙대병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서울대 의대 선배인 김성덕 전 중앙대의료원장의 부탁 때문이었다.
“소아 마취 담당이었던 김성덕 전 원장과는 수술방에서 맨날 보던 사이였다.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2~3년만 있으면 후임이 생길 거라 생각했다. 후임을 기다리다 보니 벌써 10년이 됐다.”

후임 교수가 안 나타났나?
3년 전쯤 소아외과를 해보겠다고 레지던트 한 명이 나섰는데 결국 포기하더라. 결혼을 했으니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이유였다.

그는 의사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다. 원래 법조인이 되고 싶었단다. ‘법대 가면 학비를 안 대주겠다’는 부모의 뜻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의대에 진학했다.

의대에 간 걸 후회했나?
대학에 가니 아르바이트를 해서 학비를 벌 수 있더라. ‘이럴 줄 알았으면 법대 갈 걸 그랬다’는 생각을 했지만 나중엔 의대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의술로 봉사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다른 사람의 죄를 정죄해야 하는 법조인이 됐으면 중간에 그만뒀을 것 같다.

서울대 의대에서 여성 최초로 외과를 전공했다. 이유가 있었나?
환자가 나아지는 걸 금방 확인할 수 있어서 좋았다. 외과에 가겠다고 하니 부모님이 반대하더라. 외과 의사였던 아버지는 ‘누가 여자한테 배 내놓고 수술을 받겠냐’며 말리고 산부인과 의사였던 어머니는 ‘산부인과를 가라’며 말렸다. ‘외과는 당직을 서야 하는데 여성이 당직 근무를 할 수 있겠느냐’며 학교에서도 말렸다.

반대를 어떻게 극복했나?
계속 고집하니 부모님도 포기하더라. 남자랑 똑같이 당직 근무를 하겠다고 했다. 당직실에는 들어갈 생각도 못하고 간호사실 한 편에서 잠깐씩 잤다. 그때 가까워진 간호사들과 지금도 친하게 지낸다. 젊어서 그랬는지 중환자 때문에 사흘씩 밤을 새도 멀쩡하더라.

여성 외과의라고 진료를 기피한 환자들이 있었나?
없었다. 그때는 반년간 무의촌에서 파견근무를 해야 전문의 응시자격을 줬다. 춘천도립병원에서 근무할 때 50대 환자가 위궤양 때문에 입원했다. 내가 ‘여자 외과의인데 겁나지 않느냐’고 묻자 그 환자 하는 말이 ‘바느질은 여자가 더 잘하지 않느냐’고 하더라.

외과 중에서도 소아외과를 선택한 이유는 뭔가?
의대를 졸업하고 원자력병원에서 일했다. 은사인 김우기 교수가 ‘어른을 수술하면 5~10년 더 살게 하면 잘하는 거지만 아이들은 80년을 더 살게 해줄 수 있다’면서 소아외과에서 함께 일해보지 않겠냐고 권했다. 엄두가 나지 않아 몇 주를 고민했다. 결국 1979년부터 소아외과 전임의로 일했다.

3만 건이 넘는 수술을 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환자가 있나?
제주도에서 온 두 살 남자아이다. 대장에 신경이 없어 창자가 움직이지 않았다. 소장과 직장 사이에 샛길이 생겨 대변이 새고 소장 염증이 너무 심했다. 네 번이나 수술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더 이상 맞는 항생제도 없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부모에게 아이의 마지막을 어디서 보내게 하고 싶냐 물으니 제주도로 데리고 가겠다고 했다. 제주도립병원에 있는 후배 의사에게 ‘아이를 잘 챙겨달라’고 부탁을 하고 보냈는데 다음날 후배에게 ‘왜 멀쩡한 아이를 보냈냐’면서 전화가 왔다. 하룻밤 만에 깨끗하게 회복이 된 거다. 설명이 안 된다. 지금까지도 이해가 안 되는 일이다.

그 후 아이를 만났나?
몇 주 후 검사를 하러 아이가 서울대병원으로 다시 왔다. ‘뱃속이 얼마나 엉망일까’ 걱정했는데 깨끗하더라. 의료진이 모두 놀랐다. 18세가 돼서 진단서를 떼러 왔는데 건강하게 잘 컸더라. 우리가 아는 게 전부가 아니구나, 기적이라는 게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사가 오가는 현장에서 그 많은 환자를 만났으니 수많은 사연이 있을 터였다. 환자들에 대한 그의 기억은 끝이 없었다.
40년 전 제주도에 사는 한 남성이 아이를 안고 병원으로 왔다. 아이는 식도가 막혀 생명이 위태로웠다. 동네 사람들이 차비를 모아줘 서울에 왔을 정도로 돈이 없었다. 전 국민 건강보험이 없을 때였다. 아이 아버지는 아이를 살려달라고 울었다. 고민하다 해외입양 주선 기관을 연결해줬다. 수술비를 대고 아이를 외국에 보내기로 했다. 수술은 잘 끝났다. 며칠간 사라졌던 아이 아버지가 병원에 나타났다. ‘어떻게든 돈을 구하려 했지만 구하지 못했다’며 울었다. 아버지는 며칠을 울면서 아이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돌봤다. 결국 입양 주선 기관이 포기했다. 13년이 지나 건강하게 자란 아이를 데리고 그 아버지가 찾아왔다. ‘원양어선을 타는데 아프리카의 한 항구에 내렸을 때 교수님을 생각하며 샀다’며 조그만 부조물을 들고 왔다. 수술이 끝나고 회복됐다 싶으면 부모가 아이를 데리고 도망가는 경우도 있었다. 병원 직원이 집으로 쫓아가 보면 형편이 뻔해 그냥 포기하는 경우도 많았다. 수술해준 아이를 병원 직원으로 만난 경우도 있다고 했다.

1977년 출범한 국민건강보험은 1989년 전 국민에게 확대 실시됐다. 현장에서 그 변화의 과정을 지켜본 박 교수는 “그래도 세상이 많이 좋아졌다”고 말했다.



신생아에게 가장 흔한 기형이 뭔가?
서혜부(샅굴부위) 탈장이다. 남자는 100명 중 한 명, 여자는 1000명 중 한 명꼴로 있다. 탈장 수술을 받으면 아무 문제없이 건강하게 살 수 있다. 5~10분이면 수술이 끝나는 경우도 있다. 물론 1년에 한 번 정도는 등골에 식은땀이 날 정도로 어려운 경우도 있긴 하다.

임신 중 초음파 검사로 기형 여부가 다 판별되지 않나?
초음파 검사를 하는 이유는 아기 몸에 있는 질환을 일찍 발견해서 출산 후 잘 고쳐주려는 것이다. 쉽게 고칠 수 있는데 기형아라며 아이를 낙태하는 경우가 있으니 문제다. 임신 8개월 된 산모가 찾아온 적이 있다. 초음파 검사를 해보니 태아에게 2㎝짜리 혹이 발견됐다면서 인공임신중절을 해야 하냐고 묻더라. 혹이 있어도 낳아서 수술해주면 된다고 설득해 보냈다.

기형이 발견됐다고 무조건 두려워 할 필요는 없겠다.
그렇다. 일단 낳으면 수술로 고칠 수 있다. ‘기형아’란 용어부터 바꿔야 한다. 수술 받으면 건강하게 살 수 있는데 ‘기형아’란 낙인을 왜 찍나? 그러니 이상이 발견되면 낙태를 하는 거다. 기형 대신 ‘미생’, ‘미완’이란 용어를 쓰면 어떨까?

미숙아도 수술이 가능한가?
몸무게가 900g인 아기를 수술해준 적이 있다. 30주를 채우고 태어난 아이였다. 식도가 막혀 있었다. 수술 받고 건강하게 퇴원했다.

소아외과 수술의 난도 때문 인가? 후임 의사가 없다.
대한소아외과학회에 소속된 회원 수가 70여 명인데 이 중 절반이 정년퇴임 연령을 넘겼다. 이들이 의료 현장을 떠난 뒤가 큰 문제다. 소아외과는 소아정형외과, 소아신경외과를 빼면 거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진료한다. 같은 수술이라도 성인을 수술하는 것과 다를 수밖에 없다. 임상 경험이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도 수가는 성인보다 소아가 더 낮다. 종합병원마다 어린이병원은 적자다. 이런 식이면 소아외과 전문의가 늘어날 수 없다.

어떻게 해야 할까?
수가 조정도 필요하지만 공공영역에서 어린이병원을 설립해 운영하면 어떨까? 수익과 상관없이 어린이를 진료할 수 있는 병원 말이다. 의사들은 좋은 시설에서 실력을 발휘해 환자를 치료할 수 있고 환자가 회복되면 거기에서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

안경을 안 쓰는데 시력이 좋은가?
0.8 정도다. 중앙대병원에 왔을 때 사람들이 안경 안 쓰고도 수술할 정도로 시력이 좋냐고 놀라더라. 안과에서 검사해보니 난시가 있긴 한데 오히려 수술하는데 도움이 되는 난시라고 하더라.

시력 관리를 어떻게 했나?
특별히 관리한 건 없다. 젊은 시절부터 수술할 때 수술실의 무영등을 밝게 해놓지 않았다. 지나치게 밝은 빛에 오래 노출되면 눈에 좋지 않다. 현재 강원도 춘천시에 있는 사찰 감주사에서 살고 있다. 매일 기차를 타고 출퇴근하는데 움직이는 기차 안에서는 책을 읽거나 노트북을 안 본다. 휴대폰으로 동영상도 안 본다.

춘천에서 서울 흑석동으로 출퇴근하려면 힘들지 않나?
새벽 5시쯤 일어나 남춘천역으로 간다. 6시 12분에 출발하는 ITX-청춘 기차를 타고 용산역에 도착한다. 지하철을 갈아타고 흑석역에서 내려 병원에 도착하면 8시다. 매일 그렇게 출근한다. 처음엔 걷는 게 힘들었는데 지금은 안 힘들다. 서울에 살 때는 걷지 않고 가까운 거리도 차를 타고 다녔다. 지금은 출퇴근 거리만 매일 8000~1만 보를 걷는다. 살도 빠지고 건강이 이전보다 좋아졌다.

인생을 돌아보며 후회하는 게 있나?
없다. 매일 아픈 아이들을 진료하고 수술하며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아왔다. 과거를 되짚어보지도 않는다. 아이들이 나아서 건강히 퇴원하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상태가 안 좋은 아이를 살려놓으면 그때 보람을 느낀다. 병원에 온 아이를 어떻게 수술하는 게 더 좋을까만 늘 고민한다.

하주희 기자


[자료제공 :icon_logo.gif(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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